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17:6~23, 롬 2:1~11, 막 12:1~12 -
목사라서 의무감으로라도 책을 읽어야 합니다. 화제작, 문제작이라고 소개되는 신간(新刊)들을 읽으면 십중팔구는 화제작, 문제작답게 전체적인 분위기가 음울(陰鬱)한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라서 의무감으로라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세간(世間)의 신간(新刊)들과는 달리 성경은 해피엔딩이라 참 좋습니다. 성경의 처음 이야기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히 보시기에 좋게 만드신 이야기이며, 성경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로이 지으시고 행복한 잔치를 베푸시는 이야기이니 저는 성경이 참 좋습니다. 오늘은 창조절기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온 세상을 참 좋게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장차 이보다 더 좋은 새 하늘 새 땅을 새로이 지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오늘, 창조절기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가 살핀 세 본문은 그리 유쾌하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를 기록한 역사가의 보도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바울의 편지글과 포도원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악한 농부들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이야기이니 세 본문의 성경을 읽고 어찌 맘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의미가 있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로이 지으시기 전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이 반드시 있음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이 땅에 처음 오셨던 초림의 주님은 십자가에서 온 세상의 죄를 친히 감당하셨던 용서와 사랑의 구세주였지만, 이제 곧 오실 재림의 주님은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절의 마지막 주일 그리고 대림절의 시작을 바라보는 오늘 새 창조의 역사 바로 앞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2장 1~11절을 읽었습니다. 본문의 바로 앞에는 소위 악덕조항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롬 1:29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30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악덕조항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로운 척하며 남을 판단(κρίνω크리노)하면 그들에게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κρίμα크리마)이 임할 것을 경고합니다. “롬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개역개정 성경은 친절하게도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판단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심판을 구별하여 판단과 심판이라는 말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실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위선적인 그들에게 다만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곧,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고 용납하시며 끝내 그들이 회개할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본문은 우리 모두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유예(劉豫)기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7장 6~23절의 긴 본문의 말씀은 우리를 서글프게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던 백성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장면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왕하 17: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그리고 이 안타까운 비극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율례를 어기고 이방의 규례를 좇았기 때문임을 이어지는 긴 본문을 통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마디마다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전하셨지만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음을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다시 한 번 선언하고 있습니다. “왕하 17:23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이스라엘이 망하고, 또 후에 유대가 망하는 성경의 기록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뜨끔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스라엘과 유대도 마침내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그들의 죄를 준엄히 책망하시고 그들을 버리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니 나도 버림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일을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해석합니다. “롬 11:2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2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새번역성경) 그리고 확신합니다. “롬 11:1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새번역성경)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목이 곧고 패역한 이스라엘도 차마 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정작 버리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을 척결하시고 성전의 권위자인 척하며 위선과 교만의 죄를 쌓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가 마가복음 12장 1~12절의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자기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에게 세(稅)로 소출을 얼마 취하려고 종을 보낼 때마다 그 종을 박해하는 농부들의 소식을 듣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바보처럼 그 악한 농부들을 길이 참으며 용납하고 또 다른 종을 보냅니다. 종을 보내는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마침내는 아들을 보냅니다. 아들은 어쩌지 못하겠지 생각하지만, 한편 아들도 탈이 나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 아비인 포도원 주인에게 왜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포도원 주인은 아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실은 아들을 버린 셈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악한 종들은 상속자인 아들마저 죽이고 그 유산을 차지하려 들었습니다. 이제 그 악한 종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어찌하겠습니까? 이 비유이야기에서 악한 종들을 진멸한 후에 포도원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고 했으니, 이 이야기대로라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아들까지 내어 주신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를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분명 하나님은 온 인류를 향하여 지금도 그 인자하심으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죄인들을 용납하시며 회개하기를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내 크고 두려운 날이 찾아올 터인데 우리는 이 유예기간동안 어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마침내 찾아올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서 고집으로 진노를 쌓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므로 영생의 보상을 얻을 것을 권면합니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참으며, 하나님이 인자하신 것처럼 우리도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의 시작에서 새 하늘 새 땅을 다시 지으시고 택한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은 말 뜻 그대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니 새로운 사람만 들어가야 마땅하겠습니다. 어려서 불렀던 주일학교 노래처럼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가 맞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 새 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나봅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그러므로 이 땅의 유예(猶豫)기간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현저한 육체의 일을 버리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선한 영의 열매를 맺으며(갈 5:19~23),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롬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 새 땅 주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유예기간 동안에 믿음으로 승리하셔서 새 하늘 새 땅의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상속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