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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1-1) - " 태초부터 지금까지 창조와 구원을 " / 재일동포선교주일 / 개척선교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4-08-29 (목) 22:21 2개월전 195  

본문) 잠 8:22~31, 골 1:15~20, 요 1:1~14)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창조와 구원, 창조신앙과 해방에 있습니다. 창조신앙은 나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을 하느님이 직접 만드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해방과 구원은 그 하느님이 우리를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구해주셔서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은 모두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과 해방(Exodus)을 이야기 하는 출애굽기는 구약성서의 핵심이자 기준점이며 동시에 잣대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출발점은 “야훼께서 우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출 20:2; 신 5:6; 6:21; 시 81:11; 암 2:10).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를 이해하는 근거이자 그들의 역사 전체를 해석하는 바탕입니다. 이점에서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 증언하는 원체험 또는 바탕체험입니다. 그 체험은 인류의 삶의 모습과 방향을 향해 도전해 옵니다. 해방과 자유를 향한 인간 공동체의 갈망이 이루어져야 함을 증언한 출애굽 사건은 역사의 흐름 저 아래, 인간의 삶 저 깊숙한 곳에서 용암처럼 끓고 있다가 야훼 하느님의 해방의 손길이 내리치는 그 날 솟구쳐 오릅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투쟁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힘은 고대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자연환경(홍수나 가뭄 등)에 비하면 너무나 왜소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칫하면 위협적인 자연의 공격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앞장서서 물을 막기도 하며 때로는 사방에 물줄기를 내신다는 고백자체는 분명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고백은 자연의 위력 앞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개인들에게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모든 위협에 맞서서 투쟁해 나가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잠언 8장에서 지혜(소피아)는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22-23절)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말씀(로고스)으로 함께 했다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1-4절)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셨고 하느님의 창조에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느님과 동등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골로새서 1:20)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함께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와서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요한복음은 성육신의 과정이나 문자 그 자체를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성육신의 목적과 지향을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서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 목적은 구원입니다. 성육신의 목적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생명권입니다. 생명이 자기의 생명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가 그것입니다. 

로고스(말씀)가 사륵스(육신)가 된 것은 그의 육신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고, 그의 살을 먹는 사람들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육신이 된 말씀은 우리와 함께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로고스인 예수님은 인간, 즉 육신으로 존재하는 한 인격체로 태어나서 우리 인간들과 동일하게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살았고, 그리고 육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느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절대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하고, 하느님은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 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역설합니다. 찾아와서 우리와 함께 지금 여기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는 하느님을 역설합니다. 바로 옆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 나의 이웃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성육신을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창조신앙과 해방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목적이 서로 같습니다. 과거의 창조는 대자연이 신이 될 수 없고 하느님만이 대자연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며, 현재의 창조는 하느님이 나의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내가 처한 삶의 현장인 역사의 주체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미래의 창조는 현재의 역사가 끝나는 날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가 시작되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창조행위는 과거에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과 같은 환경오염이나 자연 훼손은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방해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맞서고자 하는 하느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자연을 배제한 채 인간의 구원을 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제는 하느님-자연-인간의 삼자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자연이 훼손되고 오염된 상태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창조 신앙에 나타난 구원은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까지도 포함되는 우주적인 창조와 구원입니다. 따라서 창조 이야기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 평화의 실현을 위해, 세계 내의 창조세계 보전을 위해, 우리들은 선한 청지기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음성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던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창조를 하십니다. 더불어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에 함께 하는 일이고, 해방과 구원을 경험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갈라진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 되게 하는 일이었듯이 오늘 우리 개인의 삶이나 교회의 활동이 인간의 욕망으로 죽어가는 생명들과 자연을 살리는 일입니다. 

창조절은 먼 옛날에, 태초에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억지로 믿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오늘도 계속해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창조와 해방의 사역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태초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하느님의 창조는 계속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사역에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탄원하지 않거나 함께 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절대로 역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즉 하느님은 자기의 뜻에 맞는 사람을 통하여 자기의 꿈을 펼칠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순환경제학의 첫걸음](사회자본연구원, 2015)이라는 책을 쓴 이승무 님은 경제라는 용어를 단순히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취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적용하고 가르칩니다. 이승무 님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경쟁을 원리로 하는 경제는 땅과 인간을 피로하게 하고 결국에는 파괴하고 마는 경제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순환경제는 우리말로 ‘돌고 돌아 다 살림’이라고 하는데, 경제는 그 경제에 속한 모두가 다 살 수 있고 살아날 수 있는 질서를 의미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서 그 길을 먼저 가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문제를 깨달은 사람들마다 마음 속 깊이 세포와 유전자 자체에 새겨진 돌고 돌아 다 살림의 원리를 의식적으로 발굴해 내고, 이를 통해 죽임의 경제의 실체를 드러내어 이를 다 살림의 경제로 전환하려는 의지를 불태워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순환경제의 공부와 연구는 이를 위한 것이고 돌고 돌아 다 살림을 ‘신’이나 ‘자연’이 회복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사실상 신이나 자연의 일부인 터라 그런 존재들로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를 찾아내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순환경제학의 첫걸음, 9쪽)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이 모든 생명과 사람의 평화를 향해 있듯이 오늘날 순환경제를 추구하는 삶은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과 부합합니다. “순환경제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유한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자연에 맞게 경험하고 실천해 가는 것이야말로 개인과 인간사회에 적용된 순환경제의 대원칙이 될 것이다. 인간 사이의 우애와 평화, 궁핍과 풍요의 나눔이 순환경제 속의 온당한 인간의 모습이다.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고 협박하고 고통을 주는 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크게 잠식하는 행위이고 이 우주자연의 원칙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여 인간사회를 추하게 망쳐놓는 행위이다. 인간은 폭력과 돈의 사용에 의해 그렇게 타락하게 된다. 순환경제란 대우주적 존재 공동체 안의 인간 공동체가 따라야 할 평화의 질서일 뿐이다.”(위의 책, 51쪽)


창조이야기에서 인간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선악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없고 분명한 한계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며 동시에 완전하지 못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상태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하여 존엄한 권리를 강조하거나 인간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은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절박한 고난의 현실을 뚫고, 함께 아파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를 지금 여기서 계속해야 하는 생명살림의 사명을 받은 청지기입니다. 사람들의 잘못으로 파괴되고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뿐 아니라 다른 생명들과 자연과 함께 잘 사는 일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창조를 계속하고 계시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선악과의 유혹에 언제나 넘어갈 수 있는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어제도 오늘도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창조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다바르, 즉 하느님의 창조력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육화(Incarnation)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듯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몸과 마음에 쌓여 내려온 지혜와 깨달음의 발현으로 모든 생명을 향한 하느님의 창조력이 우리의 삶에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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