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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10-2) - " 평화의 세상 만들기 " / 김진수목사

관리자 2018-11-02 (금) 18:52 6년전 5113  

본문) 삼하23:13-17/ 약4:1-10/ 마19:34-39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은 본래 평화의 세상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은 평화의 동산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화평했고 그의 아내 하와와도 화평했으며 모든 자연만물과도 화평한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의 사유(私有)를 금하셨고 이 하나님의 금령(禁令)이 지켜지는 한, 에덴동산의 평화는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고 뱀의 유혹에 빠졌으며 마침내 선악과를 사유화함으로 하나님과 그의 아내와 모든 만물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늘 불화와 다툼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4:1)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사유화 하려는 마음, 서로 먼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때문에 이 지구상에는 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얻는 평화

 

어떻게 해야 이 끊임없는 불화와 싸움의 세상에서 참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마10:38-39) 즉,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욕을 버림으로써 평화는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평화를 깨는 것이 사실은 이기적인 사랑, 왜곡된 애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처자식 살리려고 강도짓을 하고, 자신의 노름 빚 갚으려고 은행 현금지급기를 털어갑니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충성하려고 국민을 속이고 자신이 속한 정당의 유익을 위해 거짓을 말합니다. 살인을 한 자도 무엇인가를 위해서, 즉,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이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그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부여된 무거운 사명, 내게 아픔을 주지만 감싸고 사랑해야 할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는 것, 즉 자신의 유익, 즉 사욕(私慾)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그렇습니다. 아무리 충성해도 자신의 사욕을 위한 충성,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자신을 위한 사랑은 결국 싸움과 갈등, 대립을 불러오고야 말 것입니다. 흉악한 범죄자도 자신의 아들에게는 한없이 선한 아버지 일 수 있습니다.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독재자라도 가정에서는 선한 아버지, 교회에서는 충성된 교인일 수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갈등과 싸움은 다름 아닙니다. 자기 사욕, 자기 사랑을 모든 것보다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욕을 뽑아버리지 않는 다면, 자신의 사욕을 죽이는 일이 없다면 참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무엘 下書에는 다윗이 그의 말년에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삼하23:1-7)에 이어서 다윗과 평생 함께 하면서 충성을 다하였던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과 그들의 업적들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충성된 용사들 세 사람과 그들의 용맹성이 드러나는 한 에피소드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삼하23:13-17) 이 용감한 세 용사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다윗에게 나아온 사람들입니다.(삼상22:1-2) 그 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윗이 간절히 소원하는 말로 “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라는 소리를 이 세 용사가 들었습니다. 지금 다윗의 용사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서로 대치해있는 전시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세 용사는 다윗이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블레셋진영을 돌파하여 들어가 베들레헴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 물은 실로 생명을 걸고 가져온 것입니다. 얼마나 충정어린 용사들입니까?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은 이 에피소드를 충성된 사람들의 목숨을 건 헌신으로만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지금 다윗은 그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말과 함께 충성된 신하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본문이 말하고자하는 전부 일까요? 그것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을 찾아 볼 수는 없을까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오가는 긴박한 전장에서, 더구나 모두가 피곤하고 배고프며 목말라있는데,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고향의 우물물을 한번 맛보고 싶다는 다윗이 소원하는 바가 정당한 것인지를 짚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사실 얼마나 사적이며 이기적이며 사치스러운 욕망입니까? 만일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려 한다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의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겠습니까? 과연 장차 수많은 백성들과 병사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할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합당한 소원일 수 있을까요? 헌신된 용사들의 행위도 제 눈엔 도가 지나쳐 보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의 무모한 시도가 실패한다면 다윗과 자신들의 생명은 물론 아둘람 굴에 은신해 있는 수 백 명의 가족들의 생사에도 큰 피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다윗이 제 정신이 돌아와 지도자로서의 평정심을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으로 인해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베들레헴 우물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17절) 만일 다윗이 생명 바쳐 가져온 이 물을 마셨더라면 더 이상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이 아닙니다. 자신의 개인적 사욕에 취한 이기적이며 탐욕스런 군주가 되고, 시원한 베들레헴 물이 아니라 자신과 나라를 망치는 독배를 마신 자, 결코 먹어서는 안 될 금단의 열매를 입에 댄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 “이기적 사욕”에 대한 철저한 뉘우침과 회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견고했던 왕국을 결코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욕(私慾)에 대한 이 회개는 충직했던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탐했다 엎드려 회개했던 사건과 함께 다윗의 생애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또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싸워서 얻는 평화

 

참 평화를 얻는 또 다른 방법은 싸움을 통해 얻는 방법입니다.(약4:1-10) 평화는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파괴하는 적들과의 치열한 투쟁과 싸움을 통해 얻을 수 있고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망합니다. 악한 생각이 떠오르고 게을러지고 악한 육체의 본성에 사로잡힙니다. 어둠의 권세에 한 순간 노예가 됩니다. 매일 매순간 싸워야하고 대적해서 이겨야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평화를 파괴하는 세상과의 싸움입니다.(약4:4절) 여기에서의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한 세상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세상은 마귀의 통치 아래 있는 세상, 죄와 정욕에 오염된 풍조로 가득한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이기적인 쾌락을 쫓는 육신의 정욕과,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을 탐하는 안목의 정욕과, 영원한 것 대신 무너질 이 세상의 것을 탐하는 이생의 자랑”을 지향합니다.(요일2:16)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욕망은 결국 서로 싸우고 갈등하고 다투고 전쟁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평화의 세상을 파괴하고 무너뜨립니다.(약4: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든지 이 세상에 속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세상에 속하는 일은 애쓰거나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그동안 우리가 소속해 있었던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마3:2, 4:17) 회개는 그동안 속해있던 세상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 세상과의 싸움이요 전쟁입니다. 그곳에서 나와야 하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은혜로만 저절로 되는 구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생소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우리 편에서 이루어야 할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빌2;12) 죄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없는 회개는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면(약4:9) 그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 안에서 시기하실 만큼 사모하시는 성령께서 도우시고(약4:5)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십니다.(롬8:26)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하게 하십니다.(약4:7) 

 

220Kg이나 되는 바벨을 들어 올리는 장미란 선수를 TV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 무거운 바벨을 쉽게 웃으며 못 들어 올립니다. 한 순간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 올리는데 그 순간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온 힘을 농축한 외마디 탄식소리였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그 외마디 소리에 쏟아서 들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온 몸에 가해지는 거대한 중력에 순응하지 않고 그 산 같은 무게에 주저앉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래로 내려 쏠리는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는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를 결코 굽히지 않고 끝까지 참아내며 그 단말마적 탄식소리를 토해냈습니다. 갑자기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슴 떨리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탄식 소리가 제게 강하게 질문하시는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오늘 네게 이 치열한 싸움의 탄식소리가 있느냐? 어떤 협박과 고난이 있다 해도 결코 더러운 죄악을 수용하지 않고 거부하며 이를 악물고 토해내는 탄식의 소리가 있느냐? 네 썩어질 육신의 정욕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느냐? 어떤 시련이 와도 세상의 타락하고 더러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살아가고 있느냐? 너는 너무 편안하고 안일하지 않느냐? 잘 먹고, 잘 쓰고, 잘 자고 그러다 망하려고 하느냐? 더 이상 TV를 볼 수 없었고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종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

 

평화를 파괴하는 또 다른 대적은 ‘가족종교’입니다.(마10:34-39)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매우 위험한 현상을 ‘가족종교’ 현상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가족종교’는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가족주의’(familism)와는 다르고, 반대로 사회의 이익보다는 자기 가족의 이익을 우선하는 ‘가족지상주의’와는 공통된 부분이 있으나 그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제가 ‘가족종교’라고 칭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family)의 외연을 넓힌, 보다 큰 가족(Family)인 자신이 소속한 가족집단에게 집착하고 복종하며 숭배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착하고 성실합니다. 교회에서 충성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소속된 그 집단에 들어가면 그 집단의 성향에 자신을 예속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자신의 집단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합니다. 결국 ‘가족종교’는 자신이 속한 가족집단을 우상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족까지 다셨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평화를 조장하는 ‘가족종교’의 우상을 깨뜨리라 하십니다. 가족을 포함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무조건 예속되고 복종하며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소속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소속된 집단에 성실해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그 집단의 권위자를 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최종적인 권위의 말씀으로 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속한 집단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위의 말씀에 반하고 거역한다면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그들의 불의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일입니다. 거짓 화평을 몰아내고 참 평화를 세우는 일입니다. 오래 전 국정원 댓글사건의 특별수사 팀장이었던 한 검사가 국정감사 증언대에 서서 말했던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자꾸 머리에 남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의 증언과는 달리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한 의원이 그의 발언을 문제 삼아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 끝에 나온 말입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일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본질은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가 속한 가족집단(Family)에 나를 예속시키고 복종하며 우상화하는 ‘가족종교’ 때문이 아닙니까?

 

이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희생을 전제합니다. 희생 없이, 자기 포기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늘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신의 사적 유익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한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고 하십니다. 참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가 복이 있습니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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