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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3-2) - " 신 인류의 등장 " / 이순태 목사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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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3-2) - " 신 인류의 등장 " / 이순태 목사

관리자 2019-09-14 (토) 11:56 5년전 2714  

본문) 창12:1-9, 요8:53-59, 갈3:1-14

 

1. 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대뜸 이렇게 말씀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했을까? 그 어리석음의 이유를 갈라디아서 3:3절은 이렇게 서술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여기서 육체로 마친다는 것은 할례를 의미한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민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종교 의식이었다. 물론 할례를 받았다고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할례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일깨우며, 그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자극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 점에서 할례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할례가 할례 자체만으로 머물려고 할 때, 할례는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되고, 그때부터 할례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벽이 되고 만다.   

  ②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스며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할례의 본래적인 의미는 제쳐 놓고, 오히려 할례 자체를 구원의 완성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할례를 받을 때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말에 미혹되어,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는 구원받기 위해 자신도 할례를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행태를 보면서 바울은 ‘어리석도다’라며 질책을 한 것이다. 


2. ① 그러면서 바울은 구원에 이르는 바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믿음이다. 이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3:6절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낸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 

  학자들은 창세기 1-11장을 ‘원역사’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창세기 1장-11장까지가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역사 이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원역사는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세상과 인간의 창조, 인간의 범죄와 타락의 확대가 나온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살려내신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범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바벨탑을 세워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도를 계획하셨다. 한 인물을 택하여 그를 통해서 새로운 종족을 만들고자 하신 것이다. 즉 신 인류를 만드실 계획이다. 이를 위해 택함 받은 자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②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떠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먼저 요구하신 것은, 그가 이제까지 의지하고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떠나는 것이다. 포기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들이 무엇인가? 창세기 12:1절에서 하나님은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말씀하신다. 먼저 ‘고향’을 떠나라 하셨는데, 고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레츠’로서 본래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땅은 인간 삶의 기본적인 거점이다. 그것을 떠나라는 것이다. 또한 친척을 떠나라 하신다. 아브라함 당시 가족과 씨족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아주 중요했다. 그런데 그것도 떠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집’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자신의 가족과 그들이 소유한 재산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 내려놓고 떠나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연, 혈연, 재산을 떠나라는 명령은 삶에 필요한 기본 요소를 다 내려놓으라는 요청이다. 즉 인간적인 보호 영역을 박차고 나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의지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까지 의지했던 것을 버려두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야 할 곳을 미리 제시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께서 앞으로 보여줄 땅을 향하여 가라는 것이다. 안정된 기존의 자리에서 떠나 낯선 자리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그분의 명령을 따를 수 있다. 하나님께 왜 이런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하신 걸까? 세상 사람들은 지연 중심으로, 혈연 중심으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런 문화권으로부터 뽑아내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신 인류를 만들고자 하신 것이다. 창세기 12:3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개인을 보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새 인류, 새 역사의 물꼬를 트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③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새 인류를 만드시려 하였을까?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통해서이다. 갈라디아서 3: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어느 특정 민족의 조상으로만 삼고자 하심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온 세상 무리들의 조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이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어떤 유형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의 복에 삶의 기반을 두고 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삶의 비전을 두며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기 시작했다. 


3. ①예수님과 바울 시대 사람들은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라는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그 이유는 구원이란 아브라함의 가문에 속하는지의 여부로 결정된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족보를 신뢰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이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도 종교 지도자들과 열띤 논쟁을 하셨다. 요한복음 8:39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혈연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이므로 자신들은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시면서, 만일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면 아브라함과 닮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반문을 하신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아비, 곧 사탄을 닮았다고 비판하신다. 

  ② 바울 역시 혈연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할례 받은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발상을 다루었다. 1세기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미미한 소수자들이었다. 이들은 헬레니즘적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150년 전에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할례를 행한다는 이유로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잠식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욱 율법 준수를 강조하였고, 이로써 이방인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그들에게서 할례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보기에는 온전히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자, 특히 할례 받지 않는 자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대신 아브라함의 자손을 재정의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배제된 이방인 집단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포함시켰다. 어떻게? 믿음으로! 바울은 아브라함도 한때 이방인었고,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은 할례받기 전에 믿음으로 받은 것임을 지적한다. 로마서 4: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구원의 반열에 들어간 것은 그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다. 할례는 그후 이미 받은 구원을 재확인하는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절 이하에서 분명히 말씀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4. ①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56절에서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셨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주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아브라함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가신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환영하고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세상은 홍수의 심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바벨탑을 쌓아 놓고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후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인 유대인들은 창세기 12:3절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축복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건 결단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문제를 풀겠다고 하시니, 아브라함이 진정 기뻐한 것이다. 

  ②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떠나라! 하시자 기존에 의지하던 것을 떠났다. 가라! 하시자 갈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가지고서! 그런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세 가지 약속을 주셨다. 새 땅을 주겠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너로 하여금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게 하겠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야망으로 바벨탑을 건설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이름을 높여 주신다. 참된 복은 하나님이 주셔야 복이다. 이 모든 것 믿음으로 인하여 주어진 복이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이어 받은 새 인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새 땅, 새 처소를 마련해 놓으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 자녀되게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눈물 씻어 주시고, 마지막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믿는 새 인류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믿음의 길 우리도 걸어서, 이 땅에서 새 인류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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