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55:1-5, 요일 1:1-7, 눅 10:38-11:4
샬롬! 한가위 명절을 가족들과 함께 잘 보내셨는지요?
비록 한 가족이지만 직장이나 학업 등의 이유로 함께 하는 시간보다 헤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절이 되면 함께 만나고 그 동안 나누지 못한 서로의 삶을 나누게 됩니다. 그로 인해 감사의 간증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게 됨을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이쁘다 이쁘다 하니...”라는 제목으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야기해주세요. “이쁘다 이쁘다 하니...” “이렇게나 이뻐지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말은 씨앗이 되어 성장하고 자라서 열매 맺습니다. 축복의 씨앗이 힘과 격려가 되어 많은 열매로 맺어질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축복의 씨앗으로 심어두셨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학교에, 직장에 삶의 현장에서 축복의 씨앗으로 살아갈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 축복의 시작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통해 우리와도 함께하십니다. 이번 세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삶의 원동력을 얻는 시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구약의 말씀 / 사 55:1-5
본문 구약의 말씀에서는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길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이 있는가 하면 사망의 길도 있고, 복이나 저주의 길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목마른 자들을 초청하시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청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인종이나 피부 색깔, 언어와 관습,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초월하여 의를 위해 줄이고 목마른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부르십니다. 그분의 초청해서 제외된 민족이나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가 선교의 대상을 선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로 나와야 영혼이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와 귀를 기울여 들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생명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며, 생명의 떡 또한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참된 만족이나 기쁨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영원한 언약과 확실한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언약은 영원하고, 주의 은혜는 확실합니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는 자와 주를 의뢰하는 자들은 실족하게 되는 법이 없으며, 그 나라에서 소외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언약만이 영원한 언약이요, 주의 은혜만이 확실한 은혜입니다. 다른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길뿐이므로 그 길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즉 복음을 믿는 길입니다.
◈ 서신서의 말씀 / 요일 1:1-7
말씀과 생명은 예수님을 표현하는 핵심 단어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1.태초부터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조 시에 피조된 것이 아니라 영혼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함께 창조의 사역을 담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 때문에 그분이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이유로 의심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혼 전부터 계셨다고 성경은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2.요한에게 경험되어졌습니다.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신 말씀은 인간에게 경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역사 속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성육신하신 말씀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경험은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히 들었습니다. 또한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았습니다.
3.그리스도는 우리가 증거해야 할 말씀이십니다.
말씀 안에 참 생명이 있음을 확실히 경험한 요한은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증거하고 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사귐을 가지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심으로써 아버지와 사귐을 가졌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을 바로 알고 사귀며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거짓된 신자들의 타성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 된 속성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줘야 하며 어두운 죄의 모습이 보여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 복음서의 말씀 / 눅 10:38-11:4
누가복음 10장의 본문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들어가실 때에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의 청으로 그녀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마르다는 열심히 예수님을 영접하며 분주할 때에 그녀의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그런 마리아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예수님께 간청하여 마리아가 자신을 돕기를 원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요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적인 지혜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라리라”(41-42) 예수님의 대답은 효율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봉사에 효율성은 적고, 말씀에 효율성은 많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응하신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이전에 기록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율법 교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까?” 나는 질문에 답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 면에서 마르다는 율법 교사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와 비교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녀의 상태를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녀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고 오히려 대접할 대상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이 보기에 딴짓을 하고 있는 마리아를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 마리아의 것을 빼앗을 수 없다”는 대답을 하십니다. 우리가 쉽게 오해하고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경청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르다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보면서 우리에게 모범적인 기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먼저 “아버지여!”라는 서두를 통해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영광의 기도를 드립니다. 또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하나님을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합니다. 이처럼 기도의 첫 요소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입니다. 육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두 가지를 위해 기도드려야 합니다. 즉 날마다의 양식과 날마다의 범죄에 대한 사죄의 기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일용할 양식”과 매일매일 받아야만 될” 용서함”입니다. 이것들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바로 기도해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진리의 삶입니다. 진리의 삶은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날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바른 길로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사악한 자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올모에 걸어 넘어뜨릴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이와같이 주기도문은 우리들에게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 마치면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합니다. 말씀은 곧 진리이고 성도의 삶에 능력이 됩니다. 말씀으로 이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길 원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새힘을 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쁘다 이쁘다 하니...” “이렇게나 이뻐지는구나!!”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더블어 악한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