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해] 창조절(10-1) - " 분별하는 능력 " / 김거성 목사본문) 삼하 23:13-17; 약 4:1-10; 마 10:34-39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자리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1. 성서 문자주의 어떤 여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눈을 감고 성서를 아무데나 펴서 본문에 손가락을 짚은 다음 눈을 떠서 그 구절을 읽고 그 말씀만큼은 꼭 실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루는 눈을 떠서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읽었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는 출애굽기 31:14의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버스 기사인 자기 남편이 주일임에도 불구하고 일하러 간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건 실천할 수 없겠구나’ 생각하고 눈을 감고 그 대신 다른 구절을 찾았습니다. 레위기 18:4이 나왔습니다. 읽어보니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죽이라는 말씀을 거역하려 했는데, 그대로 행하라는 말씀까지 나오니 정말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 아닙니까? 이게 바로 성서 문자주의의 함정 아닐까요? 2. 평화인가, 칼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으로 칭송합니다. 눅 2:14을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의 때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들려온 천군천사의 찬양이 나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엡 2:14에서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서 본문에도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구절 뿐만 아니라 성서에는 서로 상충되는 내용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사 2:4)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보습이란 옛날에 시골에서 소를 몰아 쟁기질할 때 흙을 파내도록 쟁기 끝에 달린 쇳조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예언은 평화를 상징하는 표현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요엘서에서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칼을 만들어라”(욜 3:10)는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이 두 예언자의 상황이나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강조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맘에 맞는 성서 구절을 취사선택하여 인용하는 일은 대단히 잘못된 행위라 하겠습니다. 특히 그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성서 구절을 주장하게 되면 성서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3.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말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못박힌 강도들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를 모독하였지만, 다른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주님께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누가복음서 2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두 강도 모두 욕했다고 기록한 마가나 마태 복음서도 있습니다.(막 15장, 마 27장) 어느 쪽이 맞을까요? 이처럼 성서의 본문들은 서로 상충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능한 최대한 주석 등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에 외국어로 된 내용들도 바로 번역이 되어 읽을 수 있으니 온라인 주석 등을 활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이해하고자 하면 그 말씀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어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4. 간성인(間性人, intersex) 며칠 전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2년 9개월 만에 사임했습니다.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나는 퇴장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배경에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알려진 위원장 등이 있어서 뒷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권위 존재 이유에 반하는 인사’라는 혹평을 받던 인권위원장은 자신의 저서 ‘왜 대한민국 헌법인가’에서 차별금지법을 비판하며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창조했다는 성경적 세계관 및 창조 질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썼다고 합니다.(https://www.logos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7679.) 또 이런 주장을 위해 지난 주일에는 여러 교계인사들이 교인들을 동원해 서울 시내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성별ㆍ장애ㆍ나이ㆍ출신국가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요지로 삼고 있습니다. 흔히 ‘성 소수자’라고 일컬어지는 LGBTQIA+라는 약어 중에서 ‘I’는 영어로 ‘intersex’ 즉 ‘간성’이란 뜻입니다. 외모로는 전형적인 여성으로 보이지만, XY 염색체를 가졌고, 몸 내부에는 고환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신체에 대한 전형적인 이분법적 개념에 맞지 않는 성적 특징을 보입니다. 그런데 유엔 자료에 따르면, 인구의 최대 1.7%가 간성인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https://www.ohchr.org/en/sexual-orientation-and-gender-identity/intersex-people.) 이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닙니까? 이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사람이 분명합니다, 과거에는 인위적으로 수술이나 사술 등을 통해 이런 간성인을 남성이나 여성 가운데 하나의 성으로 강제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행위는 유엔 차원에서 금지됩니다. 대신 간성인의 자율성, 신체적 완전성 및 성적 특성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교계에서 성서에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했다는 문자적 해석을 근거 삼아 차별금지를 반대하고 있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기독교 근본주의? 지난 6월 어떤 교단의 신학교에서 “창조론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는 공식적 의사 표명과 저작물 발표를 함으로써 신앙 선언문에 위배되는 행위” 등을 이유로 교수를 해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https://www.christian-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5.) 이런 바탕에는 ‘창조과학’ 주장처럼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근본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384.) 카톨릭교회는 과거 구약성서 창세기를 근거로 지동설을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를 정죄했던 오류를 시인하고 복권시켰다고 합니다.(https://www.khan.co.kr/world/europe-russia/article/201005231743155.) 하지만, 근본주의는 아직도 이 땅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1953년 우리 교단의 새역사가 시작된 것도 바로 이런 근본주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제38회 호헌총회선언서’를 보면, “'총회'는 개혁교 본래의 대헌장인 신앙양심의 자유를 억압 유린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앙적인 존재이유를 상실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의 자유”와 “건전한 교리”, “신앙양심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https://www.jjtp.co.kr/Page/Index/3647.) 지난 10월 2일 수유리 한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장공기념사업회 주최로 2024 장공기념강연회가 열렸습니다. 한남대 기독교학과 천사무엘 교수가 "장공과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해 주셨는데, 그 영상과 자료집이 유튜브에 올라왔습니다.(https://youtu.be/TxDgd_lkm_8?si=aQif0Ascsa0lag5P.) 이 강의에서 천 교수는 한국기독교 근본주의는 성서의 문자적 내용이 과학적, 역사적 사실이라 믿고 전했다고 분석합니다. 나아가 이런 근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우리 기장의 뿌리였음을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강의 영상과 자료집까지 올라왔으니 관심있는 교우들께서는 꼭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https://periodic-glue-0c4.notion.site/113e79dbe8e380f4b403e7b665f03d10.) 6. 분별하라 이처럼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주일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이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당시 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비텐베르그 성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써붙였던 날을 기념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별력을 잃고 헤매는 것이 지금 교계의 현실 아닙니까? 약 4장의 말씀처럼 교만함을 물리치고 마음을 순결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괴로워해야 합니다. 지금은 웃고 기뻐할 때가 아닙니다. 자신과 교회, 나아가 이 나라와 세계를 생각하며, 슬퍼하고 울고 근심할 때입니다.(약 4:9) 오늘 삼하 23장에는 다윗과 그의 세 용사가 나옵니다. 그들 이름은 요셉 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 23:8-12) 산성 요새에 있던 다윗이 목마르다고 하는 말을 들은 그 세 용사들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삼하 23:15-16) 요즘처럼 생수를 흔하게 마실 수 없던 당시에 물은 생명과도 같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다윗은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삼하 23:17)라며 그 물을 주님께 부어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윗은 분별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로서의 자격도 없습니다. 그 어떤 지도자라 하더라도 분별력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내침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마 1);36)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정주의로 자기 주변에 매몰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 함께 말씀을 생각하며, 예수께서 주시는 칼로 엄정하게 우리 스스로를 또 우리 주변을 재단하기로 다짐합시다. 그 일은 결코 쉽고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분별력을 행사하면 스스로에게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마 10:36)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달리 어쩔 수 없습니다. 그 길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마 10:38)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