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26:4-15, 약 2:14-26, 마 25:31-46
주님, 주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왔습니다.(신명기 26장 10절)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장 40절)
요즘 밖에 나가보면 온통 울긋불긋 단풍 세상입니다. 한적한 은행나무 길을 달려가다 보면, 햇빛에 노랗게 빛나는 낙엽이 바람에 눈발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추수를 마친 논밭은 텅 비어서 조금은 쓸쓸해 보이고, 벌거벗은 감나무 높은 가지에는 노란 연시가 주렁주렁 꽃처럼 만개했지요. 그렇게 올 한 해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올 한 해 동안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돌아보면 올해는 참 어려운 일이 많았지요.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웠고, 우리네 살림살이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되짚어보면, 그 많은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여 주셨고,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은 마땅하고 또 마땅한 일이지요. 일찍이 예언자들도 사도들도 우리에게 항상 감사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까요? 뭐 누구처럼 샤넬 백이라도, 무슨 반클리프 목걸이라도 바쳐야, 그래야 예의에 맞는 걸까요?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지, 그 문제를 좀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신명기에서, 첫 곡식을 거두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본문 앞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라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어 거둔 첫 열매를 하나님의 성소로 가져가서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맨 먼저 거둔 열매, 추수한 곡식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첫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첫 열매를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으로 우리의 감사는 끝나는 걸까요? 하나님께 드렸으니, 우리는 할 바를 다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4절부터는, 그렇게 첫 열매를 바친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첫 열매를 드린 다음에, 5절부터 10절까지는, 이른바 이스라엘의 ‘역사신조’,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를 기억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무엇 때문에 감사드리는지, 무엇 때문에 첫 열매를 드리는지, 그 이유, 그 까닭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무조건 하라니까 한다면, 그게 무슨 진정한 감사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해방하여 주셨고,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지켜주셨기에, 그랬기에 존재하고, 그러기에 일하고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감사’의 기본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것을 역사신앙으로 고백하는 것, 그것이 신명기가 가르쳐주는 ‘감사’였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추수한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고,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드렸으면, 그것으로 진정한 ‘감사’는 완성되는 걸까요? 이 정도면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아니지요. 이제 신명기는 진정한 감사의 완성, 그 마지막을 이야기해 줍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가져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그러고 나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레위 사람과 당신들 가운데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그 좋은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그 은총의 선물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라는 것입니다. 땅이 없는 레위 사람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생계 기반인 땅이 없는 이방인들과 함께 말입니다. 12절에서는 3년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면 아예 모든 소출에서 십일조를 떼어서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라고, 그래서 그들이 성안에서 맘껏 먹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는 그것을, 그저 해도 좋고 안 해도 상관없는 ‘자선’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신앙’의 과제로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그저 맘대로 퍼주는 ‘선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하여 떼는 십일조의 거룩한 ‘의무’가 됩니다. 그것은 그저 내 뜻대로 행하는 ‘후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신앙고백’(13-15절)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실행하고 나서도 ‘아, 내가 생각해도 흐뭇하다’ 하고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였습니다’ 하고 아뢰라는 것입니다. 내가 자선을 베풀었다고 도리도리칠 일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였을 뿐이라고 고백하며,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무릎 꿇는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애초에 은총에서 시작된 것은 은총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을 나누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示威가 아니라, 다만, 오직,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信仰일 뿐입니다. 이 순종하는 신앙의 실천에서 진정한 감사는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비유지요? 그 날에 人子가 오셔서 세상 모든 민족을,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심판 날에 인자는 사람들을 양과 염소를 가르듯 갈라서, 양은 그 오른쪽에 염소는 그 왼쪽에 세웁니다. 오른쪽, 곧 양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이고, 왼쪽 사람들은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갈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양과 같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누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당연히, 마땅히 하나님께 잘한 사람들이겠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자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35-36절) 그리고 주님은 또한 왼쪽 염소와 같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입을 것도 주지 않았고, 나를 영접하지도 돌보아 주지도 찾아 주지도 않았다고,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적시합니다. 인자이신 주님께, 곧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 그것이 심판의 명확한 기준입니다. 누가 이 심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합니다. 주님의 심판에 대해 오른쪽 사람들이나 왼쪽 사람들이나 흔쾌하게 승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했느냐’고, 뭔가 잘못된 심판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염소 쪽 사람들이야 심판을 피하거나 형량을 줄이려고 무슨 말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말이 그들의 전문용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양의 무리에 선 사람들까지 모른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의아해하는 걸까요? 이게 무슨 상황일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정에서 벌어진 진풍경입니다. 양의 무리에 선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들은 주님에게 무얼 해드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염소의 무리에 선 사람들도 자기들이 주님에게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도리질을 치지요. 왜냐하면, 실제로 그들은 주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거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요? 무슨 CCTV라도 돌려봐야 할까요?
바로 그때 주님께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진실, 아주 정말 중요한 진실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45절)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은 주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 곁에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뭔가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한 것,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준 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주지 않은 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은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 마지막 심판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와 게헨나를 가르는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제사는 은총으로 거둔 열매를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감사는 나눔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었지요. 마태복음에서 최후의 심판 비유는,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나눈 것, 그것이 곧 주님께 드린 것이라는 진실을 밝혀주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과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으로, 나눔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실천이 없는 믿음이란 죽은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죽음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집니다.(야고보 2장 22절)
진정한 예배란 무엇일까요? 초대 교회에서 예배의 핵심, 그 알짬은 ‘유카리스트’였지요. 이 ‘유카리스트’가 무엇입니까?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떡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나가 전에 함께 누룩 없는 빵을 떼었듯이, 빈 들에서 함께 오병이어를 나누었듯이,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것, 그것이 우리의 예배의 원형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누는 ‘유카리스트’에는 유대인도 그리스인/이방인도 없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없고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밥상에서는 세리와 죄인들도 고아와 과부도 이방인과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함께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 안에서 모두 함께 나누는 밥상, 그것이 우리의 예배의 본향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 이 ‘유카리스트’는 점차 교회의 ‘성찬 예전’으로 변해 갔지요. 그런데 이 ‘유카리스트’는 ‘유카리스테오’(ευχαριστεω)라는 그리스 말에서 나왔습니다. 유카리스테오, 무슨 말입니까? 감사한다, 감사드린다, 그 말입니다. 감사드리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그 말 아닙니까? 나의 먹거리를 이웃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유카리스트’요 감사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오늘 우리가 받은 마지막 심판 비유에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신비’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여기 있는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내 형제자매”라 하셨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한 사람, 그 추레하고 별 볼 일 없는 한 사람, 그는 바로 “예수의 형제자매”였습니다. 예수의 형제자매는 저 바다 건너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한 것은 곧 주님의 형제자매에게, 아니, 바로 주님께 한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까?
여러분, 사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가슴을 치고 또 치며 자복하고 고백했던 대로, 우리야말로 정말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온 세상과 우주의 찌꺼기요, 참담하고 비참한 人間이 아닙니까? 이렇게 지극히 보잘것없는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자매요 친구라 불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마땅히, 우리 가운에 있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은 예수의 형제자매요, 곧 우리의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그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온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우리의 감사예배를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열매를 우리 곁에 있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과, 아니, ‘주님의 형제자매’와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의 친구로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사하며, 함께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