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수 24:14-28, 시 98, 요 15:18-27
이웃 종교죠. 한국불교의 새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휴암이라는 한 스님이 글입니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들의 스승은 진리를 찾겠다고 왕자의 자리와 왕궁을 버리고, 고난을 감수하며 수난의 길을 걷고, 수도 정진의 길을 걸어 진리를 발견했는데, 도대체 너희는 그 스승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앞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너희는 그가 버린 것을 그 스승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하고 있구나.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내 조국 대한민국에 불교인들의 수가 1,300만이라고 하는데, 1,300만 명이 130명으로 줄어든다 할지라도, 불교를 좀 먹고 있는 이 기복주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대한민국에 과연 불교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이 글에 기독교를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 너희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 아무리 봐도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머릴 깎았다’고 다 중이 아닌 것처럼 ‘교회 다닌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죠.
이번 주일의 세 본문은 우리 바로 이점을 겨냥합니다, 먼저 구약 본문 여호수아서는 어느 때 어떤 순간에도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겠다는 맹세의 서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서약과 판결 (수 24:14-28)
히브리 민족의 대이동. 이른바 출애굽의 후예들이 세운 이스라엘, 그 민족과 국가의 기원을 다룬 모세오경에 이은 여호수아서의 이 마지막 장은 ‘대국민 선언’과도 같은 장엄한 선포식을 생생하게 담고있습니다.
노예로 살던 이 약소 민족은, 하나님의 구원에 따라, 해방의 긴 여정을 마치고, 이제 약속하신 그 땅 진입로 앞에 섰습니다. 무려 40여년을 거칠고 황량한 벌판, 끝없는 광야를 걷고 걸어서, 갖은 난관과 수차례의 전투를 치뤘던, 눈물젖은 한 많은 세월을 끝내는 바로 그 시점입니다.
그들은 펼쳐진 가나안을 바라보며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습니다. 지난 역경의 순간 순간들이 떠올랐고, 흙먼지 휘날리는 그 척박한 땅에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쏟는 사람들, 감격에 겨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이들의 떨리는 기도소리와 우렁찬 찬양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습니다.
그때에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 그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언약의 맹세를 다짐하는 선언식을 거행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1절). 여호수아는 열두지파의 모든 사람들과 장로들을 비롯해 대표자들을 모이게 하고는, 하나님과의 서약식을 시작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행한 것을 보았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을 보았노라.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신실함으로 주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서약하라”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 예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14-16절이 핵심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라”
그런데 본문을 좀 더 지세히 살피면,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무려 14번 등장하는 낱말인데요 무엇일까요? ...네 ‘섬기다’입니다. 영어 번역으론 ‘serve’입니다. 전통적인 KJV, 보다 대중적인 NIV, 그리고 NASB 모두 이 ‘serv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serve’라는 말에는 ‘섬기다’ ‘봉사하다’ 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임무를 다하다. 근무하다. 음식물을 제공하다. 식사 시중을 들다.’ 그리고 ‘어떤 임무에 복무하다. 심지어 복역하다’라는 뜻이 있죠. 그런데 낱말의 어원을 알게 되면 그 말이 처음 사용할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아바드’입니다. ‘일하다, 섬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셈어의 어근 개념) '예배하다' '순종하다' 그리고 '노예로 삼다'와 같이 강조형 어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섬긴다는 것은, 총체적이고 전적인 복종을 가리킵니다. 마치 종이나 군인처럼 말이죠, 복무하듯이 복역하듯이 충성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향해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죠.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화답했습니다.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않으리다> - 저와 여러분도 ‘아멘’인줄로 믿습니다.
저들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너무도 확실했습니다. 그러니 굳은 맹세를 하고 서약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이죠. 그러면 (17-18절)을 우리 같이 읽으실까요?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어떤가요? 이 다짐이 어쩌 좀 불안해 보이지는 않은가요? 저는 좀 아슬아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가 걸립니다. 어째 좀 허술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셨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께 ‘serve’하겠노라, 섬기겠노라 하기 때문입니다. - 여호수아도 이 점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경고하죠. 바로 (20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 너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잘 생각하고 기억하여 돌이키라는 대국민 선언입니다.
2. 찬송의 이유 (시 98)
이제 시간이 흘러 국가로 성장한 이스라엘은,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송하는 것을 예식화했는데, 그날의 맹세와 서약을 대대로 찬송했습니다. 아마도 시편 98편은 두 파트로 나눠서, 돌림노래 형태로 찬양했을 겁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1-4절).
그러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그런데요 이 찬양에도 ‘구원과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굳센 결단과 더불어 하나님의 경고가 그것입니다. <보고 듣고 목격하고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죠 - 이것만은 꼭 짚고 가기를 권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여호와 앞에 항복의 백기를 들고,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이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 백성의 품격 (요 15:18-27)
예수님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전인격적인 복종’입니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시대, 이때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여호수아때에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찬 가나안 입성 직전의 축제의 장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의 때에는 같은 동족의 미움과 핍박이 시작되는, 곧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게 될, 죽음의 사선을 넘어야 할 소수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복음서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8절). 위로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때가 이르렀음을 예고하십니다. 이미 주님은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다. (19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당시의 세상을 보다 성경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세계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보고 듣고 경험‘했어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공격했으며, 살해했으며,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까지 처단하려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죽음의 공포에서 건지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 맹세는 사라지고, 돌변하여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위협합니다. -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거부하고 처단하는 겁니다.
저들을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절). 한탄하시는 주님, 너희는 나를 보고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구나. 탄식하시는 주님, 그 예수께서 바라보시는 저들에게서 혹시 내 모습이 보이지는 않은가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24절).
심판의 예고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회개를 촉구하는 반어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인줄로 믿습니다. 어느때 어떤 순간에도 그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저는 자꾸 이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들으라 그리스도인들이여! 오늘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와 생명을 건 선언을 하자. 큰소리로 답하라,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
여러분, 어두움에 길들여져서 익숙해지면 빛이 불편해집니다. 맞는 말인데 듣기 싫어지는 거죠. 어떻게 하는 게 더 나은 행동인줄은 아는데, 성경의 방식이 뭔지는 아는데. 근데 하기는 싫은 겁니다 이런 분들 계시죠? 옆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까지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통계가 말해줍니다. 종교심리학의 한 통계에 따르면,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의 약 80%가 그렇다고 응답했습니다.
교회을 다니는 분이라면 성경에서 우리를 향해 어떤 인간이 되라고 하는지 누구나 다 압니다. 신앙생활 몇년만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살라고 하는지 다 알지요. 근데 왠지 하기 싫은 겁니다. 어두움에 익숙해지면 빛이 불편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빛에 익숙해 지기를 바랍니다. 어둠이 불편해 질 것입니다. 오히려 적당히가 싫어지고, 무슨 무슨 척하는게 싫어집니다. 왜요? 빛의 사람이기 때문이죠. 예수님 앞에 나오면 말씀앞에 서면. 말씀과 찬송이 내 속에서 요동치면 칠수록, 우리는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빛에 거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바라고 소망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