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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4-1) - " 황금잣대 "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4-09-18 (수) 16:46 1개월전 174  

본문) 대하 1:7-12; 살전 5:12-28; 마 7:1-12)


1. 황금률


오늘 복음서 본문은 산상설교의 일부로, 마태복음서 7:12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율법과 예언서는 구약성서를 대치하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기독교의 ‘황금률’(黃金律)이라고 불립니다. 3세기의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34150&cid=40942&categoryId=31575. 


황금률이란 영어의 ‘golden rule’이란 표현을 번역한 단어로, ‘황금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제목을 황금률이라 하지 않고 ‘황금 잣대’라고 표현한 까닭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이 단어가 정말 어렵게 느껴졌었기 때문입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황금률과 비슷한 말로는 역지사지 등이 있고 반대말은 이중잣대라고 서술합니다만, 왜 잣대라는 쉬운 표현을 두고 굳이 한자어 ‘율(律)’을 택했나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2. 황금 잣대, 보편적 가르침


남에게서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 예수의 말씀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고대의 가르침이나 다른 종교들에서도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Golden_Rule. 

 

주전 2천년대부터 4백 여 년 동안 존속했던 이집트 중왕조에서는  "Do to the doer to make him do",  즉 “남이 하기를 원하는 바를 행하라.”는 말이 있었고, 이후 주전 7세기부터 4세기의 파피루스에서는 “네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That which you hate to be done to you, do not do to another)는 격언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 대서사시인 ‘마하바라따’에는 “네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One should never do something to others that one would regard as an injury to one's own self.)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법, 즉 ‘다르마’(dharma)라는 것입니다. 

주전 6-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Thales)는 “다른 사람이 했다고 비난할 일은 (너도) 하지 말라.”(Avoid doing what you would blame others for doing.)고 가르쳤습니다.

조로아스터교 팔라비(Pahlavi) 문서에도 있습니다: “네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무엇이든 남들에게 하지 말라.”(Whatever is disagreeable to yourself do not do unto others.)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 Udanavarga)에 보면 석가모니도 “내게 해로운 것으로 남에게 상처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전 5세기였을 것 같습니다.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시대의 유학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그것은 바로 용서의 '서(恕)'이다[其恕乎]“.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즉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26307&cid=40942&categoryId=32972. 

 

네로 황제의 스승이며, 네로의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까닭으로 자살 명령을 받았던 세네카는 ”네 윗사람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네 아랫사람을 대하라.”(Treat your inferior as you would wish your superior to treat you.)고 가르쳤습니다.

구약성서 레19:18에도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랍비 힐렐(Hillel)은 이를 토라의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바빌로니아판 탈무드에도, “네가 싫어할 바를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전체 토라이고 나머지는 설명이다.”라고 이 구절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3. 평화와 종교간 대화


어제(9월 21일)는 UN이 정한 ‘국제 평화의 날’이었습니다. 경희대 설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가 제안하여 제정된 기념일이라고 합니다. https://blog.naver.com/philatelia/222878941465.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이란 가톨릭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윤리구상>(Projekt Weltethos, 영역판은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이란 책에서 “종교의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다. 또 종교의 대화 없이는 종교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Hans Küng, Projekt Weltethos, 안명옥(역), <세계윤리구상> (서울: 분도출판사, 2001), p.15.

고 전제합니다. 한스 큉은 앞서의 고대 문헌들에 추가하여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을 소개하며, 이는 황금률의 현대화, 합리화, 세속화로 표현합니다. Hans Küng, ibid., pp.127f. 

 칸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네 의지의 기준이 언제든지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이를 정언명령의 보편주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어 “너의 인격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인격까지도 포함하여 인간을 언제든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그렇게 행동하라.” 이를 정언명령의 인격주의라고 합니다. 정언명령의 두 가지 원리에 대해서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60465&cid=47331&categoryId=47331 참고.

  

한스 큉은 자연과학에서의 패러다임 이론을 활용하여 패러다임 이론을 적용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역사를 탐구하였습니다. 박종구, “신학과 역사의 경계: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의 방법론적 이해”, 신학과 철학 제7호 (2005.3): https://scc.sogang.ac.kr/theoinst/journal/journal_7/7-1.pdf. 

 나아가 그는 여러 종교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찾아보고, 단일 종교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바탕으로 종교들 사이에 서로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바탕으로 평화를 위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신학을 제창하였습니다. Hans Küng,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 (New York: Crossroad, 1991), pp.120-134. 

 우리는 흔히 에큐메니컬이라는 개념을 개신교 교단들 사이의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좁게 받아들이지만 말입니다.

2001년 7월 25일 세계 이민의 날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민과 종교간 대화>라는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경계심과 편견, 두려움의 장벽을 없애고, 다수파 종교인과 이민으로 구성된 다양한 종교의 소수파 종교인 사이에 대화와 상호 관용이 필요하다며, 또 대화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대화를 위해서는 인간관계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소박하고 일관된 일상의 행동이 요청된다고 한 것입니다. https://blog.naver.com/kwspeace/222318970823.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1965년 한국의 6개 종단, 즉 개신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지도자들이 모여 대화 모임을 갖기 시작하여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서울총회를 계기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로 출범하여 현재는 민족종교를 포함한 7대 종단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kcrp.or.kr/. 

  그렇지만 각 종단 내, 특히 개신교 내에서는 종교간 이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흐름이 충분하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북노회는 지난 2024년 봄노회에서 수도권 종교인평화회의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하기도 했습니다. 


4. 예수와 타종교인


구약성서 내용 대부분이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유대교나 그 공동체 범위 내에서는 무조건, 비판 없이 모두 포용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유다 내부에서 온갖 잘못된 흐름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이 예언자들이 잘못에서 돌이켜 본질을 추구하라는 깨우침을 준 배경입니다. 

신약 마 23:23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들로 비판합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는 것입니다. 막 11:15-19에 보면,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그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유대의 북쪽 지역은 그곳을 점령한 강대국들의 이주정책, 동화정책 등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예수 시대에 와서는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신약성서에서 사마리아와 관련한 대표적인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눅 10:25-37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의 일화를 말씀하시고, 율법교사에게 여기 나오는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묻습니다. 그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 차별이 숨어 있지 않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 신들을 섬긴 존재이기 때문에 아마 그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런 바탕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직접 답하는 것을 피한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장벽을 허물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차별은 요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실 물을 청하는 예수께 사마리아 여인은 묻습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 4:9) 본문 다음에 몇몇 고대 사본들에는 그 배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는 그 차별의 장벽이 없었던 것입니다. 


5.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런 차별, 장벽이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리스 아테네에 갔을 때, 아레오바고라는 곳을 찾아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행 17:22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거기에서 설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그리 크지 않은 바위 언덕으로 윗 부분에 몇 십 명, 많아야 백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https://www.aroundgreece.net/athens/attractions/areopagus/. 

 그곳 한쪽에 조그만 바윗돌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바로 그 돌 위에 서서 설교를 했을 것이라 추측하며, 아테네 전경을 바라보며 양말을 벗고 경건하게 그 돌 위에 올라가 기도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https://www.gospelimages.com/paintings/44/the-apostle-paul-on-the-areopagus.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행 17:22-23)라는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는 심지어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28절)“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29절) 

아마 교권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도 바울 또한 이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설교를 듣고 아테네 사람들은 더러는 비웃었으나, 더러는 ”이 일에 관해서 당신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32절)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고, 다마리라는 부인 등 몇몇 사람은 바울 편에 가담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32-34절)

이 설교에서 바울이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이 분명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던 ‘알지못하는 신’이 정말 야훼 하나님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이것을 접촉점(Anknüpfungspunkt, 독)으로 삼았던 것일 뿐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접촉점은 음악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https://docplayer.org/121143917-Gedanken-zur-gottesdienstlichen-musik-in-anknuepfung-an-martin-luther-als-reformator-und-musiker-die-bedeutung-der-musik-in-luthers-gottesdienstreform.html. 

 그래서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를 비롯한 많은 종교음악들이 나온 것 아닙니까? https://www.visit-luther.com/reformation-heroes/johann-sebastian-bach/. 

 


6. 내부에서의 갱신과 외부와의 대화  


종교 내부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운동과 종교 외부에서 다른 종교들과 서로 이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운동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타종단, 타종파에 대해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입장일수록 자기 스스로 본질을 추구하며 갱신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반성하거나 비판하며 본질을 추구하는 대신 오히려 게토처럼 울타리를 쌓아놓으며 자신들만은 완벽하다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본질에 집중할수록 자신의 눈 속의 대들보가 보이고, 서로 ‘나도 부족하다’는 그런 바탕에서라야 종교간 대화, 이해, 협력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7. 내로남불 대신 황금 잣대


‘내로남불’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줄인 것이지요. 이중잣대를 잘 나타내는 말 아닌가 생각합니다. 타종교 신자가 교회에 난입하여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너희가 우상이다라고 공격하는 이런 대접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로남불하는 타종교적대주의, 자기종교절대주의에 대해서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오늘 사도서간문 본문인 살전 5:15에서 사도 바울은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차별 없이, 타종교나 타종교인에 대해서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고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또 대하 1장에서 솔로몬이 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제 지혜와 지식을 나에게 주시라고 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들도 한 가지 황금 잣대로, 그 지혜와 지식으로 자신을 분별하고 반성하며, 서로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참된 신앙인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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