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7:6-11, 롬 1:1-7, 마 5:43-48
한글 성경의 제목인 신명기(新命記; ‘다시’라는 뜻의 申, ‘계명’이라는 뜻의 命, ‘기록’이라는 記)와 영어 성서의 제목(deuteronomy)은 모두 신명기가 “새로운 명령” 혹은 “두번째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기원전 2-3세기에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구약성서(LXX)의 제목(ΔΕΥΤΕΡΟΝΟΜΙΟΝ)을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신명기를 모세의 고별연설에서 나타난 제2의 율법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성서의 제목에서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명기는 오경의 전반부, 특별히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 등에서 강조되었던 여러 법률과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명기를 두 번째의 법으로 이해할 때, 첫 번째 법은 시내산 계약을 의미하며,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행한 당부의 연설인 신명기의 말씀이 두 번째 법에 해당됩니다.
신명기는 한마디로 모세의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행한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더 이상의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간곡하게 타이릅니다. 그리고 광야 세대뿐 아니라 후손들을 바르게 교육시켜야 약속의 땅에서 오래오래 평화롭게 살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이로써 신명기는 이스라엘 율법의 최고권위자인 모세의 입을 빌어 이스라엘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즉 언제 어디서나 특히 위기에 처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믿고 따라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간곡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명령과 규례와 법도)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수가 가장 적은 민족이지만 야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잘 나서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잘 해서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낳고 기르는 어머니 아버지이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 이유로 지켜야 하는 하느님의 율법의 핵심도 또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켜야 하는 이유도 사랑이고, 하느님의 말씀의 중심도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처럼, 하느님이 완전하시니 우리도 완전해야 한다는 말처럼,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산상설교(5-7장)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율법과 예언에 포함된 윤리적 요구도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팔복의 가르침에서 윤리는 단순히 법률적 규준에 대한 순응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길은 하느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마태복음의 핵심은 율법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5:17-20)과 일련의 반명제(5:21-48) 안에 들어 있습니다. 5:17,18에서 율법과 예언의 “완성”과 “불변”은 율법이 약속한 것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왔으며, 새로운 공동체는 율법이 약속하고 명령한 모든 것의 진정하고 완전한 실현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5:19-20에서 마태는 가르침과 행함의 일치를 주장하고, 바리새인들의 부도덕을 공격하는 대신 참 이스라엘의 구성원에게 율법을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그들을 넘어설 것을 촉구합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율법이 명백히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사항을 완전히 무시하고 때로는 율법의 요구사항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의 본질과 정신을 온전하게 구현한 것입니다. 신명기 24:1에서 허용된 이혼을 금지(5:31-32)하고, 살인(5:21-26) 간음(5:27-30) 보복(5:38-42),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일(5:43-48)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요구들은 법적인 계산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데, 갖가지 요구와 책임을 대할 때 거기에 자발적으로 협력할 것을 명령합니다.
5:48에서 “완전”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결함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실현할 때 나타내 보이며 또 하느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인간의 가치기준이기도 한 전심전력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또한 마태에 의한 율법에의 복종은 윤리적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기도(6:5-8) 구제(6:1-4) 금식(6:16-18)과 같은 유대인의 전형적인 종교행위도 포함하며 성전 규정이 정한 적절한 희생제물의 봉헌도 분명히 거기에 포함됩니다. 이는 막연한 “착한 행실”(5:16)이나 “지키기 위해 지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천(7:21,26)에 옮기는 삶의 한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조금 쉬울 수 있지만, 막상 사랑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조차도 그렇습니다. 아니면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원수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내가 저 사람을 이해는 하겠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천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하는 사람이나 많은 수양을 쌓아서 완성된 성품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도 연습이 필요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자기를 성찰하라고 하는가 봅니다.
여러분, 원수가 누구입니까? 원수는 어떤 이유에서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원수였던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 집안 식구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고, 한 교회 교인일 수도 있습니다. 원수는 같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랑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틀어져서 서로를 미워하는 관계가 된다면 그 사람이 원수입니다.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히게 한 원수)나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 이 세상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는 아니더라도 원망과 저주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원수는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맺어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미워하고 증오하는 관계를 맺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레위기 19:18) 미워하고 증오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는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동생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동생을 미워해서 원수로 여기고, 결국에는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원수를 만드는 것은 자신이 받은 상처와 피해를 생각함에서 오는 것이고 미움과 저주는 그 피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고 내 것이 많으면 원수가 많아지게 마련이고, 상처가 많고 피해의식이 클수록 미움이 쌓이게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자리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관계는 그 자체가 쌍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풀기 위해서는 나도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먼저 변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들이 이웃집에 갔더니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집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고 하는데 아들은 거칠게 항의합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는 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그러나 거절당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는 깨끗한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든, 이웃을 사랑하든, 서로 사랑하든, 원수를 사랑하든 사랑하는 것 자체로 행복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인간의 노력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정의가 결여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정의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사랑의 이름으로는 용서할 수 있고, 정의의 이름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은 잘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정의가 죽고, 정의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이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사랑과 정의는 인간의 삶을 영위 하는데 있어 많은 유익을 주지만 이 둘이 조화롭지 못하고 충돌할 때 그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옳고 그름의 정의가 빠진 사랑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정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마치 새의 양쪽 날개와도 같습니다. 서로가 반대되거나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수평을 유지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나아갈 때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목적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가치가 없고 정의가 없는 사랑도 의미가 없습니다. 정의를 단순하게 말하면 분배된 사랑입니다(justice is simply love distributed).
사랑과 정의가 충돌할 때는 주로 집단 간의 관계이거나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예를 들은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말씀은 정확하게 성서에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잠언에는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그가 걸려서 쓰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라.”(잠 24:17)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잠 25:21)라고 가르칩니다. 단지 성서에서 원수에 대한 탄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시편입니다. 시편 중에서도 탄원시에는 원수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많습니다.(새번역 검색 106건)
“내 원수들이 나를 잡으려고 쳐 놓은 덫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함정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시 141:9)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시 138:7)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시 136:24)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원수들을 짓밟을 것이다.”(시 108:13) “원수가 나에게 악한 짓을 하였으니, 주님이 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진실하심을 다하여 그들을 전멸시켜 주시기를 빈다.”(시 54:5) “내 앞날은 주님의 손에 달렸으니, 내 원수에게서, 내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시 31:15)
시편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노래하듯이 억압으로부터의 구원과 함께 억압하는 사람들의 멸망을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집단적으로 학살당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 학살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제주 4.3항쟁, 여순 10.19항쟁, 광주 5.18항쟁,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국가폭력으로 인해서 죽임당한 무고한 사람들의 한을 어떻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개인적인 원한이라면 한 사람의 침묵으로 그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직도 그날의 아픔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정의에 근거해서 원수 사랑이 올바른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사랑과 정의는 적절하게 조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들의 아픔을 단지 잊으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고 명예가 회복되고, 앞으로의 관계가 옳은 관계로 맺어질 때에 원수 사랑을 온전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방향과 방법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사랑할 때에 원수 사랑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한다고 하는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분명하게 접근할수록 명확해집니다. 율법의 본질, 율법의 정신을 찾아서 그것을 지키려고 할 때에, 율법이 완성됩니다. 모세를 통하여 받은 율법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에 의해서 왜곡되었고, 어떤 조항은 강화 되고 어떤 조항은 무시되었고, 권력에 의해서 잘못 적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의 율법의 본질과 정신을 바로 잡아서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완성하려고 한 그 율법은 중심에 사람(생명)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이 결여된 율법조항에는 과감하게 반대하기 때문에 당시의 지배자들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착하고, 나쁘고, 좋다’라고 하는 것은 정해진 율법의 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적합한가, 그 말 속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율법이나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고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법들이 사랑을 품고 있는 법으로 만드는 일도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세세한 조항을 지키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법을 왜곡하여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주장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대학 교회문에 붙인 사건이 있었던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을 위하여 헌신, 헌금하기 보다는 교회를 위하여 기부를 하고 공적을 쌓는 것이 마치 구원의 근거인양 호도하며,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죄인의 사죄가 무조건 적으로 이루어지는 진리를 왜곡하여 돈을 내고 이를 구입하면 교회가 죄의 사죄를 보증하겠다는 취지의 면죄부까지 강매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수장에 불과한 교황의 절대무오성을 주장하고,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님의 구속사역이 성취된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 제사장과 같은 중보권을 독점하는 사제 제도를 유지하며 성직매매를 일삼는 등 비성경적인 교리와 제도로 인하여 가톨릭교회는 극도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근본적으로 가톨릭교회에 반발하여 오직 성경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인간과 교회는 세상의 그 어느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삼대 원칙을 성서에 근거하여 주장하며 교회의 사상과 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결과 향후 긴 투쟁을 거쳐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모든 제도적 종교들은 다시 스스로를 개혁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종교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실질적인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미에서 교회개혁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하고 바꾼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잘못된 것을 고치고 새롭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로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교회와 기독교를 개혁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종교가 진정으로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시작이 되고, 모든 사람과 생명이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든 개혁의 시작은 하느님이 주신 말씀(명령과 규례와 법도)의 핵심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중심인 사랑을 어떻게 회복하느냐,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은 그 원수의 원수 된 행위는 미워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거나 원수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집단 간의 관계나 국가폭력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함께 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나의 마음에 따라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불완전한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 원수가 되는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합니다. 때로는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탄원하면서 기도할 때에 우리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삼고 그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옳으심을 드러냈습니다. 사랑은 정의를 통해 구체화 되고 정의로운 행동이 평화를 만들게 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시편 85:10-11) 사랑합시다. 하느님을, 이웃을, 서로를, 원수까지도, 예수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