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20:1~21, 빌 4:8~9, 막 12:28~34
■ 들어가는 이야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단풍놀이 다닌다고 난리인데, 세상 유혹을 멀리 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피조물보다 창조주를 더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온갖 복된 것으로 가득 찬 하늘창고가,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을 향해 활짝 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계(戒)와 율(律)
다음 달에 대학 입학을 위한 수학능력시험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공무원시험이나 자격시험 등, 요즘 시험이 많습니다. 어떤 수험생이 좋은 성적을 내는지 아십니까? 공부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어떤 집에서는 엄마가 아이 옆에 붙어 앉아서 감독을 하면서 온갖 잔소리를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겠지요. 그러나 수석합격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개 ‘스스로’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냥 즐거운 거예요.
세상에 즐기는 사람을 이기기는 어렵다고 많이들 말하지요. 이 말의 원조가 누군지 아십니까? 공자입니다.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당해내지 못한다.” ― 전대환, 《공자제곱》(이야기마을, 2017), 394쪽. 이것이 ‘자율’과 ‘타율’의 차이입니다. 타율은 자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당해내지 못합니다.
출애굽기 20장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십계명이 나옵니다. 수없이 많은 율법조항들을 압축해놓은 것이지요. 자율이 타율보다 능률적이다,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십계명은 얼핏 보면 타율적인 법조항처럼 보입니다. 어재서 하나님은 이런 타율을 백성에게 요구하셨을까요? 이 시간에 열 가지 계명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그 가운데서 하나만, 제 6계명을 봅시다. 개역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을 보면 조금 다릅니다. “살인하지 못한다!”입니다. 공동번역도 같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까 “Do not murder!”입니다.
히브리 원문을 봤습니다. “로 트레샤”(lo tresha)입니다. 직역하면 “살인하지 않는다!”입니다. 명령문이 아니라 평서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도 “Do not murder!” 앞에다가 “I”라는 주어를 넣어보면 “I do not murder!” 곧 ‘나는 살인하지 않는다!’입니다. 이 본문을 굳이 명령어로 우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하나님은 ‘타율’이 아니라 ‘자율’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쓰지만 불교에서는 계율(戒律)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계(戒)와 율(律)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율’은 타율적인 규범입니다. 그러나 ‘계’는 자율적인 규범입니다. 그래서 고승들은 ‘산 생명을 죽이지 마라!’를 ‘율’이 아니라 ‘계’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나는 산 생명을 죽이지 않습니다!’처럼 되겠지요.
■ 간디와 만해
십계명은 누가 보더라도 ‘살인하지 마!’ ‘간음하지 마!’ ‘도둑질하지 마!’ 같은 강압적인 규정이 아닙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습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습니다!’ ‘나는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연스럽게, 당연히 나의 행동의 방향을 정하는 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간디가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관은 영국 판사였습니다. 법정에서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관용을 바라지 않습니다. 정상을 참작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법률에 의하면 고의로 저지른 범죄입니다. 나는 국민의 최고 의무라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을 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습니다. 판사 여러분은 사직을 하거나 나를 엄벌에 처하거나 둘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로맹 롤랑(최현 역), 《마하트마 간디》(범우사, 2015), 전자책 284/463쪽. 말은 이렇게 점잖게 했지만, 사실은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뿐, 너희들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추호의 죄의식도 없다!’는 뜻입니다. 대단히 자율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대는 앞으로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그렇소. 계속하여 쉬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해나갈 것이오.” […] “피고는 그래서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해나가겠단 말인가?” “그렇소,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터이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오.” ― 임중빈, 《만해 한용운》(범우사, 2015), 전자책 13/493쪽. 너희들이 나의 행동을 강제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였습니다. 영국과 일본은 타율을 강요했지만, 간디와 만해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율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타율이 아니라 자율에서 엄청난 힘이 생긴 겁니다.
■ 수도원과 감옥
여러분, 수도원과 감옥이 어떻게 다른지 아십니까? 먼저 공통점부터 말해보겠습니다. 수도원이나 감옥이나, 정해진 복장을 입어야 합니다. 여름에는 쪄 죽을 만큼 덥고, 겨울에는 얼어 죽을 만큼 춥습니다. 정해진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죽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의 음식입니다.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야 하고 정해진 시각에 잠들어야 합니다. 아무 때나 자고 싶다고 자고 자기 싫다고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곳 모두 속박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감옥은 형기가 끝나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도원에서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해방될 수 없습니다. 감옥은 절도, 강도, 사기, 협잡, 폭행, 간음, 살인 등의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지만, 거기에는 원한과 증오만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는 거의 죄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지만 거기서 한평생 속죄의 기도를 드립니다. 감옥과 수도원! 건물의 모습도 비슷하고, 그 안에서의 생활도 비슷하고, 먹는 것과 입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감옥은 붙잡혀서 강제로 가는 곳이고, 수도원은 제 발로 기쁘게 들어가는 곳입니다. 감옥에 사는 사람들은 타율에 매인 사람들이고,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은 자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명확해지지 않았습니까? 자율과 타율, 어느 쪽이 더 복된 삶입니까?
예수님도 자율 쪽에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마가복음서 12:28). 예수님의 대답은 잘 아시지요(29-31).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가지 대원칙을 지키면서, 나머지는 자율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라, 이겁니다.
■ 맺는 이야기
바울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이 대원칙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살되, 여러분의 삶을 남들이 본받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