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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4-3) - " 유튜브 말고... " / 송종근 목사

관리자 2019-09-20 (금) 18:27 5년전 2484  

본문) 신 30:1-5, 눅 12:22-34,  골 1:3-14


너튜브(?)의 시대

처음 유튜브라는 콘텐츠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저는 도대체 저 콘텐츠가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양한 영상, 다양한 자료들을 영상으로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꽤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최근의 흐름처럼 유튜브가 모든 콘텐츠를 집어 삼키는 공룡이 될 것이라는 예측은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짧은 소견으로 유튜브는 그저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만화공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유튜브는 가장 영향력 있는 콘텐츠의 제일 윗줄에 올라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정보검색을 할 때도 포털만 뒤지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를 검색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콘텐츠를 갖춘 유튜브는 큰 힘을 갖게 되었고, 많은 청소년들의 장래 희망 중에 하나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등장하는 시대가 된 것이죠. 이처럼 짧은 시간에 유튜브가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콘텐츠가 철저히 시각적 효과를 중심으로 하는 콘텐츠라는 점입니다. 그와 더불어 유튜브는 그 초창기부터 그 내용에 있어서 제약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사 그 올리는 주체가 세계의 적이라 불리는(?) 북한이라 할지라도, 설사 그 내용이 비상식적인 내용일지라도 누구도 통제하지 않고,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자리매김 했던 것이죠. 최근 들어 그 폐해에 대한 문제제기가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우려는 지금껏 유튜브가 기여해 온 순기능이라는 측면을 덮을만한 수준은 아님을 볼 때 오늘날 유튜브는 긍정과 부정의 양날의 검을 가진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보암직의 유혹

그럼 이처럼 유튜브가 우리 사회 전반에, 아니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유튜브가 철저히 시각적 콘텐츠라는 점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시각 매우 민감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에 보이는 시각적 효과는 인간의 의사결정에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범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그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근거로?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죠. 눈 앞에 있는 유혹의 물질에 흔들려 버린 것입니다. 이는 동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우리의 눈’을 통제하지 못하면, 아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하지 못한다면 에덴의 실수, 아담의 죄악은 계속 반복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는 동시에 오늘날 유튜브가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유튜브라는 콘텐츠 안에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한’ 내용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이 때 우리들이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면 밀려오는 ‘먹음직, 보암직’의 유혹 앞에 길을 잃고 허망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안에 산재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의 ‘시선’과 ‘그 시선이 머무는 곳(마음)’에 대해 지적합니다. 우리들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에 우리들의 중심이 있기에, 우리들의 시선이 쏠리는 그곳이 어디냐에 따라 우리들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라

먼저 구약의 말씀을 봅시다. 오늘 신명기 30장의 말씀은 모세가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남긴 당부에 해당합니다. 모세는 앞서 2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 안에서 살 수 있는 방법과 하나님을 떠났을 때 받게 될 저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떠났을 때 다시금 회복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라 명령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황을 전제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상황에 놓였을 때를 상정한 것이죠. 그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결정,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돌아오라!’ 주목할 것은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조상들보다 더 번성케 해 주실 것이다 약속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가운데 살아가면 이 모든 저주와 고난을 상황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지만, 자칫 실수하여 다른 길을 걷다가 주의 말씀이 기억나 돌아오게 되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복으로 채우실 것이다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세오경이 주전 5세기, 바벨론 포로기에 쓰여졌다는 학계의 주장에서 살펴볼 때 더 의미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에서 자신들의 실패 원인을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실패는 그들의 불신앙에서 비롯되었고, 그 결과가 바벨론 포로라는 점을 오늘 말씀이 지적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 대신 이방신을 섬기는 불신앙,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외세에 의지하며, 외교적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온 아픈 현실의 원인이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명기 저자는 출애굽의 은혜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돌아오라’ 권면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청종했던 그 옛날 출애굽 때의 신앙을 회복하면 조상들이 얻었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영광으로 채우실 것이다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풍요의 땅 애굽을 버리고, 황량한 광야로 나온 출애굽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지금의 위기, 바벨론 포로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열쇠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서는 잘못된 시각에 사로 잡혀 징계 받은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오늘 예수께서 지적하시는 염려의 출발점, 바로 안목, 시선입니다. 우리 눈앞에 놓인 현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염려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눈 앞에 곳간이 비어 있고, 의복이 헤어졌으며, 머리 둘 곳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사실 그 현실을 무시하고,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 그 현실을 딛고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한 번만’, ‘조금만 더’를 외치며 타협하고 있습니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목 아래 아무렇지 않게 주일을 범하고, 예배 보다 내 일에 더 집중하고, 언제나 주님만을 외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2순위, 3순위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노력을 중단하면 망할 것 같으니까, 더 큰 어려움을 당할 것 같으니까,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으니까 세상을 향해 뻗은 손,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시며, 세상 대신 하나님만 보라, 하나님만 의지하라 귀가 아프게 이야기 하시지만 정작 우리들은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한 번 만요’ ‘조금 만요’를 외치며 양다리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서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반문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우리가 할 일은 눈 앞에 놓인 현실에 매여 염려하며 살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출애굽 했던 백성들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믿고 의지함으로 만나와 메추라기의 은혜를 입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 앞에 놓인 현실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말씀에 의지하여 그 뜻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 만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는 열쇠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죠. 

너는 내 아들이라

이런 예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머뭇머뭇하며, 갈등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까마귀를 생각하라’ ‘백합화를 생각하라’ 지적 합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까마귀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는데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겠느냐? 반문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백성이라. 너는 내 것이라.’ 두 번 세 번 선언하고, 약속하시는데 우리는 그 때마다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만 바라보다 바닥에 이르러서야 ‘정말요?’ 되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집 떠난 둘째 아들과 같은 걱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우리들을 향해 오늘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안타깝게 부르십니다. 그런 면에서 서신서의 말씀은 이 거룩한 원리를 붙들고 나가는 초대교회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오늘 골로새서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에바브라가 복음을 전한 골로새 교회를 향한 편지입니다. 사실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이 전도하지 않은 교회들의 경우 자신들이 과연 바른 복음,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죠. 그런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오늘의 편지를 통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에바브라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습니다. 불안해 하는 성도들에게 걱정하지 말라, 잘하였다 안심시키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당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한 시점에 골로새 지역은 큰 지진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교회 내적으로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 율법주의자들로 인하여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했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초신자들은 시험에 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제로 많은 초신자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찾아오는 작은 시련과 고난에 무너져 신앙생활을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니까요. 오늘 골로새 교회의 상황도 딱 시험에 들기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외적으로 지진, 내적으로는 혼란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믿음의 반석에서 견디고 있음을 오늘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 들었다 고백합니다. 시험이 찾아왔는데 그 시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으로,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며 사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성숙한 믿음을 칭찬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인도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 안에 충만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 예수로 말미암아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안목의 정욕을 이기고, 시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영광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을 향한 칭찬에 머물지 않고, 그들을 향한 권면을 덧붙입니다. 멈추지 말고 더 열심히 신앙에 정진하여 거룩한 열매를 맺어가라는 것이죠.


명성교회 

한 때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명성교회를 생각합니다. 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가 되고 화제가 되었습니까? 그들이 마치 그 옛날 에덴의 선악과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선에는 명성교회가 하나님의 장자처럼 보였고,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누린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복의 기준은 물질, 권력, 명성이니까요. 그런데 명성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도구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그 옛날 바벨탑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세우고자 했던 죄악과 교만의 상징, 바벨탑. 그 바벨탑을 세우던 이들의 모습이 명성교회 사태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단 10명이 없어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재정도, 성도의 숫자도 아닙니다.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돈입니까? 사람입니까? 외모입니까?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사람이 없으니 그 거대한 성읍 소돔과 고모라도 한 줌 재로 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그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성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안목의 정욕에 빠져 겉모습을, 환경과 조건을 중요시 하고 있느냐? 

현실적 걱정에 빠져 언제나 염려하고 있느냐? 

눈 앞의 고난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느냐? 

중요한 것은 거룩한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요, 창조주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의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충성, 인간을 위한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높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말씀 듣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고, 

그 말씀 전하고 증거하며 살아갈 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며, 

그 말씀 듣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죄사함의 은혜를 입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정보의 홍수시대입니다. 지금도 자판 몇 번만 두드리면 수없이 많은 정보와 자료들이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그 안에는 바른 정보도 있지만,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정보도 많습니다.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컨텐츠라는 유튜브에도 수많은 정보가 존재하고, 많은 성도들도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 거룩한 말씀을 찾아 공부하고 묵상하기보다는 손쉬운 유튜브에 의지하여 신앙적 궁긍증을 해소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 유튜브의 영향력에 깊숙이 빠졌고, 생각 없이, 분별없이 찾아본 유튜브 컨텐츠는 우리를 더 깊은 혼란과 혼돈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란 유튜브를 보며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쏠린 우리들의 시선을, 너튜브에 쏠린 우리들의 시선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릴 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우리에게 충만할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신명기의 외침 가슴에 품고 돌아서서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공, 거룩한 약속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성도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너튜브 – 특정 콘텐츠인 YouTube의 ‘You’를 한글 ‘너’로 바꾼 방송용 신조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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