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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2-1) - "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 / 교회연합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2-09-07 (수) 13:25 2년전 902  

본문) 창 11:1~9; 고후 4:1~6; 막 13:14~27)


가인의 농사와 도성(에녹성), 함의 자손 니므롯의 도성(바빌론; 신의 문)을 비판하여 바벨(뒤섞다, 혼동)로 만들어 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그 도성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끝임 없이 위협하는 근거지였고, 그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도성의 문화인 지배구조는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도 왕을 세워달라고 애원하게 되고, 그렇게 세워진 다윗왕의 도성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에서 도성을 세우고 탑을 쌓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자, 도성을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11:4) 그 목적은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 도성에서 일어난 일들은 무엇입니까? 도성을 세우고 탑을 쌓는 사람들은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도성을 세우게 한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흩어지지 못하게 복속시켰습니다. 결국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은 권력과 부를 쥐고 있는 지배자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은 도성을 세우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도성은 지역 중심지로서 권력과 부의 집중 및 축적을 신속히 추진할 수 있는 정치 제도적 발판을 마련해 주며, 탑인 성전은 피지배자들을 종교적 세계관으로 통제함으로써 부와 권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런 사회적 구조와 과정 속에서 피지배 계층의 억압과 착취는 계속되며, 지배자들이 의도하는 일을 아무도 저지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 야훼의 판단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들은 지배자들이 계획하는 도성과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질타했습니다. 지배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하지만, 백성들은 생명과 생계를 유지하고, 착취와 억압이 없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바랍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배자들은 도성(다윗성)을 세워서 중앙집권을 꾀하고, 성전(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여 야훼 하느님마저 그 속에 가두는 종교의 독점화를 도모하였습니다. 그 결과 언어의 바벨로 인하여 사람들이 흩어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온 땅에 흩어질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훗날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조의 몰락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소위 바벨탑 이야기 혹은 바벨도성 이야기의 중심은 도성이나 탑 자체보다는 인간에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명예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긍정적이며 자기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노력하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전혀 개의치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한계를 초월하여 이름을 떨치려는 오만입니다. 또한 도성과 탑의 건설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여 흩어지지 못하게 하는 권력과 부의 독점입니다. 

하나님의 방해로 미완성인 바벨탑을 기어이 완성하고 싶어선지 요즘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마천루를, 높은 건물들을 쌓고, 자기들만의 도성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교만과 자연을 거스르는 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은 또 다른 바벨 도시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사람을 수단이나 자본으로 취급하는 것도 바벨 도시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벨 도성과 탑 이야기는 오늘날 도시든 농촌이든, 어디에 살든지 하느님 없이 사는 모습, 하느님 보다는 자기를 우선하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종교적으로는 끝없이 높아지려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에 대한 경종입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거대한 도시와 신전을 만들기 위해서 강제 동원되었던 사람들을 위한 인간선언입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거슬러서 오늘을 사는 인간들, 그 중에서도 1%도 안 되는 인간들을 위하여 지구 전체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파괴에 대한 자연의 경고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됨으로써 서로에게 핑계를 대고 모함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벽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차별과 욕망의 결과로 더욱 갈라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교만과 차별의 현장을 보시고 언어를 뒤섞어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과 무한정으로 추구하려는 욕망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있는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영화 “설국열차”나 “엘리시움”은 버려진 지구와 선택받은 1% 세상을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엘리시움은 고대 그리스인이 상상한 낙원입니다. 호메로스에 의하면 서방 대지의 끝으로 오케아노스강 근처에 있으며, 기후는 온난, 향기가 충만하다고 합니다. 엘리시움은 하데스와는 구분되는데, 처음에는 엘레시움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영웅들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신에 의해 선택된 자들, 바르게 산 자들, 영웅적인 행위를 한 자들로 범위가 넓혀졌는데, 이들은 사후에 엘리시움에서 축복되고 행복한 삶을 살며 삶 속에서 즐겼던 일 또는 직업을 계속 마음껏 즐기며 산다고 합니다. 헤시오도스(기원전 7세기경)의 시대에서 엘리시움은 서쪽 바다에 있는 행운의 섬(Fortunate Isles) 또는 축복받은 자들의 섬(Isles of the Blessed)이라고 알려졌다고 합니다.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 엘리제궁(Elysi-um)의 이름도 여기에서 딴 것입니다.

1%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존과 영화를 위해 나머지 사람들과 지구의 생명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세계의 곳곳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의 수단으로 말이 있습니다. 바벨에서 말이 달라서 흩어진 인류는 지구 곳곳에 흩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사용하든 서로 다른 말을 쓰든, 사람들 사이에는 벽이 있습니다. 서로의 소통을 막고 차별을 심화시키는 담이 존재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만 그 말을 통하여 전달하려는 마음, 진심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은 생각이나 욕망, 사랑과 원망을 담는 그릇이고, 사람들 간에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말은 천 냥 빚을 갚는 자원이 될 수도 있고, 수십 년 묵은 한을 눈 녹이듯이 녹이는 신비한 힘도 가졌지만, 반대로 상대방의 가슴을 도려내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말은 권력관계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구사되며, 지배자가 자신의 적이나 반대세력을 차별화시키고 낙인을 찍는 것은 ‘상징 폭력’입니다.<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 일상에서 우리는 “말이 된다”,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강자의 말이 사회구성원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말은 사회의 얽히고설킨 매듭이나 응어리를 풀어주는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 되지만, 권력자가 “말이 안 되는” 말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강압이 됩니다. 이 경우 권력자의 상황 규정, 낙인, 강변 등은 그것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거나, 사회적 소통의 길을 막아 버립니다. 


남한사회에서 많이 사용했던 ‘좌익’(빨갱이) ‘종북’(친북) 비하는 오직 강자들만이 사용하는 지배의 언어였습니다. 이런 언어게임은 상징폭력이 됩니다. 이러한 폭력으로 전권연장을 하려는 세력들은 권력관계의 지형을 활용해서 언어폭력을 구사하였습니다.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상대는 애초부터 대화의 상대가 아니고, 흑이 절대로 백이 될 수는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상대는 제압의 대상일 따름이었습니다. 그 어떤 명백한 증거가 부족해도, 아무리 설득력 있는 주장이 제기되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권력자들이 언어폭력을 구사하는 세상에서, 침묵과 무조건 복종, 낙인과 색깔 덧씌우기를 강요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 일을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항하면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힘없는 국민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세상이고, 정치인들에게는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치-경제적 의견과 목표가 뚜렷이 다른 사람들이나 집단들인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말은 의사소통의 매개이지만, 똑같은 비중으로 다툼이나 갈등의 불씨가 됩니다. 실수하거나 의도적인 할큄으로 사람들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실수로 인한 상처는 시간이 지나거나 내막을 설명하면 쉽게 풀리겠지만, 악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말은 심각한 폭력이 되고, 말도 되지 않는 말은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말과 혀를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시 52:4)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잠 17:4)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베드로전서 3:10-11)


지금 우리의 현실은 간교하게 행동하면서 진실을 말로 왜곡하는 사람들이 점령한 듯합니다. 그러한 말의 근원인 정치인들과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법의 집행자들, 진실을 바로 전달해야 하는 언론들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말로 인민을 분열시키고 자기들의 욕망을 성취하면서 자기들의 치부를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서 드러내지도 못할 일들을 하면서도 뻔뻔스럽게 큰 소리를 칩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13장을 본문으로 종말론(새날을 낳기 위한 진통)과 메시아적 공동체(희망과 기다림)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종말은 예수님과 함께 꿈꾸는 희망을 전제로 합니다.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종말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기다림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고, 처절함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 희망과 그 기다림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다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고,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간절히 희망하고 기다리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냐, 메시아적 공동체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 갈까 하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기다림과 희망은 현실에서 부족하고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기다리고 희망하는 모습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예수님의 꿈을 생각할 때에 그 괴리는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안타까워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와 이루려는 메시아적 공동체의 모습이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이루려 했던 꿈인 하느님 나라와 얼마만큼 비슷해졌습니까? 

교회를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종말은 예수님과 함께 꿈꾸는 희망을 전제로 합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종말신앙의 핵심입니다. 기다림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무방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산다는 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기다림으로 가능합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살았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기다림은 구체적인 대상과 약속, 또는 그 약속의 담보를 분명히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미 만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고, 처절함 몸부림이 있습니다. 

종말 신앙,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누군가의 메시아가 되겠다는 신앙입니다. 내가 어느 생명의 예수(해방자)가 되겠다는 신앙입니다. 메시아적 공동체를 희망하는 것은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신앙과 결단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낙심하지 맙시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를 사람들은 두 가지의 사명이 있습니다. 먼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의도적으로나 악의를 가지고 하지 않도록 자기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본문의 표현대로 한다면,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고,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는 일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낙심하지 말고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우는 일입니다. 말씀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어서 예수님의 삶 속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 빛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선한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까지, 믿음과 진실이 이기는 그날까지 빛의 사자가 되어 희망을 행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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