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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10-1) - “선택의 기로에서 당당하게 “ / 이병일 목사

admin 2023-11-03 (금) 00:33 1년전 696  
본문 ) 사 40:12-26, 막 12:13-17, 엡 1:15-23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 율법학자들,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논쟁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로 포섭하기 위해서 말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당시의 정치적 집권세력인 헤롯당원들을 보냅니다. 포섭하다(ἀγρεύω)는 “사냥해서 잡다, 손에 넣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사냥하듯이 붙잡으려는 시도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철저하게 유대교 율법을 지키는 것을 삶의 제일 큰 목적으로 삼고 있는 반면에, 헤롯당원들은 순수한 유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민족의 반역자이며 식민지 지배세력인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한 목적에는 야합을 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도 이러한 야합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당신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기 때문에, 당신은 참되고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법적이냐? 또는 아니냐? 우리가 바쳐야 하느냐, 또는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유대교 율법에 합법이냐 불법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이러한 합법과 불법 논쟁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법치를 좋아하고 강조하려면 그 법적용에 있어서 공평하게 적용해 달라는 것이 국민의 바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법률을 정권유지의 도구로 사용하였고, 법과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국가폭력을 자행하였습니다. 검사와 판사 중에는 아직도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이 물음은 토끼몰이 하듯이 사냥감을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헤롯당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두 가지 대답을 내놓고 택일하라고 요구합니다. “내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옳지 않습니까? 내야 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이들이 요구하는 대답은 단 두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대답을 선택해도 저들이 던진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당을 중심으로 로마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수치요, 굴욕적인 일이며 매국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도 열심당원들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가하다고 하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니 백성들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조세저항운동으로 날카로워진 통치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반로마세력으로 헤롯에게 잡혀가게 됩니다. 어떻게 대답을 하든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헤롯당원들에게 걸려들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난감한 선택의 상황에 처한다면 그 때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그들의 속임수(ὑπόκρισις; 연기, 위선, 기만, 가장, 외식)를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속임수의 전형을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법을 가장 잘 알고 법으로 돈벌이 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황제에게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에 새겨진 문양과 흉상이 누구의 것인지를 묻습니다. 데나리온은 1세기에 가장 많이 유통되던 은화였으며, 동방에서는 안디옥과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에서만 주조되었습니다. 이 화폐는 군대의 봉급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당시에 로마의 식민지 전역에서 통용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 황제가 티베리우스(로마 제2대 황제로 14-37년 재위)였는데, 아마도 그 데나리온에는 “TIBERIUS CAESAR DIVI AUGUSTI FILIUS AUGUSTUS”(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라는 글과 황제의 흉상이 있고, 그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글자와 신들의 보좌에 앉은 황태후 “리비아”의 모습이 있습니다. 통치자의 권위에 대한 증거는 그가 화폐를 유통시킬 수 있는 능력이었으며, 따라서 통치자의 힘은 그의 ‘화폐’가 말해주었습니다.
당시에 민중들이 내는 세금은 소득의 40-60%였는데, 그야말로 세금이 아니라 착취며 수탈입니다. 그 중에서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의 문제는 그 부담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정정치 이념에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세 가지 정기적인 세금이 있습니다. 토지세는 정부에 곡물의 10%와 자신이 생산한 기름과 포도주의 20%를 내야 했습니다. 소득세는 개인의 수입의 1%를 지불해야 합니다. 인두세는 14-65세에 해당하는 남자와 12-65세에 해당하는 여자가 내는 세금입니다. 인두세로서 한 데나리온입니다. 노동자 하루 임금정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 당시를 전후해서 이 조세 문제는 아주 민감한 사회-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에 바치는 조세문제는 유다 지배층과 민중 사이를 대립시키는 주요인이 되었습니다. 유대 민중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그들의 신정정치 이념의 빛에서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의 조세 정책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봉기를 일으켜 항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사제 요아자르를 위시한 유대 지배자들은 로마의 조세 정책에 응하였고 민중들에게는 그 정책에 순응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조세저항 운동 중에 하나는 C.E. 6년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시작한 제4의 철학운동인데,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라는 갈릴리 사람은 자기 동족에게 저항할 것을 강조하면서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거나 하느님 한 분 이외의 유일한 지배자들에게 굴복하는 사람들을 단호히 꾸짖었다. ...... 유다라는 갈릴리 사람은 아주 박식한 사람이었는데 키리니우스 황제 시대에 로마의 세력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그는 하느님만이 주님이라고 주장하였다. ...... 유다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조세를 위한 키리니우스의 호구 조사에 응하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또 다른 하나의 사건은 C.E. 66년 여름에 이 조세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무력적 혁명운동이었으며, 이는 C.E. 70년까지 유다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조세저항으로 시작된 유대전쟁의 결과로 로마의 티투스와 베시파시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사람들의 근본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되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되돌려 주어라.” 성서를 해석자의 입장이나 성향, 처지나 관점에 따라서 각기 자르게 해석하는 것을 풍자한 말이 있습니다. “귀 귀, 코 코”(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말에 대한 해석이 그렇습니다.
정교분리(?) : 지금까지 이 말씀은 주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은 이 말씀에 힘입어서 종교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가이사의 영역과 하느님의 영역을 구별하고,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되고 서로 간섭해서는 안 되는, 서로 영역을 존중해주어야 하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물질적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구별해서 물질적 영역은 국가의 영역이고 영적인 영역은 교회의 영역이라는 식의 구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독재 권력과 기득권 세력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거나 그들을 위해 복을 비는 일을 한 사람들에 의해서 강조되었습니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언사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해석은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가 자기들의 이익에 호의적일 때에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정부의 편을 들다가, 정부의 정책이 자기들의 이익을 침해하고 권위를 침범한다고 생각되면 반정부적 반란의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행동 어느 것도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권력인정(?) : 이 말은 “황제에게는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하느님께는 창조주로서의 의무를 다하라!”는 말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식민지 백성들이 로마 황제에게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을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황제(통치자)에 대한 의무를 준수하되, 하느님께는 신적인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에게 통치자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세금을 내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라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수많은 나라를 점령하는 권한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느님의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가이사는 하느님이 세우신 자이며, 가이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므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 또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교회 일, 하나님의 일, 영적인 일에는 발 벗고 나서지만, 세상 일, 사회 일, 가이사의 일에는 냉담하고 무심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 전력한다고 하면서, 당장 발을 딛고 서있는 이 땅의 일, 가이사의 일에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의한 권력의 출처를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현자예수(?) : 또한 이 말씀은 사면초가와 같은 궁지에 몰린 예수님이 그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지혜로운 말씀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 마디 말로써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의 음모를 따돌리고 궁지에서 빠져나온 훌륭한 재담가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기독론적으로 전개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음모나 지혜보다도 훨씬 뛰어난 지혜를 가진 분이고,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지혜로운 랍비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열정과 의지, 그리고 몸의 움직임의 문제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무엇을 지향하며 움직였느냐가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가이사의 것들은 가이사에게 되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들은 하느님에게 되돌려 주어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이 대답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의 물음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치다”[δίδωμι]와 “되돌려 주다”[ἀποδίδωμι]입니다. 그들은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되돌려주라”는 말로 응수합니다. 두 단어는 접두어 하나 차이인데, 그 의미는 본문 전체를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만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바치다”라는 단어를 빚진 사람이 그 빚을 상환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되돌려주다”라는 단어로 바꾼 것입니다. 즉 로마 황제가 그 땅과 백성, 그리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산물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로마 제국의 이념에 따르는 한, 황제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것을 요구하는 때 되돌려 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로마 황제의 지배권을 인정한 너희들은, 이미 제국의 종이 되어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을 착취하는 너희들은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되돌려 주라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복수형 정관사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한 개의 주화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물건을 모두 포함하여 종속된 전부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역대상 29:11,17; 로마 2:14). 가이사에게 속했다고 인정되는 모든 것은 그의 권한을 받아들이는 한 그에게 되돌려질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가이사의 것들이 가이사에게 되돌려지는 것은 그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이사와 하느님의 서로 대치될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의 대립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특정한 조세 문제를 떠나서 보다 광범한 주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며, 모든 주권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을 뿐이라는 신앙(출 20:31)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정황은 결코 예수님의 답변을 비정치적 변증으로 해석하는 제국주의적 발상이나 합리화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물음의 근원을 캐고 들어가는 혁명적 자세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위기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문자들의 삶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돌아설 것을 강하게 요구함과 동시에, 하느님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와 하느님의 대립을 통하여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거나 그 둘 사이의 변증적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느 하나로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로마 황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추구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 이외의 여하한 주권이나 그에 대한 충성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무력적 혁명 이념을 고무 찬양하거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로마 제국의 착취적 정책과 타협하여 권력과 특권을 누리고 있던 지배층의 안보이념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이든 유대 지배세력이든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면 하느님의 통치와 병치시키지 않고,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선택의 소용돌이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리를 유혹하는 열풍 속으로 점점 이끌려 갈 때,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깨달았을 때, 그 사건이나 현상의 본질을 바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탈출하는 첫걸음입니다. 그 순간이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임기응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꿰뚫어 보고 행동하는 것은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그 현실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근거에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녹아 있습니다. 그 정체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주체성에서 확실해 지고, 당당함으로 드러납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야훼 하느님의 역사(창조)는 사람이 만든 우상이나 땅의 지배자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우상이란 대장장이가 부어 만들고, 도금장이가 금으로 입히고, 은사슬을 만들어 걸친 것이다. 금이나 은을 구할 형편이 못되는 사람은 썩지 않는 나무를 골라서 구하여 놓고, 넘어지지 않을 우상을 만들려고 숙련된 기술자를 찾는다.”(사 40:19-20) 시편 기자는 하느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느님은 높은 곳에 계시지만 스스로 낮추셔서,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시고,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백성의 귀한 이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조차도 한 집에서 떳떳하게 살게 하시며, 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시편 113:5-9)
그 하느님은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으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공동체 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이 교회이기에 우리 그 속에서 우리의 주체성을 발견하며 자랄 수 있고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에베소서 1:17-18) 또한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에베소서 1:22-23)

“당당하십시오!” “당당하게 삽시다!” 성서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돌아보아 자기를 알고 사람들을 이해하고 모든 생명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당당함의 근거가 되기를 바라면서 살려고 기 때문입니다. 그 당당함의 근원이 돈과 권력에 있지 않고, 독선과 오만에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닮으려는 마음과 몸의 움직임에 있을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주체적인 신앙으로 당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상과 땅의 권력자들이 우리를 유혹하거나 협박할지라도 모든 주권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을 뿐이라는 신앙(출애 20:31)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에, 예수님은 하느님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추구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 이외의 여하한 주권이나 그에 대한 충성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무력적 혁명 이념을 고무 찬양하거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로마 제국의 착취적 정책과 타협하여 권력과 특권을 누리고 있던 지배층의 안보이념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이든 유대 지배세력이든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면 하느님의 통치와 병치시키지 않고,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많은 일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상황들, 우리가 간절히 원하지만 많은 장애로 인하여 접근하기도 힘들 사건들, 그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도 본질만 바로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당당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들이 사회-정치적인 것이든, 교회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개인이나 가정적인 것이든, 그 어떤 일일지라도 삿되고 허망한 소용돌이는 과감히 뿌리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다양한 한계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 이래저래 선택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안타까울 때, 어떠한 선택을 하든지 치명적인 곤경으로 자신을 몰아넣을 때,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을 때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관계에 매달리게 되거나, 나의 욕망이 눈을 가리거나, 더 나아가 손익을 담보하거나 생사를 좌우하는 일에서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근본적인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몸과 마음의 담대함과 원칙을,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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