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26 : 4~15, 약 2 : 14~26, 마 25 : 31~46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들어가서도 지금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첫 마음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길을 모세를 통해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신명기서를 보면, 모세와 출애굽 2세대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 있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삶의 환경이 달라지겠지요. 지금까지는 광야를 유랑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정착할 것이고 자기 소유가 생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주신 그 땅에서 나고 자라는 것들은 각자의 소득이 되겠지요. 문제는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고,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어떤 사람은 적은 것을 소유하는 부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햇곡식을 거둘 때,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첫 수확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말씀인 신명기 26장이 왠지 익숙하지요? 제가 지금 하는 설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요? 창조절 여섯째 주일 본문이 신명기 26장 1~11절이었잖아요. 그 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견물생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두게 된 첫 곡식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탐심이 생길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창세기 2장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창조하셨지요. 그러니 사람은 창조된 그 때로부터 “더불어 사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런데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만 생각하게 합니다. 탐심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삶의 길을 지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땅의 것만 보게 합니다. 그러니 탐심에 빠지면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는, 심지어 부모형제도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별하여 부르신 것은 또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 삼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대로 사는 그들로 하여금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며,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인생들의 죄와 허물로 깨어지고 상한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삶으로 다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탐심에 빠져 버리면 어떻게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통해 깨어진 창조질서가 회복되고, 어떻게 죄와 욕심으로 인해 단절된 관계들이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평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은 때, 그래서 탐심이 생기지 않은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모든 소산의 첫 열매를 거둔 후에 하나님께 드릴 신앙고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우리 기업으로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소수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을 생육하고 번성하고 창대케 하셔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애굽의 노예로 학대당하던 이스라엘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넷째, 가나안의 모든 토지와 소산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게 있는 이 모든 소유보다 이것을 내게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인 신명기 26장 1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곧 내게 있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삶의 열매가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비와 양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곡식을 거두게 하신 때 그래서 소유가 넉넉하고, 소출이 풍성할 때에 그 많은 것을 혼자 누리지 말고 본문 11절 반드시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거류하는 나그네를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즐기라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소산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 당신의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소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 그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서 해방하여 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모든 것이 본래 누구의 것이예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10개 중에 하나님의 몫인 1개를 드리며 내게 있는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임을,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내게 주셨음을 고백하는 거예요. 또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며 이것뿐만 아니라 내 모든 것을 드려도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두 번째 십일조를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4장 22~23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린 후 나머지 9개 중에 또 십분의 일을 구별해서 해마다 중앙 성소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을 축제용으로 사용했지요. 그런데 신명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3년 마다 두 번째 십일조를 중앙 성소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읍에 저장해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성읍의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나와 같은 성에 머무는 내 이웃을 가난하다고, 능력이 없다고 모른 채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눈 감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통의 은혜를 누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와 축복의 열매를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이라는 말 아시죠? 저 어렸을 때 보통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중국집, 거기서 자장면을 시킬 때 이렇게 말했지요. “여기 자장면 보통하나 주세요.”그러면 자장면 보통이 나옵니다. 아이가 시키든, 어른이 시키든, 여자가 시키든, 남자가 시키든, 장애인이 시키든, 비장애인이 시키든, 돈 많은 부자가 시키든,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 시키든 자장면 보통을 시키면 다 똑같이 나옵니다. 자장면 집에서 보통이라는 말은 그런 거예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보통의 은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악인이라고 햇빛을 거두시고, 악인이 사는 땅이라고 비를 내리지 않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래서 “누구든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들의 죄와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깨졌고, 그래서 마땅히 누려야 할 보통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당신의 마음 곧 자비를 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양선의 삶을 살게 하셨지요.
여러분 “자비”로 번역된 “크레스토테스”라는 말은 “친절한 성품,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려는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마음에 당신의 소원,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는데 그 근본이 바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인 자비입니다. 그러니 자비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늘 마음에 품고, 또 삶으로 드러내야 할 성령의 열매입니다.
또한 “양선”으로 번역된 “아다고쉬네”라는 말은 “선한 성품과 행동을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자비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양선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으로 표출된 선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와 양선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 둘은 각자의 역할이 있지만 두 개가 조화를 이룰 때 상호보완이 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는 양선은 없고 마음뿐인 자비만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있으나 세상과 이웃을 향한 행함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일명 명목상 그리스도인,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서신서 말씀인 야고보서 2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이자,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신앙과 삶이 따로인 성도들, 입으로만 이웃사랑을 외치는 성도들, 그렇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 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 청년 이야기”를 떠올려 보세요. 유대 관리이고, 부자인 젊은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계명을 이야기했지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라”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주신 말씀은 십계명 중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부자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지켜왔다며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냐고 예수님께 되물었지요. 예수님은 영생을 갈망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이 어떻게 했죠?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 왔다면 정말 어려서부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했다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라는 말씀에 그렇게 근심하며 돌아갔을까요? 수년 동안 남에게, 아니 예수님 앞에서까지 자랑할 만큼 계명을 지켜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에게는 그 믿음에 걸맞은 행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재물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회를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던진 두 번째 질문,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온, 아니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왔다고 생각한 부자 청년의 그 믿음이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느냐?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가 이 편지를 보낼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들, 그래서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비참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알면서도 단지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 할 뿐 누구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나누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믿음 안에 살면서도 보통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궁핍한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내 삶 하나도 바꾸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한가요? 우리의 믿음이 교회도 바꾸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가요? 요한1서 5장 4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대박해 가운데 있던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게 주신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와 주로 믿는 그 믿음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게 하나님의 마음, 곧 세상을 향한 긍휼의 마음인 자비를 품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믿음 대로 행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내는 양선의 삶입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앞에 무기력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켜 내기는커녕 도리어 세상의 비난을 받는 것은 바로 자비와 양선의 균형이 맞지 않는 신앙생활, 믿음은 있으나 행함은 없는 죽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말씀인 마태복음 25장 31~46절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세상의 끝도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그 때가 언제냐? 인자 곧 예수님께서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그렇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입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말구유 위에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때 곧 다시 오실 때에는 세상의 심판주의 자격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32~33절에 보면,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사람” 이 말씀 앞에 선 제자들은 어느 편을 원했을까요? 이 말씀 앞에 선 여러분은 어느 편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마지막 심판의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신 걸까요? 대비하라는 거예요.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답은 나왔습니다. 이렇게 살면 됩니다.
나와 함께 이 땅에 사는 내 이웃을 가난하다고, 능력이 없다고 모른 채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눈 감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통의 은혜를 누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와 축복의 열매를 그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리면 먹을 것을, 그들이 목 마르면 마실 물을, 그들이 나그네 되어 방황하고 있으면 찾아가 영접하고, 그들이 헐 벗었으면 입을 옷을, 그들이 병들었고, 옥에 갇혔으면 찾아가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단지 이웃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제하며 주의 사랑으로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바로 이렇게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다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며,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내 삶의 든든함은 내게 있는 소유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드림 이 시작하는 이 한주, 그리고 우리의 남은 삶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자비의 마음을 품고, 양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는 것만큼 살아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렇게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