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17:5-8/ 엡6:10-20/ 마6:25-34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복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바라보다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모든 것 다 잃어버려도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가다 복을 받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에 집착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로부터의 자유’를 소망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을 떠나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질 때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손에 있던 재산은 한 순간 모래알처럼 다 빠져나가고 말았고 아버지로부터의 자유는 가장 하찮은 일에 붙들린 노예가 되는 길로 걸어가게 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물질은 인간을 부패하게 하거나 자신의 삶을 낭비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세상과 욕망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탕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소중한 아버지’를 얻었습니다. 자신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자신의 죄를 묻지 않고 다시 아들의 지위와 권리를 회복시켜주시는 “금보다 귀한 아버지”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큰 아들은 아무 것도 탕진하지 않은 아들이었지만 사실은 모든 복이 되시는 ‘아버지를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을 몰랐고 ‘아버지의 큰 은혜’를 모르는 사람, 참 복을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이 복을 받습니다. 그가 있는 모든 곳이 밝고 풍성해 집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 가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사람(렘17:5-8)
이 시대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성숙한 세계(Die Mȕndigewelt)를 만들려고 합니다. 문명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나 간섭 없이도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보다 완전한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정신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빠를 의지하고 어려워지면 엄마에게 달려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장성하면 부모를 떠납니다. 이제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듯 이 시대는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살아가려는 시대, 인간의 이성과 과학과 문명으로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며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성숙한 시대’(D. 본회퍼)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기위해서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힘을 합해서 큰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살고 큰 덩어리가 되면 하나님 없이도 큰 힘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 도움 없이도 양식과 부를 축적할 수 있고 무소불위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제국들이 일어났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들은 온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노예로 삼고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취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모든 나라들의 로망은 거대한 제국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군대의 수를 늘리고 마병의 수를 크게 하는 일을 막으시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제국에게 멸망당할 위기 앞에 있는 남왕국 유다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거부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주변나라들의 바알종교와 우상들에게 빠졌습니다. 외교적으로는 강대국들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세우고 지키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웃나라를 더 의지했습니다. 굿바이-여호와!!를 외쳤습니다. 이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는 두 개의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믿고 사는 길입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힘과 권세를 의지하여 이방사람들을 의지하며 사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저주와 파멸이 온다는 것입니다.(17:6) “여호와에게서 떠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5절) 그러나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복을 받아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의 길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7-8절) 여호와를 떠날수록 세상에 결박당하고 여호와께 붙들릴수록 세상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자유하며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뜻을 따라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환난을 이기고 위기를 극복하며 고난 속에서 더 놀라운 일을 창조하며 살아가는 복을 받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편 1-2)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노예와 같은 예속 상태를 강요하여 어디엔가 의지해야 하는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을 만들어 낸다고 보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이런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주체성과 자유를 회복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인간, 즉 초인(超人)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외면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이었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삶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50세가 채 못 되어 11년 동안 정신병을 앓으며 어머니와 누이의 보호를 받으며 살다 죽었습니다. 그의 이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 한 초인의 삶을 사는 것이었지만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결코 자유 할 수 없었고 그것을 초월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따르지 않고 싸워 이기는 그 사람(엡6:10-20)
본회퍼 목사는 그의 책 ‘윤리’에서 돈키호테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비유했습니다. 그는 녹슨 칼을 가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여읜 말을 타고 무모하게 창을 휘두르며 다니는 돈키호테의 모습이 오늘 성인된 세계, 하나님 없이도 사는 시대의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사는 세상이 되었는데 교회는 여전히 케케묵은 옛 무기들을 가지고 이 세상을 대결해보고자 한다는 것이지요. 겨우 죽음과, 질병과 삶의 위기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과 맞서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 무기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출생하고 세례 받고 결혼식하고 장례식 할 때만 잠깐 교회에 나와도 될 수 있으니까요! 오늘 이 시대는 이 시대의 무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 세계의 삶의 한 복판에서 이 세상이 안고 있는 절박한 문제들과 대결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놀랍고 복된 영적 병기들은 놀랍게도 우리 가까이 있던 것, 그러나 오랫동안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마귀가 우리에게 불편하고 별 효력 없으며 무겁기만 한 낡고 쓸모없는 무기라고 속삭였던 것입니다. 낡고 무겁기만 하고 별 효력이 없으니 그만 집어던지라고 말했던 무기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놀라운 영적 병기들을 무장해제 시켜 저 무관심의 낡은 창고 깊숙한 곳에 던져버렸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진리의 허리띠요, 의의 흉배요, 복음의 신이요, 구원의 투구요, 믿음의 방패요, 성령의 검입니다.(13-17절) 지금 이 시대는 한 순간에 교회를 확장시키는 교회성장학이 필요하며 놀라운 기적과 은사와 능력이 필요하며 사람들을 한 순간에 모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찬란한 현대 무기들이 필요하다고 마귀는 속삭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비해 주셨던 하나님의 전신갑주만이 악한 세력을 대항하여 빛을 발하고 모든 어둠의 적들을 결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권세 있는 유일한 영적 병기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전신갑주를 입어야 세상과 맞설 수 있고 대적할 수 있으며 회피하지 않고 싸울 수 잇습니다. 이것을 벗는 순간 항상 마귀의 밥이요 어둠의 세상권세의 먹잇감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진리의 허리띠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매일 끊임없이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사고방식, 삶의 방식이 이 성경 말씀으로 새롭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씀의 눈으로 보고, 말씀으로 해석하며 말씀으로 갈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깁니다. 의의 흉배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마귀의 밥입니다.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감격과 감사로 그 희열로 일어서야 합니다. 모든 게 은혜요 감사로 보여야 승리합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은 온갖 대적들, 우리를 미혹하는 것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병사의 발은 신으로 보호해야 어디든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아십니까?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의 믿음을 보호하는 첩경이며 수많은 유혹에서 우리를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음의 방패는 불화살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 줍니다. 수많은 환난은 이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첩경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며 반드시 마지막까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구원의 투구를 써야 우리를 좌절시키는 세력으로부터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대적이 공격해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대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나온 성경전체의 진리와는 다른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검, 성령으로 우리 손에 쥐어진 말씀입니다. 루터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손에 쥐어주셨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으로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감동으로 내려주신 롬13:11으로 회심했고 하나님께 평생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병기들을 우리 몸에 착용할 수 있습니까?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허리에 띠고 의의 흉배를 가슴에 붙이고 복음의 신을 발에 신을 수 있습니다.(18-20절) 하나님의 전심갑주는 원수를 이기게 하고 위기를 극복하게하며 세상을 정복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염려대신 먼저 그 나라를 위해 사는 그 사람(마6:25-34)
마귀는 당장 먹을 것, 급한 것에 매달려 정신없게 만듭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얼마나 급합니까? 당장 몸이 아픈데, 당장 집안에 문제가 생겼는데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해도 해도 끝없는 일에 날마다 붙들려 있습니다. 일하고 또 해도 여전히 일감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 끝나면, 이일이 해결되면, 우선 숨쉴만하면 주의 일을 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결코 안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생 일하고 해결해도 일은 끝없습니다. 마지막 죽음이 닥칠 때까지 정신없이 눈앞에 급한 일 하다가, 나중에 하겠다던 가장 중요한 일은 결국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십시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실마리를 찾아야 실타래가 풀립니다. 우리는 결코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주의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채워집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위해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먹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백성을 인도하라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기 위해 출애굽하는 백성들에게 애굽사람들의 금은보석을 가지고 나오게 하셨습니다.(출12:35-36) 주의 일하라고 건강 주시고 교회 잘 섬기라고 사업의 복을 주십니다. 이 땅에서 얻는 복은 사명입니다. 일하라고 주시는 것이지요! 그 복으로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진짜 복을 받습니다. 영원한 복을 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