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8:13-22, 골로새서 3:9-17, 누가복음 17:11-19
비 온 뒤 하늘에 떠오르는 무지개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선명한 일곱 빛깔은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창조세계의 상징 같습니다. 기독교는 이 무지개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떠올립니다. 홍수 후에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 무지개에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이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악함을 인하여 모든 생물들이 해를 입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세상의 모든 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소망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지개라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지, 사람은 금새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립니다. 사람 때문에 온 세상이 물에 잠겼던 지난 날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악한 계획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금새 옛 습성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늘 무지개가 떠 있기를 소망하면서, 오늘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홍수가 끝나고 땅이 다 마르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모든 생물들을 방주에서 데리고 나가거라. 그래서 땅 위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라.’ 이 말씀이 노아에게 주신 명령인지 아니면 모든 생물들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인지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데리고 나가는 것은 노아의 일인데, 생물들이 번성하는 것은 노아와는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원문을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이 ‘자라서, 결실을 맺고, 숫자도 불어나라’는 세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생물들의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을 풀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간 사람 때문에 고난을 겪었으니 이제는 창조의 질서에 따라 번성하라는 축복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어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다짐을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 때문에 다른 생물들이 저주를 받는 일은 없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매 번 진노할 수 없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악한 생각을 다 없애지 못할지라도 이 땅 위에는 나고 자라며 죽는 생명의 질서가 이어지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머쓱해지는 장면입니다. 이제 사람이 홍수를 겪었으니 다시는 악한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생각을 그대로 인정해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연대 책임의 고리를 끊고서,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 하셨던 그 축복이 폐기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과 상관 없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른 생물들과 구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생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생각이 악하다해도 사람 또한 그 생명을 이어가며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를 상대로 첫번째 약속을 해 주신 것과 같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심정은 사람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차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품어주시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며 그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그 해방의 약속이 있기도 전에 전인류를 상대로 이같은 약속을 하실 수 있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수의 기록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 그곳에서 알게된 하나님의 권능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순서상 홍수 이야기가 성경의 맨 앞부분에 나와 있지만, 자기들만 선택받은 민족인 줄 알았던 이스라엘이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서 기록한 것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입니다. 이것은 옛계약에서 새계약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이 창조이야기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는 새 계약의 가장 큰 특징은 민족들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든 이방인이든 구별없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골로새서의 본문에서 이르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사람들은 새사람을 입는다고 했습니다(10절).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다](11절)’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를 창조해주신 분의 형상을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참 지식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방주에서 나와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제 새사람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사람이 무엇입니까? 사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12절)” 하고 권면합니다. 여기에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말씀도 더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새사람은 이런 인격적 특징을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이것이어야 하는데, 또한 제일 못하는 것이 이 일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여기는 이 일이야 말로 새 사람이 갖추어야 할 제일 큰 덕목입니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에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불평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자기 잘못을 알고 인정했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용서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다면 그 사람이 자기 잘못을 깨닫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은 이 날 이 때까지도 자기 잘못을 깨달아서 주님 앞에 눈물을 쏟아내기는커녕 늘 남 눈의 티만 지적하고 있는데도, 주님께서는 참아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는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마음 속에 평화가 없다면 자기 믿음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싫은 이유를 들자면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싫기도 합니다. 그것은 발단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겁니다. 나에게 잘못한 것도 아니요 가만히 있는 사람조차 용납할 수 없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을 더 불편해 합니다.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아니면 나보다 더 잘나서 질투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고,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을 적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 나와서까지도 스쳐 지나가는 관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 이루신 것은 적정 거리를 유지해서가 아니라 확 껴안아서 자기와 한 몸을 이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는 사회적 위상이 달라서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 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손을 대셔서 한 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든, 문둥병 환자이든, 세리이든, 죄인이든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을 인정하고 자기 식탁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려고 노력해 보셨습니까? 누군가를 내 몸처럼 사랑해서 그래서 예수님을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설령 상대가 나를 용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 사랑의 불이 꺼지지는 않게 해야 합니다. 마음 속 안타까움은 있겠지만 그 마음을 미움이나 원망이 지배하지는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평화를 이루고, 또 관계 속에 평화의 토대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 가시는 길 앞에서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환자들은 가는 길에 자기 몸을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되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나머지 아홉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을까요? 혹시라도 다시 병이 재발했을까요? 성경은 이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던진 질문들은 초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환자 모두는 간절함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들 모두는 나음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감사 드리는 일이었는데, 성경은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그를 ‘이 이방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당연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에 그토록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 환자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고, 소외시키고, 한 몸 되기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오늘 홍수 이야기에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사람이 완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용납해 주시고 또 구별 없이 모두 품어주시는 그리스도 사랑의 단초를 확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기에, 새 사람이야 말로 사랑의 띠로 한 몸을 이루는 사람, 그렇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감사 드리는 일입니다. 그 감사는 우리가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고, 우리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몇 달 동안 방주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문을 열고 마른 땅을 밟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코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얼마나 신선할까요? 죽음을 딛고 이겨낸 모든 생물들은 친구요 형제처럼 여겨지지 않았겠습니까?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각오가 참으로 남달랐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호흡 안에도 그런 생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제를 바라보는 눈길에 사랑이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입니다. 새 사람을 입어 사랑과 평화 가득한 인생을 열어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