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20:1~21, 빌 4:8~9, 막 12:28~34
1. 가을, 생각의 계절
1) 삶을 결정하는 것
우리가 사는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밖으로 표출되게 되어 있다. 언어도 행동도 가치관도 추구하는 내용도 모두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때로 내 생각과 다른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 생각이 삶의 내용과 수준을 결정한다.
2) 비극의 중요성
가을은 사계절 중 세 번째이고, 인생으로 치면 이제 삶의 정점을 지나 후반기에 접어드는 시기다. 자연 만물이 결실하는 축제와 감사의 절기이기도 하지만, 다 거둔 논밭에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썰렁한 기운만 감도는 쓸쓸한 계절, 이제 곧 다가올 겨울(죽음)을 피부로 느끼는 슬픈 계절이기도 하다.
봄은 봄대로 싱그럽고 여름은 여름대로 생명의 기운이 활발해서 소중하지만 가을은 가을대로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절기라 매력적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삶의 진실은 경쾌한 웃음보다 눈물과 탄식이 어린 비극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합 예술이면서 거의 유일한 예술인 연극에서 오이디푸스 같은 비극을 공연했다. 비극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 앞에서 좌절하고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역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비극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 속에 놓인 슬픔을 바라보고 비극을 통해 눈물 흘리고 슬픔에 공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화(카타르시스)하게 된다.
비극은 슬프지만 인생과 역사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반대로 희극은 가벼운 웃음을 자아내어 삶의 활력소를 주지만 서양에서는 중세까지 희극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그래서 수도원 연쇄살인 사건의 동기가 바로 사람을 가볍게 만드는 웃음으로 설정했다. 희극은 근대적 코드다.
서양 중세 말의 정신을 지배했던 단테의 ‘신곡(神曲)’은 원래 뜻이 비극이 아닌 희극, 코미디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주인공이 대개 죽는 것으로 끝나는데 단테의 신곡은 주인공이 죽지 않기 때문에 비극이 아니라 희극(Comedy)으로 분류한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느끼는 코미디와는 다르다. 그런데 단테의 신곡은 단순히 웃고 해피엔딩으로 마치는 희극이 아니라 인생과 역사에 대한 심원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에 신비한 희극 – 신곡(神曲, Divine Comedy)이라고 했다.
3) 로댕, 생각하는 사람(지옥의 문 부분), 100*396*776cm, 1880~1917년, 로댕미술관
1년 내내 단테의 신곡에 사로잡혀 있었던 조각가 로댕은 첫 번째 지옥 편에 묘사된 장면을 거의 8m에 이르는 벽에 조각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이 작품을 만들고 고쳤다. 전체적으로 신곡에 묘사된 대로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두렵고도 참혹한 모습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죄로 가득한 그들의 삶을 200여명의 인물을 통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왼편의 사람들은 특히 육체적 쾌락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인 것 같다. 지구상 생명체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본능 이상으로 쾌락을 즐기고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는 존재인 인간은 환락을 향해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 이로 인해 영원한 고통의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이 쾌락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특히 평생 육체적 환락에 빠진 사람들이 도달하는 지옥은 고통, 공포, 울부짖음, 탄식 속에서 끝없는 후회와 절망만이 짙게 내려앉아 있다. 단테 신곡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가 있다 ;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 지어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한 사람이 깊은 고뇌에 빠져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미간엔 잔뜩 힘을 주었고, 오른 손등을 턱에 괸 채 끝 모를 사색에 잠겨 있다. 밝고 행복한 사유는 아니리라.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격하며 평화를 사유할 수는 없다. 그의 양 어깨, 팔, 옆구리의 근육이 긴장한 채로 팽배하여 뒤틀려 있다. 특히 발가락까지 잔뜩 힘을 주어 웅크리고 있다. 그의 고뇌는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통해 저 끝 발가락까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시인(Poet)’으로서 단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로댕은 나중에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으로 별도 제작하였고, 이것 외에도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 중 걸작이 많아서 나중에 각각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온 삶으로 몸부림치게 하는 고뇌거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러기에는 너무 가벼운 시대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우리 모두는!
2. 바울의 눈물
1) 빌립보교회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두 번째 선교여행 중에 세운 교회이면서 유럽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라고 한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잊을 수 없는 교회다. 아무 것도 없이 믿음 하나만으로 선교하는 바울을 위해 빌립보교회는 여러 번 재정적 후원을 함으로써 바울이 선교를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자신의 상황을 전하고 또 후원해주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하고 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를 향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여러분 모두를 마음에 두고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빌 1:3~4/표준새번역)
참 아름답고 부러운 고백이다.
2) 바울의 상황
오늘 빌립보교회를 향해 깊은 사랑의 글을 쓰는 바울은 갇혀 있다.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고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불안한 상황이다. 선교의 상황은 만만치 않고 이를 수행해야 할 여건은 늘 부족하기만 하다. 어렵게 개척한 교회들은 안팎으로 이런저런 문제에 봉착해 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자신은 갇혀 있다. 답답함과 불안함, 그리고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걱정이 글에 스며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는 눈물이 묻어 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8)
3) 원인과 호소
초대교회는 어느 곳에서나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교회를 혼란에 빠트렸다. 교회 직분자들은 바로 이런 교회의 혼란을 막고 교회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바울의 복음과 달리 율법주의자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교회에 전함으로써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 대해서도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빌 3:19)
이처럼 왜곡된 복음은 온전할 수 없고 곧 멸망에 이를 것이다. 왜 이들은 멸망에 이르게 될까? 왜 이들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그릇된 내용을 가르쳐서 주님의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이 땅의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못 박는다.
3. 무엇을 생각할까
1) 생각이 개인의 삶을 결정짓고 당대의 통념이 그 시대를 평가한다.
우리들 개인은 스스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 30년 쯤 후에 역사는 이 시대를 무엇이라 평가할까? 땅의 것만을 생각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뜻과 거슬리는 짓을 하는 이들과 이들의 악영향으로 올바른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는 빌립보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진정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4~9)
8절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것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명예로운 것,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다!
2)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 생각에서부터 참되고 경건하고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명예롭고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로 채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 이런 모습이면 굳이 어렵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시대정신, 시대의 문화란 마치 공기와 같다. 공기가 맑으면 굳이 좋은 공기 마시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공기가 미세먼지나 매연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이런 공기를 들이마시지 말고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오늘의 시대는 우리를 온갖 탐욕과 쾌락의 죄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 TV, 인터넷, 핸드폰, 광고, 영화, 만화, 스포츠, 도박 등 수많은 요소들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시대에 가만히 넋 놓고 있으면 그대로 시대의 죄악에 오염되어 고통의 현장으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믿음으로 잘 활용하면 바울이 열거한 생명의 삶을 살기에 유익하다는 점이다. 교회 단톡 방을 통해 아침마다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 수 있다. 교회 홈 페이지나 유튜브, 페이스북, 팟빵 등에 들어가면 우리교회 설교와 찬양을 들을 수 있다. 무거운 성경을 들고 다니지 않고도 폰을 통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찬송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느냐가 내 내면을 채워가는 것이다.
3) 일 년 중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을은 생각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인생과 역사를 결정한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삶, 주님의 기도, 주님의 고뇌, 주님의 눈물, 주님의 희망을 생각하자. 내 머리에서부터 발가락까지 온 몸이 꿈틀댈 정도로 격렬하게 주님을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다. 가을은 그러기에 너무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