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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9-1) - " 끝은 또 다른 시작의 다른 말 " / 전완기 목사

관리자 2020-10-29 (목) 08:58 4년전 1522  

본문) 사 6:1~8, 요 8:12~20, 계 15:1~4


어제는 10월의 마지막 날이었죠? 그래서 오늘은 11월 1일! 새로운 11월의 첫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마지막”이라는 말에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절망과 아쉬움을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시작”은 희망과 기대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결국 끝이란 완전한 마지막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본문은 어느 한 지도자의 마지막인 죽음을 알리며 시작합니다. 그는 바로 남유다의 “웃시야 왕”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것을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였지만 이것은 그리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웃시야는 평범한 왕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 민족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26장은 그가 매우 강한 군대를 만들어 유다를 크고 힘 있는 나라로 일으켰음을 상세히 소개한바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남유다 최고의 군사적 전성기를 이끌던 강력한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그만 비극적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하필 그때가 아시리아 제국이 중동지역 최강국으로 급부상하던 시기라는 사실입니다. 웃시야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5년 전에 아시리아 왕으로 즉위한 디글랏 빌레셋 3세는 망해가던 자신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전성기를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동의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도 침략하여 집요하게 수탈하였습니다. 이처럼 동족 북이스라엘을 유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유다 사람들은 머지않아 자신들 역시도 그런 위기에 빠져들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배경과 무척 닮아 있음을 봅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절망과 걱정을 이야기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염려되는 상황 속에서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도 나왔습니다. 코로나 블루란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입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장기화되고 집에 갇혀 지내면서 사회적 고립감이 증대돼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요. 하지만 이 때 우리는 마냥 절망과 슬픔에만 사로 잡혀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외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구약 (사 6:1~8)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웃시야 왕은 다른 때도 아닌 민족이 위기에 처한 일촉즉발의 순간에 그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그의 죽음을 그 시절,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간 웃시야를 그리워하며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비극의 시대에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고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때, 이사야가 본 것이 본문 1절의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드높은 보좌위에 앉으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덮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환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주님 곁에서 섬기고 모시는 천사들의 찬양을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천사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 천사들이 무엇이라고 찬양했는지 3절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거룩하다”고 세 번이나 연달아 선포했습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할 때 쓰인 히브리어의 강조 법은 조금 독특합니다. 우리말은 어떤 무언가를 더욱 힘주어 말하고 싶으면 “정말”이나 “매우” 같은 강조 부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에는 그런 강조 부사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어떤 단어나 어구를 강조하고 싶을 때는 그것을 반복해서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다”고 세 번이나 찬양한 까닭은 그렇게 주님께서 진실로 거룩하신 분이심을 온 몸과 마음으로 힘써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 가사를 통해 1절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습이 알려주고자 하는 바를 다시금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만군을 지휘하시는 왕이시고 그분의 영광, 즉 통치 영역은 온 땅을 뒤덮는 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4절은 그러한 천사들의 찬양 소리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성전이 크게 흔들리고 그 안에 연기가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분의 임재가 더욱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환상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분명히 온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복음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록 인간의 강한 왕인 웃시야는 죽었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진정한 왕이신 주님의 통치는 영원함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보이신, 당신의 다스리심과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매우 의미심장한 방법을 택하십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분명 누군가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냄 받을 사람을 애타게 찾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 말씀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지목하여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이사야에게 강요하거나 몰아붙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자신을 따스하게 휘감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신비로운 체험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환상을 통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뜻을 분명히 깨닫고 알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 예언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이사야는 은혜받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워 나가셨습니다.


◈ 복음서 (요 8:12~20)

본문 요한복음 8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절망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복음입니다. 지금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코로나19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자기들과 손발이 맞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악을 싫어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아주 미워합니다. 잘못된 사람을 보면 마음 아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하지만, 희망은 아직 있습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중에 고난을 많이 겪는다 해도, 괴로워하지 마세요. 주님을 따르다가 고난당하는 것은 하늘의 상급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본문 요한복음 8장 1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신명기 19장 15절에 보면,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혼자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참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8:14)”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요 1:1). 예수님께서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있을 곳을 다 예비하시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시고, 어디로 가시는지 몰랐습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안이 어두웠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 서신서 (계 15:1~4)

본문 15:1절은 일곱 대접의 재앙예비 장면입니다. 그리고 환란을 이긴자들의 ‘모세의 노래’‘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땅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이 세상에 재앙을 붓기 시작하셨으니 이제 끝을 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준비 된 자들에게는 소망이고 이것을 기다림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는 절망이며 멸망인 것입니다.


2절은 모든 것을 이긴자들이 땅에 재앙이 쏟아지고 있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과 그 뒤를 추격하는 바로군대 그리고 홍해를 그려 볼 수 있는데 그 때에도 지켜주신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세력에서 건져 주실 것을 믿는 동시에 홍해를 건너서 부른 찬양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세력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환란에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는 애굽에서 건져 주심을 감사하는 찬양을 모세와 백성이 함께 부른 노래로 역사적인 의미를 주는 것과, 어린양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그의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을 의미합니다.


4절에서는 성도들의 찬양의 내용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이름은 ‘존재’와‘인격’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의와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예배와 찬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생각없이 혹은 입술만 습관적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 계시록에서는 찬양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 시대의 이사야를 애타게 찾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많은 힘과 지식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넓혀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혜받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온 마음으로 고백하는 그 작은 자를 통해 참되게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자원해서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기쁨으로 합니다. 억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은 예배 자리에 자원해서 나옵니다. 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쁨으로 예배드립니다. 봉사할 때에나 헌금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처럼 먼저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있을 때 모든 것을 자원하여 기쁨으로 순종 할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길 원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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