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하 23:13-17; 약 4:1-10; 마 10:34-39
주천성
중국에 주천성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주천성이라고 불리게 된 데는 연유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한무제가 서역 정벌에 나선 장수에게 위로주를 하사했습니다. 어주이지요. 황제가 내린 술입니다. 얼마나 귀한 술입니까! 그런데 그 장수는 그 귀한 어주를 우물에 쏟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우물물을 떠서 모든 병사들과 함께 나누어 마셨습니다. 그 누가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하다’고 말합니까? 그 술로 병사들은 오랜 전쟁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은 술 샘, 곧 주천(酒泉)이 되었고, 그곳은 후에 주천성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내린 어주를 혼자 마시지 않고, 모든 병사들에게 나누어준 장수가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요즘 갑질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시끄럽기도 했지요.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져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천성의 이야기는 자기 사람을 소중이 여기고 사랑하는 지도자야말로 훌륭한 지도자임을 보여 줍니다.
다윗과 그 용사들
다윗이 나라를 굳건하게 세운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윗은 자기 부하를 소중히 여기는 왕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대가 불레셋 군대와 맞서 싸우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불레셋은 철을 잘 다루는 족속이었지요. 그래서 강력한 무기를 잘 만들고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무기를 갖춘 불레셋 군대에 포위된 다윗 일행은 베들레헴 산채에 숨어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의 산악 지대는 가파르고 험해서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이지요. 그러나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에는 물이 마르기 때문에, 산채에서 오래 버티기는 어렵습니다. 불레셋 군대에 포위되어 숨어 있던 다윗은 목이 타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누가 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주었으면….” 얼마나 목이 탔겠습니까? 더구나 베들레헴은 그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단지 다윗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우물물이 얼마나 생각났겠습니까? 그런데 그 독백을 들은 부하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감한 부하 삼총사였습니다. 다윗의 독백을 들은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우물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얼마나 귀한 물입니까? 목이 타들어 가는데, 그 물을 마시면 얼마나 시원할까요?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어쩌면, 상상력을 좀 발휘해 보면, 이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렸다는 것은, 그 물을 온 병사들의 머리 위에 뿌린 것과 같지 않을까요? 다윗은 그 물을 자기 혼자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모든 병사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피보다 귀한 그 물을 마시지 않았어도, 그의 갈증은 사라졌고, 병사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과연 다윗은 부하를 사랑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러한 다윗의 모습만을 주목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성서의 사무엘기 상하는 다윗이 남복왕국을 하나로 든든하게 세운 과정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 사무엘기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다윗을 도와 충성했던 용사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름만 기억하고 다른 모든 병사들의 이름은 무명으로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23장 8절에서 39절까지는 그렇게 기억해야 할 용사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그 용사들 중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는 용사가 바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 용사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요셉밧세벳’입니다. 참 생소한 이름이지요? 이 요셉밧세벳은 세 용사의 우두머리요, 팔백 명과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둘째는 누구입니까? ‘엘르아살’입니다. 이 엘르아살은 다윗과 함께 불레셋과 싸울 때에, 이스라엘 군이 후퇴했지만 혼자 남아서 손이 굳을 정도로 버티고 싸웠습니다. 자기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굳은 손으로 끝끝내 싸운 용사입니다. 삼국지의 장비의 모습이 연상되지요? 셋째는 ‘삼마’입니다. 삼마는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하였지만, 팥을 가득 심은 팥밭에서, 그 밭을 지키면서 불레셋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 이 세 용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름 없는 용사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없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이라는 인물은 무흠무결한 완벽한 영웅이 아닙니다. 성서는 그가 실수하고 실패했던 일들을 남김없이 기록하지요. 특히 사무엘기는 다윗 이야기의 마지막이기도 한 사무엘하 24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소유인 양 계수했던 크나큰 죄와, 그 죄로 인한 끔찍한 재앙을 기록합니다. 사무엘기는 결코 다윗 한 개인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그에 비해 마지막으로, 어쩌면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뻔했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하나님의 역사란, 그 역사에 부름 받고 충성을 다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을 혼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된 열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 이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유다, 이렇게 열둘입니다.
이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지요? 그렇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요즘 말로 촌놈들이라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은 이들이 대단한 사람이라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 세대의 ‘스펙’으로 보면, 대단하기보다 오히려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지요. 어부에다가 세리에다가 열혈당원까지 있습니다. 더구나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먹을 유다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다만 예수님을 배반한 건 아니지요. 수제자라는 베드로도 세 번이나 펄펄 뛰며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얼마나 약한 인간인지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촐싹대는 시몬을 바위라는 이름으로, 베드로라고 불러 주시고, 유약한 요한에게 천둥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다양하고 그 한계가 뻔히 보이는 사람들을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무두 함께 이루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럴 듯한 사람들만 골라 뽑는 고급 사교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은 영웅도 위인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목표도 아무런 각오도 아무런 훈련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단풍놀이 구경꾼이 아닙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10장에서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바로 앞에서, 12절에서,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라고 하셨는데, 평화가 아니라 칼이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분명 평화를 빌고 평화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샬롬’을 빕니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칼을 지닌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칼’을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전하는 일은 또한 나 자신을 향하여는 칼을 드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이중인격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평화의 주님이신 그 아들이, 자기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아야 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자기 집안도 가족도 다 팽개치고, 자기 부모와 형제와 자녀들에게 무책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은 자기 십자가를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가는 나라입니다. 제자의 도는 곧 십자가의 도입니다.
웃음을 슬픔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세상과 벗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품어야 할 칼이 있다면, 그것은 거창하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제자직은 우리의 생활에 있습니다. 우리의 아침에 있고 우리의 저녁에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끊어내는 것, 우리가 탐욕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자직의 구체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지요. 사실 야고보가 지적하는 대로 모든 싸움과 분쟁, 심지어 끔찍한 살인도 탐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악마를 물리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슨 주술을 걸거나 퇴마 굿이라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좀 이상한 요구를 하지요. 우리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울라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정작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라는 말 아닐까요? 우리가 세상 앞에서 기뻐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지 깊이 성찰하라는 말입니다.
다윗에게는 자기 목숨을 걸고 따르는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든든하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영웅이 혼자 이끄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지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교회를 이루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퉁잇돌이 되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벽돌처럼 그 모퉁잇돌에 잇대어서, 하나의 몸,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약한 인간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다만 은총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힘과 용기를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