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26:1-11/ 롬12:1-8/ 막6:30-44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이 지상에서 만들고자 하셨던 첫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에덴동산이라는 지상의 영토가 있었고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며 그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장 단출한 하나님 나라의 법(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이 있었지요.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첫 하나님의 나라는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이 지상에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왕국”이었습니다. 평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았던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 허벅지 관절이 깨지며 얻은 새 이름이 “이스라엘(하나님이 주도하는 자, 하나님이 다스리는 자란 뜻)” 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노예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시내산으로 이끌어 하나님 나라의 법을 주시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그의 통치를 거부함으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또 다시 이 지상에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하신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임하시고 가시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질병과 귀신과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의 새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의 수가 다 차지 못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하고, 우리의 몸은 부활의 몸,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이 땅은 새 하늘 새 땅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완전히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성취는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 백성
처음부터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교회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고대하고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이 땅이 빨리 무너지고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좋습니다. 망하게 될 이 세상을 변화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빨리 우리 영혼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소망하며 우리 몸으로 매일 부딪치며 사는 현실적인 삶을 부정합니다. 직장생활은 적당히 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필요한 만큼만 하고 교회생활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세상에 투자하던 것을 저 세상에 투자하는 것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 자기 세상”으로 만들려고 애쓰듯이 이런 사람은 “저 세상을 내 세상”으로 삼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이 땅에 오심으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성취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준비합니다.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합니다. 내가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갑니다. 아픔과 상처가 있는 내 가정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룩한 나라로 만들고, 갈등과 대립 속에 있는 내 주변사람들 가운데서 평화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며, 긴장과 경쟁가운데 있는 내 직장을 서로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며 살아갑니다. 매 순간 나를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며 삽니다. 이들은 이 세상을 내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듯 모두를 존중하고 섬김으로 존중 받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듯 모든 원수를 사랑함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우리 모두의 세상으로 만들려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자기 세상으로 만들려는 데 집착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백성, 새 사람,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 새 백성은 이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일함으로 참 쉼을 얻는 하나님의 나라(막6:30-44)
이 세상은 쉴 틈이 없습니다. 쉬면서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내가 쉬기 위해 남에게 일을 전가합니다. 누군가 내 일을 해야 쉴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휴가를 받으면 누군가가 내 일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아내가 해외에 나가면 아내의 일을 남편이 맡거나 다른 식구가 맡아야 합니다. 내가 편한 것은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일등을 하면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내가 편하기 위해 끝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은 매우 특별한 삶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쉼을 주기 위해 땀 흘려 섬기는 그 일을 “나의 안식과 쉼”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일하지 않고 놀러 다니는 것만이 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하는 것을 참 쉼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고단한 선교사역 이후에도 전혀 쉴 수 없었던 제자들이 또 다시 굶주린 사람들을 섬기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막6:30-44) 선교사역 후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께 보고합니다.(30절) 예수님은 피곤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서 쉬라고 하십니다.(31절)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셨지만 그곳에는 이미 소문을 듣고 먼저 와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33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쉴 곳도, 쉴 시간도 없었습니다. 어디가든 고달픈 삶에 지쳐서 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쉴 곳, 쉴 틈이 없습니다. 쉬러가도 그곳에는 상처받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몰려온 자들을 보며 목자 없는 양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며 가르치셨습니다.(34절) 그리고 제자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다시 일어나 그들을 먹일 것을 찾고 주님이 주시는 기적의 떡을 나누어 주는 일에 다시 헌신합니다.
목양하는 목사는 못 쉽니다. 해외로 휴가가도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병상에 있는 성도를 떠나지 못합니다. 시험에 들고 많은 사람에게 근심을 주는 성도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하나님 곁으로 부르실 때까지 목사는 쉴 틈도 쉴 곳도 없습니다. 평생 목양하는 성도들 곁에 있고 그 고통 속에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출산한 엄마는 쉴 틈이 없습니다. 내 몸 돌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갓난아이를 돌보는 일은 낮에도 밤에도 쉴 틈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요 엄마는 아이의 천사 같은 미소 때문에 힘이 생깁니다. 아이의 옹알거림 때문에 행복합니다. 젖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며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애기를 맡기고 휴가를 내는 엄마는 없습니다. 애기 키우는 일이 힘들지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언제, 어디서 쉬어야 합니까? 목사가 쉴 때, 쉴 곳은 없습니다. 오직 성도들을 위로하고 세우고 기도하고 섬기는 일로 쉼을 삼아야 쉴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다 죽었다 소생하는 기쁨으로 살고 목사가 설교하는 말씀을 먹고 성숙해지고 세상의 유혹을 분별하며 거룩한 성도가 되어가는 감격으로 새 힘을 얻고 쉼을 얻어야 합니다.
사랑을 양식으로 삼는 하나님의 백성(롬12:1-8)
이 세상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내 양식으로 삼습니다. 내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몫을 더 많이 챙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많은 사람보다 높아졌다는 것은 나로 인해 낮아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와는 다른 삶의 방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웃과 경쟁하며 이웃보다 앞서서 내 양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삶을 내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참되게 산다는 것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빠진 삶은 이미 죽은 삶, 의미 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살고 사랑을 먹어야 배부르고 만족하며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12:1) 하나님의 그의 자녀들에게 받으시기를 원하는 “거룩한 산제사”는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삶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 몸은 각 기관과 조직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지 않는 순간 우리 몸은 죽습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모든 세포들과 조직, 기관이 상호 유기적인 사랑과 섬김 가운데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은 3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포들은 수없이 죽고 새로 생성이 됩니다. 죽는 세포보다 새로 생기는 세포가 많으면 성장합니다. 반대로 새로 만들어지는 세포보다 죽는 세포가 많으면 노쇠해 집니다. 많은 세포들이 죽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몸이 상처를 입거나 사고를 당해 타살(네크로시스)로 죽는 세포들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세포는 많은 수분을 순식간에 흡입해서 터져죽습니다.(염증) 그런데 스스로 자살하는(아포토시스) 세포도 있습니다. 우리 몸과 다른 세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타살로 죽는 세포는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서 붓고 터져죽는데 반해 스스로 죽는 세포는 수분이나 양분을 흡수하지 않고 쪼그라들어 죽어 마침내 주변의 세포들이 그 세포의 영양분을 흡수하게 합니다. 세포가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이 죽는 것이 전체 개체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던져 전체를 살리는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입니다. 내가 너를 섬김으로 섬김을 받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받습니다.
어제 우리 교회는 김장을 했습니다. 이틀 동안 김치 재료를 씻고 다듬고 썰고 절이고 양념을 만들어 섞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인 배추에 양념을 골고루 발라서 김장을 마쳤습니다. 이번 김장에는 새로 나온 성도들이 많이 참석해 주셔서 더 훈훈한 섬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봉사하러 오면서 떡도 싸오고 음료수도 가져오고 고기도 사옵니다. 김장하는 날은 모두 분주하게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합니다. 쉴 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하는데 놀라운 에너지가 식당 안에 충만합니다. 심령 대부흥회를 하는 것처럼 뜨겁습니다. 행복한 미소가 넘칩니다. 사는 맛이 납니다. 김장봉사는 수고가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심령이 배불러지는 사랑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나눔으로 풍성한 하나님의 자녀(신26:1-11)
우리가 가진 것은 그 무엇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내 건강, 내 재능, 내 소유, 내 생명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 거저 받은 은혜요 다 선물이며 다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두가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주신 것이요 우리의 도움과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이 내 것이 될 때부터 우리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내 것이 되면 감사가 사라지고 내 것이 되는 순간 서로 자신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짓지 않은 집을 얻었고 쌓지 않은 성을 얻었으며 경작하지 않은 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추수를 하고 얻은 첫 곡식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소로 가지고 와서 이 곡식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열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십니다.(1-10절) 그 열매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그 열매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순간 내 욕망의 도구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추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11절) 그 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자로 자기의 상업이 없는 ‘레위인’과 생존에 필요한 양식과 거주지가 없는 ‘나그네’와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때가 저물어가자 모인 무리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서 음식을 사먹게 하자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빈들에 모인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막6:37) 제자들은 살 돈 없다고 말하지요! 돈 없어요, 시간 없어요, 바빠요!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알아보라”(막6:38) 오병이어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입니다. 주님은 그거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돈 없다고 하지 말고 작아도 있는 것을 내 이웃을 위해 내 놓고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지만 내가 가진 것을 서로 내놓아 섬기는 나라입니다. 거기에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번에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 대통령으로부터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남수단 국가 훈장을 받았습니다. 의사인 한 신부가 외롭고 가난하고 병든 남 수단에 가서 자신이 가진 사랑을 나누다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많은 젊은이들이 일어났고 남수단의 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손길이 크게 번졌습니다. 이태석 같은 의사가 되고 사랑의 사도기 되겠다고 남수단의 청년들이 한국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놓고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오병이어의 기적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새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