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 20:1~12, 약 3:1~12, 마 18:1~9
오늘은 절기상으로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엄밀히 따져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전통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과정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처음으로 농사지은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며,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제사를 드린 것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 전통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것은 그 출발점의 정신은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돌려 드린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40년의 세월 동안 한결 같이 먹이시고, 입히시며, 돌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찬양이요, 고백이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나안 거류민에 비해 메뚜기와 같아 보이던 이스라엘을 거인과 같은 아낙자손과 견고한 성읍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승리하게 하심에 대한 영광과 감사의 잔치가 추수감사절이 되는 것이죠. 곧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 농사에 대한 감사와 영광의 잔치가 아니라 이끄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 먹이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종합적인 감사요, 영광의 축제인 것입니다. 이 거룩한 축제에 초대받아 동참하고 감사하는 우리 대선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세 본문은 공통적으로 말, 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구약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의 말실수에 대한 이야기이고, 서신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말, 혀의 사용에 관한 교훈이며, 복음서의 말씀은 말 한마디의 중요성, 우리가 내 뱉는 말의 무거운 책임감에 대한 경고입니다.
먼저 오늘 민수기의 말씀은 광야생활 끝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공동체는 물의 문제로 인하여 다시금 모세와 아론 앞으로 모여들어 원망하고 불평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이후 계속 반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턴이었습니다. 처음 출애굽 하여 애굽 군대에게 쫓겼을 때, 홍해를 건너 사흘 길을 걸어 마라의 쓴 물을 만났을 때도,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 때도,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백성들은 언제나 모세와 아론에게 나아와 불평하며 원망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것이 모세 때문인 양, 아론 때문인 양 자신들의 불만을 쏟아 냈던 것이죠. 그 때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의 현실을 아뢰고 해결책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그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가르침과 권면에도 자기 고집 부리다 심판받아 죽고, 병들어 죽은 이들이 숱하게 많았음에도 오늘날 이만큼 버티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지도자 모세의 중보와 지도력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제대로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훈련한 덕에 그나마 심판받아 죽을 인생들이 그 심판을 면하고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구약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노라니 아마 모세도 그들에게 지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원망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해결책을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 뱉은 첫 마디가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는 외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한결 같이 원망과 불평의 인생을 살았던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족한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바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광야에서 40년간 연단시키셨던 것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 누구보다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현실에 대해서 잘 아는 모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반역한 너희’라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는 그가 계속된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에 지쳤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더욱 와 닿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가운데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일을 열심히 감당하다가 가끔 지치고 낙담할 때도 있고, 불평과 원망에 휩싸여 이웃에게, 동료에게, 성도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불필요한 갈등이 생겨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와 복음서는 말의 중요성, 혀를 통제하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불평이 결국 모세와 아론이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썩어질 운명이 된 결정적 이유라는 점을 오늘 구약의 말씀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오늘 모세의 상황을 되뇌어 봅니다. 오늘 모세는 자신에게 다가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넘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결국 잘못된 감정의 물결은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담아 마치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는듯한 언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듣고 모세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어디에도 오늘 모세가 보인 행동과 같은 지시는 없었습니다. 이전에 호렙산 반석을 쳐서 물을 낼 때도 오늘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은 내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마치 자신이 물을 내는 것과 같은 말과 행동을 덧붙여 이 모든 일이 마치 자신의 능력인양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결국 모세의 행동을 보신 하나님은 12절을 통하여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과연 오늘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모세의 행위가 지금까지 그가 이루었던 모든 헌신과 충성의 결과를 뒤엎을 만큼 큰 것인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모세의 행동은 반복된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차라리 애굽에 있던 것이 좋았을 것을 후회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랐을 때에도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였을 정도로, 불평과 원망의 존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을 이끌고 40년을 한결같이 산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은 인간적인 분노가 치밀어 실수 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인간이니까요. 모세도 인간이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부르짖는 모세의 그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 분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실망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한 번의 실수로 모세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겠다 오늘 선언하십니다. 왜요? 왜 이렇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오늘 서신서의 말씀이 주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오늘 야고보 기자가 말하는 선생은 누구입니까? 맞습니다.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들, 사도들이었습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지적합니다. 더 큰 심판이라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동, 그들의 말 한마디가 끼치는 영향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의 영향력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최근 불거진 명성교회 사태나,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논란을 생각해 보면 오늘 야고보서의 경고가 더욱 무섭고, 무겁게 들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 기자는 말의 중요성, 혀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런 서신서의 경고는 복음서에서는 더욱 구체화 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께서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다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더욱 주목할 것은 그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달고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경고입니다. 그만큼 그 책임이 무겁고 크다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 언급됐던 큰 심판이 복음서에서는 연자 맷돌을 달고 물에 빠지는 무거운 죄로 구체화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연자 맷돌을 달고 물에 빠지는 형벌이 그나마 낫다는 성경의 경고입니다. 연자 맷돌을 달고 빠지는 편이 오히려 가벼운 형벌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이 내 뱉는 말, 우리들이 사용하는 혀의 중요성에 대해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와 봅니다. 우리는 과연 모세의 죄는 지금까지 그가 이룩했던 수많은 헌신의 결과보다 더 큰가? 라는 물음을 들고 서신서와 복음서의 말씀을 살폈습니다. 결론은 Yes. 이유인 즉슨 모세의 위치 때문입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택함 받은 거룩한 대행자입니다. 하나님 대신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사람이요,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가르며 광야에서의 영광스러운 생존의 행렬을 인도한 인물입니다. 놀라운 이적과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고, 놀라운 승리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놀라운 은혜와 응답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인물이 오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의 드러내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먼저 입술로 범죄하고, 과장된 행동으로 범죄한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아주 엄격하고,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야 말로 이스라엘의 큰 선생이요, 어린 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야할 책임을 맡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했으니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준엄한 심판의 잣대를 적용하셨던 것이죠. 자칫 가볍게 처리하면 그의 잘못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매정할 정도로,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엄격한 심판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아침에 조금은 생뚱맞은 모세의 이야기가 등장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이 거룩한 아침,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우리들의 존재가, 택함 받아 구원받았다는 우리들의 존재가 모세와 같기 때문입니다. 받들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존재가 우리고, 받들어 하나님께 이 백성의 상황을 아뢰고 중보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능력을 통해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를 찬양하는 거룩한 자리에서 오늘 모세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단 한 번의 실수로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한 모세의 전철을 뒤따르지 말라 경고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축복과 기쁨이 넘치는 이 아침에 이 귀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입술, 하나님이 허락하신 혀로 우리가 할 일은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한 감사와 찬양이요, 온 몸과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는 점을 모세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올해는 사상 최악의 폭염으로 참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살았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는 하얀 옷 차려입은 볏단만이 두런두런 있을 뿐 벼들은 이미 거둬 들인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은 예년에 비해 소출이 적다는 평가이기도 합니다. 참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견뎌낸 농부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허탈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죠. 그러면서 떠오르는 한 원로장로님의 말씀. “하나님은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곧 소출이 많으면 가격은 낮지만 많이 팔아 채워 주시고, 소출이 적으면 가격을 높여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많으나 적으나 우리가 할 일은 감사라는 것이죠. 많고 적다는 평가가 아니라 그럼에도 채우심에 대한 감사, 오늘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 오늘도 살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
이 복되고 즐거운 추수감사절 축제를 맞이한 우리 대선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 복되고 귀한 아침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에 감사하는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도 느끼고, 주신 만큼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믿는 만큼 더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주의 자녀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