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20:1-21, 빌 4:8-9, 막 12:28-34
아버지로부터 미리 재산을 상속받은 둘째 아들은 먼 타국으로 갔습니다. 가급적 아버지의 간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타국에서 맘껏 자유를 즐겼습니다. 오직 내가 하고 싶은 것만을 하였습니다. 내 스스로 번 돈은 아니지만 상속받은 재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랐던 탐욕의 주인처럼 더 이상 재물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뭄이 닥치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합니다.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주리지 아니하고 배불리 먹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제 아들이 아닌 종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탕자로 전락한 둘째 아들은 참된 자유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자유의 삶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400년이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애굽 땅을 벗어난지 삼 개월이 지나 시내 광야에 이를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열 가지 계명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전반부 네 개의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우상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것인데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는 불의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면 참되고 의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나는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너희를 구해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2)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뼈아픈 과거를 소환한 것은 다시는 종과 노예의 삶으로 돌아가서는 않된다는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 사람의 압제에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왔으니(출 19:4) 내가 베푼 구원의 삶, 다시말해 해방과 자유의 삶을 맘껏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얻은 해방과 자유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밝히신 하나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이시라는 것입니다.
칼빈(Calvin)은 본 절을 '십계명의 서문'이라고 평하였는데, 십계명의 서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과거의 삶은 종이었고, 그 종살이로부터 하나님이 구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과 자유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날 때 그리고 탐욕과 열락의 종으로 살아갈 때, 서두에 언급한 둘째 아들처럼 탕자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1에서 제4까지의 계명이 나를 구속하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참 자유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다시 종살이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강퍅한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해방과 자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자유는 십계명의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울타리’라는 한계를 두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 불완전하고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본질상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물에 빠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 주실 때만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어리석고 우둔한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한 구속의 사건입니다.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그 불순종의 죄성을 보고서 하나님은 출애굽의 구원의 결정체였던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다시한번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가 이웃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8-3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십계명의 제1에서 제4까지의 계명이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제5에서 제10까지의 계명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십계명의 명령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자유를 지속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으로 얻게 된 참 자유는, 나만을 위하는 이기적 사랑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는 사랑, 내 것을 먼저 먼저 내어놓는 사랑, 기꺼이 내가 손해 보는 사랑을 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이 지속가능한 자유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타적 사랑의 행위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삶에서 벗어나게 하신 구원의 은혜를 깨달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대화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소개합니다.(눅 10:25-37)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본질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눈높이에 맞는 자끼리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이웃 사랑은 고난 당한 자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 역시, 종 되었던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은혜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바울은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복음이었습니다.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해방과 자유의 삶을 지속해서 누리려면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나를 종으로 얽매는 올무의 삶을 살아갑니다. 탐욕과 이기심의 올무가 나를 종이 되게 합니다. 물질과 권세와 세상 열락이 애굽 땅의 바로처럼 나를 붙들어 맵니다. 그런데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서, 종 되었던 영혼들을 해방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까? 나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자였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 유혹과 시험에 실족하는 어리석고 연약한 자였습니다. 이기심의 종이요, 불의와 탐욕의 시녀였습니다.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이기심과 불의와 탐욕의 죄 아래 놓인 자였음을 자백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접촉점입니다. 우리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처럼 종살이의 고통과 아픔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먼저 나의 내면의 죄성을 부끄러워하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억누르는 불의의 세력을 고발하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애굽 땅의 고기 가마와 떡을 그리워하면서 종살이가 낫다고 광야의 현실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함으로써 유혹과 시험 그리고 불의와 압제로부터 해방된 의의 세상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