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7:6-11, 마 5:43-48, 롬 1:1-7
1. 오늘의 본문들은 모두 우리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증언합니다.
오늘의 본문들은 모두 우리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증언합니다. 신명기는 우리가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신 7:6)이라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마 5: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롬 1:7)라고 강조합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내가 설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시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어리석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명기는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성도로 삼아주셨음을 말씀합니다(신 7:7-8).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신명기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서 행할 것을 말씀합니다(신 7:1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신 7:8),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입니다(신 7:9).
마태복음서는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마 5:44).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성도의 사명을 말합니다. 자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롬 1:1).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입니다(롬 1:4). 그리고 이렇게 사도가 되어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롬 1:7).
이렇게 볼 때, 오늘의 본문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의 말씀들은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도 그 사랑을 행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성민으로 사는 길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길이며,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2. 오늘의 본문들은 강조점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의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 강조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신명기서와 로마서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그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이같이 한 즉”(마 5:45)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순서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의 “이같이 한 즉”을 새번역성경이나 공동번역성경은 “그래야만”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부분은 헬라어 “호포스”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호포스”는 목적이나 의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명기와 로마서가 마태복음과 조금 다른 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신명기와 로마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마태복음서는 조건적인 은총을 말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의 말씀을 좀 더 깊이 보면 마태복음도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 먼저 원수와 같은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못 박은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 원수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절대적 사랑이 먼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서도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은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오늘의 본문들은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들은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사랑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며,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만을 위한 사랑은 이방인의 사랑과도 같으며, 세리도 그런 사랑은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또 형제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은 원수까지도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하며, 그를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되는 자,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가 출발점이 되면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와 내가 겪고 있는 ‘나의 상황’이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이 출발점이 된다면 이는 모든 것을 품고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원수와도 같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용서하셨고, 나를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수이며, 박해자였음에도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도로, 성도로, 성민으로, 자녀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그 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신이 박해자요, 살인자였고, 예수님께 원수된 죄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고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선택하셔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증거자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은혜에서 우리의 믿음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자신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이전에는 정죄하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은혜로 사는 사람인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출발점이 될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과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아주 분명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너무나 평범한 것 같지만, 우리는 이 분명한 진리의 말씀을 너무나도 쉽게 잊습니다. 신앙의 출발점을 ‘나’와 ‘내가 처하고 있는 상황’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하는 상황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를 먼저 앞세우다 보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사랑 없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은혜가 충만한 교회를 세워가려 하며, 예수님의 사랑 없이 사랑이 넘치는 교회를 만들어 가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기를 어려워하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서 십자가를 찾기 어려워졌고, 예수님을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교회는 계속해서 분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같이 한즉”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중요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에서 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절대적 사랑과 은총만이 우리의 근거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총만이 새로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종교개혁 501년째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