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 37:14~24, 롬 9:14~26, 마 14:22~33
먼저 복음서의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은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먼저 강 건너로 가라는 예수의 말씀에 그들끼리 강을 건너고자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그들의 여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 때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어둠 가운데 물 위에 선 사람의 형체를 발견한 제자들은 유령으로 착각했습니다. 제자들의 착각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로, 어둠이 가장 짙은 시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강물 위를 누군가 걸어오니 유령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짙은 어둠으로 인해 형체를 구별하고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주신 말씀이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제자들을 진정시키는 말씀이었죠. 그러자 베드로는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다 나섰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허락하니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이내 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심으로 베드로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주목할 것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예수님의 구원이 혼재하는 바로 이 순간. 오늘 성경은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를 “바람”을 보았기 때문임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던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그들을 괴롭혔던 바람의 존재를 다시 의식하기 시작하니 결국 물 속으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을 바라 볼 때는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기고, 걷고 싶다는 바램이 생겼지만, 정작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예수님을 보던 시선이 주변으로, 바람으로 옮겨 갔고, 결국 물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이런 행동을 두고 예수님은 “의심”으로 선언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을 보았을 때는 믿음이 있었는데,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되니 의심이 꿈틀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의 본질은 바람이었습니다. 이 바람은 강을 건너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과 만나기 직전까지 제자들의 길을 괴롭게 하던 원인이었습니다. 강물을 요통치게 하고, 평안을 깨뜨린 주범이 바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바람이 예수님과의 만남 가운데도 그 힘을 발휘하여 베드로를 물 속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누구에게 요청했습니까? 바다입니까? 바람입니까?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주여 나로 오라 하소서’ 간구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베드로도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면 물 위를 걷는 놀라운 역사를 베드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물 위를 걸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베드로의 시선이 움직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였던 베드로가 그 시선을 주변으로, 바람으로 돌리니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빠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의심이 되어, 결국 베드로를 물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믿음이 서야 할 자리에 걱정이 자리 잡고, 의심이 자리 잡으니 결국 불신앙의 결과를 만들었고, 베드로의 도전도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욥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욥과 욥의 친구들이 논쟁하는 중에 엘리후가 등장하여 중재하는 대목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부당성에 대해 주장했고, 욥의 친구들은 욥이 지은 죄의 결과로 그의 고난이 발생했음을 주장했습니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엘리후가 그들의 논쟁이 뛰어들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주장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자제하라 촉구하는 내용이 바로 오늘 구약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 엘리후의 주장은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이 가늠할 수 없다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어찌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결코 창조주의 뜻을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늘 엘리후는 태양 빛에 비유하여 인간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태양 빛이 너무 강해 태양의 윤곽조차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그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헤아리고 가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모두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욥에게 찾아온 시련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엘리후는 지적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불신을 거둬 들이고 겸손히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욥의 주장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욥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나 항변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 된 우리들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서신서의 가르침에도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오늘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을 토기장이와 토기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계획과 뜻에 맞게 그릇을 만들어 사용하듯 하나님도 인간을 자신의 계획과 뜻에 맞춰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진흙을 갖고 토기장이 어떤 것은 존귀한 그릇으로, 어떤 것은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 듯, 하나님도 그 뜻에 따라 목적에 따라 같은 사람도 달리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본질상 같은 존재이며, 다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이라고 특별하지 않고, 이방인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이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섭리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계보에는 이방인 여인이 등장하기도 하고, 장자가 아닌 이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사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에 따라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면 그 쓰임받는 존재가 의인이든, 죄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문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우리들의 본질을 그릇에 비유하며, 그릇된 우리는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충성하고 헌신할 책임만이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쓰임새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지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하나님을 맞추고, 예수님을 끼우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이며, 한 걸음 한 걸음 그리스도의 진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바람과 풍랑을 이겨낼 때 비로소 놀라운 믿음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서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고, 행복한 가정의 단란함과 풍요를 잃은 상실감에 사로잡혀, 그 행복과 풍요를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욥의 부족함과 좁은 소견을 오늘 구약의 말씀은 증거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서신서는 잘못된 자기 중심적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진정한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뜻을 받드는 데 있음을 비유를 통해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덕목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내적인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요, 빨리빨리 서두르며 재촉하는 모습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의 반석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차분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견딜 수 없는 고난도 이겨내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거룩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위기”라는 단어가 넘치는 시절입니다. “위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조건과 상황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현실이지만, “위기”라는 그 단어에 매몰돼서도 안 되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기”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좋아도 싫어도 결국 하나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름 받은 우리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요, 우리가 할 일은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 꿇고, 조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심은 우리에게 복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계획 아래 우리를 위기에 몰아 넣으시기도 하고, 우리를 건지시기도 하며, 우리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조급함으로 “위기”를 자초할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위기”를 살아내고, 그 “위기”의 다음, 하나님이 사용하실 그릇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작금의 위기는 변하여 기회가 되고, 준비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예견하고, 판단하는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믿고, 인내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묵묵히 주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 뜻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며 즐겨 쓰시는 질그릇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는 거룩한 질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자랑과 기쁨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