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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9-2) -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 한성수 목사

관리자 2026-10-30 (금) 18:23 14시간전 13  

본문) 사 6:1-8, 요 8:12-30, 계 15:1-4


<이사야 6:1-8>

하나님은 역사의 위기 속에서 당신의 사람을 부르십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한계에 이르고, 세상의 권세가 흔들리며, 사람들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 알지 못하는 때에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합니다. 위기는 인간의 교만이 무너지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이사야 6장은 이러한 역사의 위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라는 말씀은, 남 왕국 유다가 처한 정치적·사회적·종교적 위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에 왕위에 올라 오십이 년 동안 통치하였습니다. 농업을 장려하고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나라의 경제적 기반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역대하 26장 5절은 그가 하나님을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웃시야의 통치가 성공을 거두고 나라가 강성해지자,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 26:16)라는 역대기의 기록은, 웃시야가 제사장에게 맡겨진 성전의 분향 직무까지 자신의 권한 아래 두려고 한 교만을 보여 줍니다. 제사장 아사랴를 위시하여 용맹한 팔십 명의 제사장이 그를 막았지만, 웃시야는 오히려 분노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이마에 나병이 발생하였고, 그는 죽는 날까지 별궁에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자기 능력으로 착각하는 순간 성공은 교만이 되고, 교만은 심판을 부릅니다.

웃시야가 타락한 권력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유다 사회 역시 영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1장과 5장이 보여 주듯, 번영 뒤에서 유다의 영혼은 썩고 있었습니다. 제사는 계속되었으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고, 힘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를 짓밟았으며, 정의가 있어야 할 곳에 포악이,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사 5:7). 뒤에 이어지는 6장 9-13절 역시, 이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영적 감각이 마비된 것입니다. 바깥 정세도 급박했습니다. 웃시야가 죽을 무렵인 주전 740년대에 앗수르에서는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왕위에 올라 정복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곧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의 목에 칼을 겨눕니다. 안으로는 신앙이 병들고, 밖으로는 제국이 다가오고, 오십 년 동안 기댔던 왕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한 시대가 끝나고 위기의 시대가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땅의 왕이 죽은 바로 그때, 하늘의 왕을 보았습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사 6:1) 웃시야는 죽었으나 하늘의 왕좌는 비지 않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환란과 역경을 만날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흔들릴 때 물러서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을 찾아 부르십니다. 모세를 부르신 때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신음하던 때였고, 사무엘을 부르신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하지 않던 때였으며, 예레미야를 부르신 때는 남유다가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위기를 방치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세워 혼돈의 때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명이 인간의 계획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사야를 찾아오셨고,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사명은 언제나 부르시는 분의 주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어떤 역사를 펼칠 것인가, 그리고 나를 어디로 부르고 계신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어떤 길을 걷습니까? 이사야의 소명 장면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깊은 성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제사장도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였습니다. 스랍들이 서로 불러 외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세 번 반복해 강조하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이사야서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바로 이 장면에서 비롯되었다고 많은 주석가들이 설명합니다. 사명은 하나님 앞에 서는 데서 시작됩니다. 웃시야의 죽음이라는 충격 앞에서 이사야는 성전으로 올라가 멈추어 섰습니다.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세상은 눈과 귀를 현혹하는 큰 목소리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먼저 고요히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의로운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둘째,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 정결해지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본 이사야의 첫 반응은 자신감이 아니라 절망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사 6:5). 이사야는 유다의 죄를 정죄하던 예언자가 아니라, 죄 속에 함께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남의 허물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입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한 스랍을 보내시고, 스랍은 제단에서 취한 핀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며 말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이사야가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결은 제단에서 왔고, 그것은 하나님께 친히 마련하신 속죄의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사명자는 흠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사명자의 자격은 그를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셋째, 자원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죄가 사해진 뒤에야 비로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에게만 사명을 감당할 자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하여 당신의 부름에 응답할 자를 찾으셨습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부름에의 응답은 억지로 끌려가는 대답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자가 자원하는 결단입니다. 앞서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하였던 이사야는,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뒤에 기꺼이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맡길지 묻지 않았고,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도 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사명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죄를 고백하지 않고, 정결케 되지 않은 채 스스로 나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에서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합니다. “그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렘 23:21) 그들, 곧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스스로 달려갔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예언하였습니다. 자신을 깨어 부수는 철저한 영적 준비 없이, 영웅심에 도취되어 광장으로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탐욕에 매인 생각을 하나님의 뜻 인양 소리칩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합니다.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한 멸망의 위기 앞에서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렘 6:14)라고 하면서 우매한 백성을 선동하고,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 보다 자신의 권세를 앞세웁니다. 하지만 사명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권위가 아닙니다.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참된 사명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과 삶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12-30>

이제 우리는 이사야의 소명 사건을 신약의 복음과 연결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사야가 유다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어둠에 갇힌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초막절에는 성전 뜰에 거대한 등불을 밝혀 예루살렘 전체를 비추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참 빛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가 일찍이 예언한 대로입니다. 이사야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쳤도다”(사 9:2)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실 종은 “이방의 빛이 되리라”(사 42:6, 49:6)라고 하였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고 합니다.(요 8:16-18) 예수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내심의 목적은 어둠에 갇힌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그 빛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방의 빛이 되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와 이스라엘을 넘어 땅끝까지 확장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인 줄 알고”(요 8:28)라고 하시면서,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희생을 통한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입술에 핀 숯을 받아 죄사함을 받았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온몸으로 받으신 희생 덕분에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이사야 6장의 제단의 숯불은 십자가의 은혜를 앞서 보여 주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빛의 사명을 우리에게 위탁합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라는 사명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빛을 받은 사람일 뿐 아니라 빛을 비추는 사람, 곧 사명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하나의 이사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안전한 곳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기의 시대에 어둠 속으로 보냄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던지신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집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오늘날 역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와 같이 죄와 사망의 어둠이 깊습니다. 불의와 갈등, 외로움과 절망,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우리 곁에 가득합니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시어 믿는 자들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빛을 비추시기에 우리는 부르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요한계시록 15:1-4>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사명은 어디를 향합니까? 요한계시록 15장 1-4절은 사명의 마지막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하늘의 유리 바닷가에 선 승리한 자들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릅니다(계 15:3).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부르던 구원의 노래가 이제 어린 양의 구원 안에서 새롭게 불립니다. 요한계시록이 출애굽의 구조를 따라 새 출애굽을 그리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노래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민족에 머물지 않습니다.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 모든 나라가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이는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음이니이다”(계 15:4) 이사야 6장에서 스랍들이 부른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가 여기서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리라”라는 약속은,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나라가 와서 경배”하는 현실로 확장됩니다. 이사야 한 사람이 들었던 거룩의 외침이 마침내 만국의 찬양이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예수를 따르는 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며, 반드시 이루실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시는데 우리를 쓰십니다. 이사야를 보내셨듯, 그리스도를 보내셨듯,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그 사명에 응답할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계셨고,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뵈었고, 자신의 죄 앞에서 무너졌으며, 은혜로 정결케 되었고, 자원하여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이 차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어둠의 세상에 생명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빛을 입은 우리를 다시 이 세상에 보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도 “웃시야가 죽은 해”를 살아갑니다. 믿고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는 때, 시대가 어두워지는 때,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때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때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 앞에 조용히 서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내 입술과 삶의 부정함을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피로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일어나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이 대답을 드리는 우리를 통해 어둠은 물러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정과 일터와 이 나라를 거쳐 땅끝까지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나라가 와서 어린 양께 경배하며,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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