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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3-1) - " 믿음으로 연 새 역사, 새 인류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19-09-14 (토) 11:49 5년전 2787  

본문) 창12:1-9, 요8:53-59, 갈3:1-14

 

아브라함이 오늘의 세 본문의 핵심 인물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본문 전체의 주인공으로 소개되고 있고, 복음서에서도 여전히 토론의 핵심 대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의 올바른 신앙 교육을 시키려는 데에 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본보기로 들어 말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미 세계 모든 신앙인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공인된 분입니다. 유대교에서 파생된 세계의 4대 종교들 모두(개신교-천주교-이슬람-정교회)는 다 이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신앙조상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그 만큼 아브라함의 존재는 성서의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해 충돌

그런데, 이 아브라함에 대한 이해 문제를 놓고 예수님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격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는 조상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알고 계신 아브라함과는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인식을 보면,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미 신적 영역에 둔 존재였습니다. 맹신적으로 존중하고 높이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그런 그들이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이름하에 자부심은 있지만, 그 후손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데, 정작 그 핏줄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그 조상의 믿음을 전혀 닮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핏줄 후손 문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의 후손됨을 입증하는 일이 더욱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이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제 창세기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런 놀랍고 영광스러운 인물이 되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전합니다. 그를 역사의 큰 인물로 불러내신 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확실하신 의도는 그를 앞세워 기존의 저 바벨탑 문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믿음의 문화 공동체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즉 새 인류와 새 역사를 도모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기존의 사람들은 땅과 육신의 기반을 복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온 인류들이었습니다(1절).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랄 수가 있는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은 그들의 복의 결정적인 기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고향 중심으로 살았고,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는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집과 고향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문화권에 젖어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를 그 문화권에서 뽑아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어떤 유형의 복을 좇아 살게 되었습니까? 바로 땅에가 아니라, 하늘의 복에다가 삶의 기반을 두고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에 삶의 기반과 미래를 두고 살게 된 무리(인류)가 탄생한 것입니다. 보이는 육신적인 것에 삶의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시는 하나님에게 삶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사는 영적 존재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 역사의 무대에 출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새 인류의 시작

그의 시작을 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새 인류’의 시작이라고 칭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3절.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상대하지 않으셨고, 그들 통하여 새 인류와 새 역사의 물꼬를 터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점은 그 후, 갈3:8절에서 바울이 크게 인용하면서, 강조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를 어느 특정 민족이나 조상(핏줄 조상)으로 삼고자 하심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그와 같이 하나님에게 복의 근원을 두고, 그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세상의 모든 무리들의 조상이 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 점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7절)

 

여러분과 저도, 우리 모두는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그가 가졌던 하늘 중심의 신앙과 말씀 중심의 믿음을 갖고 우리가 지내고 있다면, 수 천 년 전의 아브라함과 지금의 우리는 분명히 하나입니다. 한 믿음의 가족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보여 준 신앙의 진솔한 모습들을 주목합시다.

 

오직 약속의 말씀만 믿고 나아간 삶 

그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던 점입니다(4절). 그렇습니다. 그의 믿음의 기반은 약속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책임을 져주시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릴 처지에서서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혼자만이 아닙니다. 아내. 조카(롯) 가족. 모든 소유와 종들 일체가 함께 움직이는 그런 행보였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거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습니다. 총체적이었고 전인적인 응답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다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상대하시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현지의 정보가 없거나, 사전의 손익계산에 맞지 않으면, 누구도 움직이지 않잖아요! 하지만 아브라함 일행은 현지의 사정에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곳에 가라’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떠난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하게 이끄실 하나님이 그곳에도 계시고, 그곳에서도 따라나선 자기들을 반가이 맞이해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온 세상에 드러내 주었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수가 있는지요? 우리 남신도(男信徒)들도 그런 믿음을 과연 갖고 살고 있는지요? 우리도 지금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고 이 자리에 모인 것임을 다시 명심합시다. 

 

그 때, 그의 나이가 얼마였나요? 75세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의 새 인생이 75세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그 때부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면서 100년을 더 장수하다가 1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25:7절), 그런 점에서 보면, 75세의 나이는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 나이는 얼마든지 보수적인 태도를 보일 나이여서, 새롭게 인생 모험을 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처지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시하는 선택을 하고 살기 시작하였기에, 그 동안의 육신적인 기반을 쉽게 버리고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생각과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니까요! 아무튼, 그의 사례는 누구든지 주를 따르는 데에는 나이나 세대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고 봅니다. 

 

이름이 창대해지는 복

결국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결과로 얻게 된 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한마디로 이름이 창대(創大)해지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창대한 것은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그리고 오랫동안 다지고 다지면서 높여진 이름입니다. 지속성과 영속성을 가진 이름을 말합니다. 한쪽만의 이름이 아닙니다. 전 세계. 전 세대에 공인된 이름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이름은 인간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힘썼던 바벨탑 문화의 유형이 아니라(창11장),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이름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2절.하) 

 

여러분, 요즈음 시대는 브랜드 가치로 승부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이름값이 대세를 결정합니다. 아브라함, 그는 인류의 전 역사,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그 이름이 창대하여지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땅에서는 물론, 심지어는 하늘에서까지도 그의 빛나는 역할이 전개되고 있음이 확인됩니다(부자&거지 나사로 이야기 속에서의 아브라함의 역할/눅16:19-31). 그는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높여 주시는 모든 자들의 표상이 되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갈3:6).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언급하신 장면입니다(56-59절).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 오시기 전,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셨던 모습을 증언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주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56절).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세상 파송의 소식을 접하면서, 환영하고 기뻐했음을 드러낸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무슨 연고로 예수의 세상파송을 기뻐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성육신에 기쁨을 드러낸 아브라함

그 첫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세상은 분명히 스스로의 자정(自淨) 능력이 없어서, 마치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의 변화와 구원의 길이 없어 보였는데,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목숨을 내거신 결단으로 저 세상에 가셔서 그 숙제를 풀겠다고 하시니, 그의 기대와 희망은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본래 세상의 문제는 세상 스스로의 힘에 의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차원이 다른 하늘의 개입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는데, 그 일의 주역으로 주님이 나가시겠다니 ---, 진정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인 유대인들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는 하나님의 축복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오직 자기들만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셨다면서, 다른 민족들을 무시하고 교제를 차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였고, 구원의 흐름을 막고 살았습니다. 그 바람에 당시는 복음을 틀어쥐고 있던 유대인 자신들도 죽었고, 그 복음을 받지 못하던 이방인들의 심령들도 죽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치명적인 문제를 예수께서 지구촌에 가셔서 ‘모퉁이 머릿돌’이 되어(엡2:14-20참조), 서로의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 되게 할 것을 확신하였기에, 아브라함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이야기는, 바울이 이방인 교우들의 신앙적 탈선을 막고,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 되어 그의 복을 누리도록 권면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유대인 이단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잘 믿는 갈라디아 교회 가족들을 유혹하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도 있어야 하지만 모세가 말한 구약의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논지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신앙을 예수 중심에서 율법과 구약 중심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이 일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율법이나 할례로의 회귀(回歸)는 예수의 오심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뿐더러, 교회를 결국 유대교와 유대주의로 되돌리려는 일이었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온 세계 만민을 믿음으로 구원하시려고 원하셨던 일을 구체화시키고자 하심이었는데, 지금 이단자들이 율법을 강조하면서 그 세계를 향한 구원의 흐름의 물줄기를 차단하고, 다시금 희망 없는 유대교로 되돌리는 짓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았던 아브라함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이 구원받고 복 받은 것은 본래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는 지킬 율법도 없었습니다. 율법 없는 시대에 그의 믿음만으로도 구원을 받았던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때부터 율법은 없지만, 그러나 오직 믿음만으로도 구원 받을 수 있는 모든 신앙인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아브라함은 희망을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만으로도 구원은 가능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을 애써 외면하면서 지금 그 후손들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믿음에 의한 구원의 문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참된 믿음만 있으면, 구원도 받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랜 족보를 가진 믿음입니다. 거룩한 족보를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에서 바울에게로 이어진 전통 있는 믿음의 계보 위에 서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핏줄이 아닌 믿음으로 새 역사와 새 인류를 형성하셨던 그 계보를 이어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제는 그 믿음의 신실한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내 안에 온 아브라함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게 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믿음의 계승자가 되며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남신도회주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세계 최초의 훌륭한 남신도의 모델이십니다. 그는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사신 분입니다.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얻어내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세계 구원 역사를 지켜보시면서 마음에 깊은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했던 분입니다. 그의 믿음을 본받읍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우리의 전 존재를 거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를 통하여 세상 만민들이 복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며, 그 뜻을 받들고자 겸허히 복종하는 믿음에 서도록 합시다.

             

                                                                                < 본 설교문은 ‘창조절에 만난 아버지 하나님’의 글에 올린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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