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16:1-8, 13-15, 요 6:26-35, 고전 11:23-26
창조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간은 우리 민족의 최대의 명절인 추석(秋夕)이어서, 어느 때보다도 영.육간에 풍성한 시간들을 누리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추석을 보낸 우리를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떤 류(類)의 창조의 세계로 인도하실까요?
우리가 먹는 음식(飮食/Food)에 관한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그것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끼마다 먹는 그러한 육체적(肉體的)인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만이 먹는 매우 특별한 영적(靈的) 음식에 관한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즉 오늘의 말씀은 누구나 먹을 보편적(普遍的) 음식이 아니라, 아무나 먹을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음식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제시하는 말씀이 마침 오늘의 본문 속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친히 구별해서 언급하신 두 가지 양식들에 관한 말씀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永生)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印)치신 자니라’(요6:27)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먹을 양식에는 아주 대조적인 두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썩을 양식’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입니다. 썩을 양식은 아무래도 우리 몸(육체)를 위한 양식을 말하신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육신의 생존을 위하여 먹는 일시적인 음식입니다. 입으로 들어가 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땅(대지)을 통하여 제공된 것입니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우리의 영혼(靈魂)을 위한 양식을 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땅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양식은 우리의 속사람을 살리기 위한 양식입니다(고후4:16참조).
음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먹지 않고 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사람의 체질도 형성하고, 성격에도 영향을 주며, 몸의 형태와 크기나 기능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음식 문화만 깊이 살펴보아도, 상대의 모든 것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들로 택하시면서 매우 중요하게 더불어 창조하신 부분도, 바로 이 특별한 음식 문화(文化) 시스템을 제정(制定)하신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썩을 육체의 양식만으로는 그들의 체질을 예수 닮은 자들로 변화시킬 수가 없음을 아셨기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오직 당신의 백성들만 먹을 수 있는 구원의 식탁(음식)을 따로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가족과 백성들로 하여금, 모이면 당신이 제정해주신 특별한 식사를 먹고 마시면서, 영원한 나라를 상속(相續)하기에 합당한 공동체와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실로 식사의 놀라운 힘을 아시고, 특별 음식문화를 제정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음식이 우리 몸의 체질에 확실하게 영향을 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선은 규칙적으로 음식을 먹어야 됩니다. 가끔 먹는 음식이 되면, 식사를 통한 변화는 아예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제공해 주신 특별한 공동식사의 주 메뉴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크게 보면, 성격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귀로 듣는 식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듣기’입니다. 이 식사를 위해 우리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고 공부하며 삽니다. 주일도 엄격히 성수합니다. 이 때의 식탁의 주관자는 생명의 주이신 예수이십니다. 이 때 주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설교자를 통하여 설교(說敎)란 식사를 제공하시며, 예수를 배우고 그의 음성을 경청하며 그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게 하십니다. 그 바람에 우리 신도들은 주일마다 예수와 그의 이야기와 교훈들을 들어야만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듣는 식사는 이미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 자체가 되어서, 이제는 한 주간이라도 이 영적 식사를 못하면, 그 때부터는 그 허기(虛飢)를 채우기 위해 ‘길 잃은 양’으로 이곳저곳을 헤매며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먹는 식사’로서의 ‘주의 성찬(聖餐)’을 받은 일입니다. 이는 매우 특별한 식사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직접 먹고 마시는 거룩한 음식입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 상징적 표지로서 포도주와 떡을 통하여 예수의 피와 살로 받고는 있지만, 이 성찬 받는 일은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가장 엄숙한 순간입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내가 당신과 하나이며, 당신이 나의 구주이시며, 내가 당신의 사람이 된 ‘혈맹(血盟)의 가족’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룩한 식사에의 지속적인 참여를 통하여, 우리는 죄인의 속성과 저주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영원한 나라를 상속할 체질(DNA)을 새롭게 입게 됩니다. 마치 부모와 자식이 같은 디엔에이를 공유하듯이, 우리도 성찬의 식탁을 통하여 주님의 체질을 닮은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식사의 힘만큼 강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역사상 우리 기독교는 숱한 박해들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뜻밖에도 이 성찬 문화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는 인간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食人) 집단’이라는, ‘오해 치고는 큰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의 성찬은 세상에게는 매우 이질적이고 낯선 식탁입니다. 하지만 그런 장애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그 식탁을 포기하거나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말씀과 성찬만이 구세주에게 나아갈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2천년 역사 속에서, ‘듣는 말씀’은 물론 이 ‘먹는 말씀’인 성찬을 견고하게 지키고 취하며 그 속에서 영생을 맛보며 살아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하나님이 제공하신 특별한 성찬의 기원과 역사와 그 음식에 담긴 메시지들을 집중(集中)해서 전해 줍니다. 마침 다음 주일(10.7)은 세계성만찬 주일인데, 여러분들은 오늘의 말씀 잘 들어서 앞으로의 성찬의 참여(參與)를 보다 복되게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구약의 출애굽기를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출(出)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험난한 광야생활 40년을 생존하게 한 불가사의한 특별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입니다. 이것들은 굶주림의 공포에서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베풀어주신 양식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이제까지 애굽에서 먹고 지내왔던 고기와 떡과는 아주 성격이 다른 새로운 음식물이었습니다(출16:3참조).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그것들을 처음 대할 때, ‘이것이 무엇이냐’(만후)라며 놀라워했던 것이었는데, 그 의문에 대하여 모세가 이렇게 답(答)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먹게 하신 양식이다’(6-8,15절)
그 때부터 그들은 밤에는 동물성 식품인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식물성 식품인 만나를 꾸준히 공급받으며 그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근 40년간을 그 음식으로 살았습니다(1,8,13절). 그 음식의 정량(定量)은 일용할 양식 정도였는데, 다만 안식일 직전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로 두 배(倍)를 공급해 주셨습니다(5,16절).
이 광야 식품공급은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은 표적(標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의 생명은 책임지고 먹이고 살리시는 여호와이심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만민들에게도 먹거리를 공급해 주시는 주(主)이심을 알게 함과 동시에,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向)한 삶 살라고 요구하는 메시지를 담은 사건이 되었습니다.
복음서는 어떤 내용입니까?
말씀의 배경은 예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셨던 놀라운 경험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가 빵 문제를 해결해 줄 인물이라고 판단하면서 예수를 뒤좇기 시작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26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곳에 모여 든 무리들(제자들 포함)에게 두 가지 새로운 삶을 위한 행동지침들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당신을 따를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구하는 썩어질 양식을 바라는 차원에서 당신을 좇으려는 게 아니라,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구하려고 당신을 좇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바로 그 일을 위해 살고 계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27절).
그러자 그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28절)
주님은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가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29절). 주님의 일에는 행위가 우선이 아니라 믿음이 우선임을 강조하신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이미 인간들이 하나님께 저지르는 실패의 근원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믿음이 없는 인간의 제반 행동의 허상(虛像)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행위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믿음에서 나온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부재에서 나온 행위란, 그 결과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기중심이며 자기를 위한 일이 되어, 결국은 죄악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일수록, 그 첫 단추와 기초는 반드시 예수에 대한 믿음이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거칠 것도 없고, 또 모든 것이 뒤 따라오게 됩니다(마6:33참조).
둘째는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신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알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옛날 모세 시대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셨던 분이 ‘그의 하늘 아버지’였던 것처럼, 이번에 오병이어 음식을 베푸신 당신은 바로 ‘그의 아들’되신 당신(인자)이었음을 알리면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32-33절 참조).
이 점을 강조하게 된 사연은 그 무리들이 예수의 오병이어를 경험하면서, 그 일이 마치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 의하여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었던 일로 간주하며(31절), 예수를 모세와 같은 인물로 평가하려고 한 일 때문이었습니다(32절).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점에서는 무리들에게 진실을 전해야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우선 그들 조상들을 먹이신 장본인은 모세가 아니라 당신의 하늘 아버지이셨을 밝혔고(32절), 그러기에 그들이 먹은 떡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참 떡’이었다고 강조하셨습니다(32-33절).
하지만 예수로부터 그 말씀을 듣는 무리들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떡 문제 해결’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먹였느냐’는 사실 확인보다는, 누가되든 ‘그 떡’을 배고픈 자기들이 항상 먹게 되는 일이 더 중요하고 간절한 관심사였음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께 요청했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절박한 요청을 이렇게 답하시는 것으로 수용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이니 네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이 예수님의 이런 ‘자기 계시(啓示)’는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의 몸을 영생하게 하는 양식으로 내어 주심으로서, 그를 믿고 먹는 모든 자들에게는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부여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후에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晩餐)’에서 이 특화된 식사를 규정짓는 제정의 말씀을 더하여 주셨습니다(마26:26-28,막14:22-24,눅22:19-20참조).
고린도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이 거룩한 생명의 음식에 대한 정리된 증언입니다. 그것도 교회의 사도인 바울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온 교회들이 반드시 지켜 행하도록 전(傳)한 내용입니다. 이런 성찬에 대한 증언이 예수의 식탁에 직접 참여하였던 친(親) 제자들인 12 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닌, 친 제자가 아니었던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정리된 일은 매우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23절 참조). 그만큼 바울은 주의 이 성찬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절대 중요한 영적 식탁이고, 자신의 생명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 줄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음식 매체(媒體)로 보았음을 말했다고 봅니다!
성만찬의 특성에 대하여 스티븐 브라운은 이렇게 정의해 주었습니다. “세상은 잊기 위하여 마시지만, 성도는 기억(記憶)하기 위하여 마신다”. 사도 바울은, 이런 놀라운 주의 거룩한 식탁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聖餐)에 담긴 메시지들을 다음의 세 가지로 알려주었습니다.
1) 떡을 먹음은 기억하고 기념(記念)하는 일입니다(24절,b). 그냥 주의 살을 먹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저 십자가에서 제물 되어 살을 찢어 떼어 주셨음을 믿음으로 받으며, 기억하고 기념하며 식탁에 참여해야 하는 메시지가 담긴 떡으로 받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2) 잔을 마심은 피로 맺은 언약(言約)이 주님과 나 사이에 굳게 맺어졌음을 고백(告白)하는 일입니다(25절). 예수의 피는 본래 흠(欽)없고 거룩하며 순결합니다. 바로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죄악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저 십자가 형장에서 당신의 거룩한 피를 속죄의 제물로 쏟아주신 것입니다. 그 바람에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음에도, 흉악한 죄에서 속죄 받아 주님과 함께 기리 살 수 있는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됐습니다. ‘피의 혈맹 가족’이 된 것입니다. 성찬에서 잔을 마시는 이들은 바로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술과 가슴으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3) 성찬은 전(傳)하고 선포(宣布)해야 되는 일입니다(26절). 좋은 음식은 그냥 먹고 끝날 수 없습니다. 나만 즐기고 말 수도 없습니다. 전하고 알리는 일이 따릅니다. 자신이 누린 맛의 혜택을 이웃과도 나누고자 함입니다. 하물며 나를 영생하게 하는 특별한 음식과 그 주체인 그리스도 예수의 피의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누가 이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겠습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특별한 양식을 먹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의 썩어질 양식과는 아주 다른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특별한 음식을 먹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주 이 음식들을 계속 먹고 마시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음식들이었나요?
예수의 말씀을 듣는 양식입니다. 매 주일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말씀의 식탁을 교회 예배를 통하여 받으며 먹고 마십니다. 그 순간, 우리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빵인 예수를 공급받습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삽니다. 하나님나라에 갈 때까지 그렇게 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 성수를 밥 먹듯 하며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절대 부실해지면 안 됩니다.
예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聖餐)의 양식도 우리의 소중한 음식 메뉴입니다. 성도들은 이 시간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도 깨끗이 하시고, 감사도 드리며, 주님이 날 위해 죽으신 일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선포하는 우리가 되게 합시다. 영원한 생명은 이러한 영적 행진을 중단 없이 계속하는 이들에게 부여되는 하늘의 응답이며 선물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 생명의 음식을 중단 없이 먹고 마시며 즐거이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