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3:1-13,22-24/ 롬 5:12-21/ 마 18:1-14
창조절 첫째주일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무로부터 창조(바라bara)하셨습니다(창1:1). 바라창조는 절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엑스 니힐로(Ex-nihilo)’를 뜻합니다. 무에서 시간(태초)과 공간(하늘) 지구(땅, 물질)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가운데 있는 무질서와 어둠의 세상을 아름답고 질서 있고 충만한 세상으로 창조(아사asa)하셨습니다. 아사는 존재하는 물질의 변형이나 변화, 개조를 통한 아름답고 질서 있는 세계창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야탈yatal)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가 에덴동산에 세워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 된 인간이 만물을 다스림으로 온 우주만물이 하나를 이루는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터(질서)가 무너지면(창 3:1-13,22-24)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만물이 하나 되어 아름다웠던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진 이유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동산 각종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6)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질서(order)’의 파괴입니다. ‘질서’는 모든 율법의 터이며 근본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은 무엇을 하랴(시11:3)” 이것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뱀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뱀은 창조주 하나님 뿐 아니라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들짐승입니다. 그것이 질서입니다. 그런데 모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유혹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들짐승사이의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반역’입니다. 인간의 통치 받아야 할 존재가 인간을 통치하려 한 것입니다. 이 사악한 계략에 넘어간 여자는 이제 부부관계의 질서를 깼습니다. 한 몸 된 부부는 서로 상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것이 질서요 원칙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자는 임의로 혼자 결정하고 주도적으로 남편에게 먹게 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고 통치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하나님께 불복하고 항거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묻습니다. “내가 먹지 말라 한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11절) 그러면 “제 잘못입니다.”그래야 그게 순리지요!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저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줌으로 먹었나이다.(12절)” 저 여자를 주신 하나님 실수입니다. 하나님께 불복하고 반항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깬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서는 ‘세 가지 질서(order)’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예배와 순종입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순종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자랑하고 나타내려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상호간에 있어서의 질서는 이웃사랑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율법은 외식이요 의무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과 사물과의 관계는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보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질서요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가르침)의 본질이요 강령입니다. 이것이 무너지거나 뒤집어지면 망합니다. 그래서 이 질서가 잘 유지되도록 주신 것이 율법이요 규범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준수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 율법의 본질인 강령을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 외식적인 의를 이루려 했고, 이웃사랑이 아니라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했으며, 사람 살리는 법 대신 사람에게 무거운 의무의 짐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시고, 참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참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거듭나고 성령으로 사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온유한 자들만이 순종할 수 있는 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검찰공화국”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뿐 아니라, 각료와 비서실에 검찰출신 인사들이 많이 등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법무부 장관은 자신이야말로 법해석을 바르게 한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법을 주관하는 사법기관은 별도로 있습니다. 오히려 대통령과 각료들, 특히 법무부장관은 모든 것을 법조문으로가 아니라 그 법의 강령과 본질에 더 착념해야 합니다. 검찰이 내린 결정에 대해 그것이 한 편을 위한 일인지 온 국민을 위한 일인지,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는 일인지 살리는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떠나 한 편에 경도된 사람이 법을 잡으면 법으로 사람을 잡는 위험을 막아야 합니다. 법으로 사람을 살리고 화해하고 하나 되게 하는 일, 정치(政治)의 바른 의미가 구현되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롬5:12-21)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이 우주는 유기적인 생명체입니다. 한 곳에 큰 변화가 일어나면 온 우주에 그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의 문제도 인간의 죄,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작한 화석에너지의 과도한 소비가 자연파괴와 전 지구적 기후위기를 불러 온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이 불러온 나비효과입니다. 이 위기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장 시급한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모든 재난의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떻게 해야 그 근본적인 치유와 회복에 이를 수 있는지를 논의해야 합니다. 솔직히 현대과학의 결론은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선 것은 아닌가 회의적입니다. 무엇보다 이 우주의 물리학적 법칙은 우주의 멸망을 예기(豫期)하고 있습니다.
1865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88)는 '열의 역학적 이론에 관한 두 가지 기본법칙'을 발표했습니다. 열역학 제 1법칙은,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이요, 제 2법칙은 우주의 ‘엔트로피(Entropy)’는 항상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엔트로피’란 말은 ‘에너지의 변형’을 뜻하는데,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할수록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또한 질서화된 것으로부터 무질서 화된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한 에너지를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시킬 때, 그 에너지는 점점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갑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무질서 분해, 부패, 고통,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엔트로피 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에너지를 방출한 다음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더미로 온 우주가 가득 차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이 우주를 지배하게 된 물리학적 자연 법칙입니다.
그런데 오늘 서신서 본문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온 세상이 죄와 사망가운데 있게 되었다면 이 무너져버린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 또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보내시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15절) 우리의 우주는 그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계속 확장되어간다고 하지만 여전히 닫혀있는 공간입니다. 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엔트로피 현상이 계속된다면 인간의 죄와 자연파괴와 죽음의 현상은 심화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이 세상 안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밖에서,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진정한 구원자가 오셔야 합니다. 이 세상을 새로운 생명과 창조의 세상으로 온전히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시는 분은 첫째 아담과는 전혀 다른 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행위자로 온 세상을 회복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하와와는 달리 마귀의 유혹을 이기신 분, 아담과는 달리 아버지 하나님께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시는 분, 핑계대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첫째 아담과는 다른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새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을 만든다고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보내시는 분은 은 첫째 아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심과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조 된 아담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 범죄함으로 죄와 사망을 짐을 지게 한 아담과는 달리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분, 예수를 통해 새 역사를 창조해 가십니다. 아담 아래 있어서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리가 망하게 되었다면 아담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겠습니까?
서로 하나 되는 하나님 나라(마18:1-14)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세워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는 전 삶을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의지하는 유일한 전부입니다. 부모 없이는 한 순간도 못 삽니다. 아이는 부모의 전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엄마는 아이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여 그를 살려냅니다. 그렇습니다. 엄마도 이미 그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아 살았고 이제는 그 품에 있는 아이를 살려냄으로 삽니다. 이것이 생명의 연결고리입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독생자를 죽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연약한 이웃들을 살려냅니다. 이것이 이 파괴되고 죽음을 향해 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절망에서 구원하시는 새 생명과 구원의 법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엔드로피’의 법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가 되는 “신트로피(Sintropy)의 법칙”도 있다고 합니다. 엔트로피(Entropy)의 반대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인 “신트로피”는 함께syn 라는 말을 더하여 "에너지의 흐름을 수렴시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엔트로피가 물리적 세계의 붕괴를 유발하는 법칙인 반면 신트로피는 생명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생명의 법칙입니다.”(센트죄르지, Albert Szent-Gyorgyi) 놀랍게도 생명체는 물질세계와는 달리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하는 신트로피 법칙이 작용해서 질서도가 오히려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한 세포가 자신을 위해서만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를 위해 서로 함께 에너지를 분출하고 헌신하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가장 연약한 작은 소자를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천하고 약한 한 사람, 사랑하기 어려운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약한 자요 상처받기 쉬우며 그들 곁에 있는 우리에게 그들의 생명이 크게 의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허투루 뱉은 한 마디에 상처를 받고 우리가 내민 작은 사랑에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살려내는 것이 우리 자신을 살려내는 일이요 그들을 실족케 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연자 맷돌에 목을 매 죽이는 일과 같습니다. 내 곁에 있는 작은 소자는 우리가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작은 소자, 그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고 우주공동체를 살리는 일입니다.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사실은 자신과 함께 모두를 죽이는 일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는 곳에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고 세워집니다. 그것은 가장 작은 자를 사랑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