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20:1-12/ 약3:1-12/ 마18:1-6 창조절 열둘째주일
오늘은 창조절 열둘째주일, 많은 교회들이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감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께 무얼 드려도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찬양은 우리를 만드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최선의 것이요 우리가 드릴 최고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라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언제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계4:8-11, 5:9-14, 7:9-12, 11:15-18, 15:2-4, 19:1-8)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완전히 이루어져 구원이 성취된 나라, 그의 택한 자녀들이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회복된 사람들,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 간 사람들, 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긴 사람들이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선의 감사일 뿐 아니라 우리가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때 교만했던 인간이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께 함께 찬양함으로 다투고 불화했던 인간이 서로 화목하게 되며, 불평과 원망으로 어둠의 권세에게 정복당했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이의 찬양(민20:1-12)
찬양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며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아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사람은 어떤 험한 일을 만나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밤새도록 하나님을 찬양했듯이(행16:25) 하나님이 장차 행하실 선하신 일을 기대하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고난의 밤을 절망과 불평과 원망 속에서 다 보내고 그 고난의 밤이 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들은 출애굽은 했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난의 광야에서 헤매다 죽습니다. 이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에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사람은 고난의 광야 40년을 넘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는 르비딤 광야에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반석에서 솟아난 물을 얻었습니다.(출17:1-7) 그런데 또 다시 물이 없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구해야 하겠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이 광야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원망하며 이미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민20:3-5) 그동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도 찬양하지 않았고 장차 베푸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감사 찬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장 눈앞에 먹을 물이 보이지 않으면 불평합니다. 이들은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까지도 이스라엘을 닮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했던 모세까지도 불의한 백성들에게 장차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지 못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의 백성들을 향해 분노했으며 원망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20:10)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모세가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인해 그를 책망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거친 광야에서 헤매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분노하고 원망했던 모세까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끝, 가나안 땅이 보이는 비스가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신34:10)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미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시22:3) 어떤 경우에도 평안하며, 기뻐하며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지금 맛보는 사람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부르는 찬양(마18:1-6)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 존귀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 큰 가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고 이 ‘어린 아이’가 천국에서 제일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부터 ‘어린애’가 아닙니까? 혹은 언제까지가 ‘어린애’입니까? 젖먹이고 잠재우고 안아주기만 해도 가장 만족해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게 어린애입니다. 자꾸 요구가 많아지고 불만이 많아지면 어린애가 아닙니다. 누가 때리면 엄마를 부르며 우는 애는 어린애입니다. 누가 때릴 때 저도 때리고 싸우면 이미 어린애가 아닙니다. 벌써 자기 보호를 할 줄 아니까요! 배고파 울면 어린애입니다. 그런데 배고프다고 신경질 내는 아이는 이미 어린애가 아닙니다. 어린애는 배고프면 겸손하게 “엄마 밥 줘” 그럽니다. 불평불만을 몰라요! 그러나 밥 안준다고 신경질내고 불평하면 어린애가 아닙니다. 벌써 부모를 부려먹으려고 합니다. 어린애는 겨울에 밖에서 놀다 손이 얼면 아프다고 웁니다. 왜 손이 아픈지를 몰라요! 그러나 손 시린데 장갑하나도 안 사준다고 신경질내면 이미 어린애가 아닙니다. 벌써 머리가 너무 커버린 것입니다. 부모 탓하며 부모 책망합니다. 불평불만은 단순히 악한 품성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자신을 하나님 아래 두고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위에서 하나님을 부리려고 하고 책망하는 교만한 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서로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세우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자랑하거나 높이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엄마를 의지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말 잘 듣고 순종하지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부려먹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힘들면 도와달라고 울지 왜 안도와주느냐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젖 한번 먹고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잠만 잘 자고 나서도 천사같이 방긋 웃습니다. 그냥 예뻐서 안아만 줘도 그렇게 좋아합니다. 누가 가장 천국에서 큰 자입니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것 하나도 기뻐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고난 중에도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사람을 환대합니다. 누가 오더라도 기뻐하며 맞아줍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는 독이 나오지 않습니다. 남을 실족하게 할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입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울음보를 터트리지 불평하며 사람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런 어린애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 모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 같이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겸손한 사람, 자기를 낮추어 작은 소자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5절) 만일 악한 말고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가장 큰 벌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악한 말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는 불평불만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천국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이들이 하나니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젖만 먹어도 만족해하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불평대신 하나님께 구하는 아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를 환대하고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자가 부르는 찬양(약3:1-12)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이미 천국에 들어간 자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이며,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입에서 나가는 말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가는 온전한 말이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2절)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혀를 다스리고 훈련해야 합니다. 혀는 말의 재갈과 같아서 말을 다스립니다.(3절) 혀는 배의 키 같아서 큰 배의 방향을 잡아서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4절) 또한 혀는 불같아서 조그만 불 하나가 온 산을 다 태우고 온 집을 다 태우고 맙니다.(5-6절) 우리의 혀가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혀를 어떻게 훈련할 수 있을까요? 우리 혀를 훈련하는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의 혀는 악한 말을 담지 못하고 독이 섞인 말을 금하게 되고 선하고 창조적인 말을 함으로 우리 인생을 아름답고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보십시오! 다른 것은 다 길들일 수 있습니다. 짐승도, 생물도 다 길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혀는 길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을 통해 독이 나오고 악이 나옵니다. 결코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오지 않는데 우리의 입에서는 한 입에서 찬송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우리의 입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쉬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우리 입에서 기쁨의 말과 기도와 감사의 말이 쉬지 않아야 우리 입에서 악이 나오지 않고 독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입에서 기쁨의 말이 쉬는 순간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가 멈추는 순간 원망이 나옵니다. 기도가 멈추는 순간 어둠의 권세에 지배를 당합니다.
시골 중학교 다니던 시절, 새로 오신 음악선생님이 어느 날 매우 새롭고 놀라운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오늘부터 기분이 나빠 서로 다투고 싸울 때 반드시 노래로 하라는 것입니다. 노래로 하면 절대로 싸움이 안 된다고 하면서 욕할 때도 노래로 욕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욕하고 싸우면 매 맞고 혼나겠지만 노래로 욕하면 그냥 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서로 장난삼아 노래로 욕하고 싸워보았습니다. “야! 이놈아~, 이 나~쁜 놈아~! 너~ 죽~는다~” 그러다 서로 배꼽잡고 웃었습니다. 야! 정말 신기하게도 싸움이 안됐습니다. 욱하는 감정이 사라지고, 노래하려고 하는 순간에 분노가 진정되었습니다. 의심되면 집에서 부부간에 한 번 해보세요! 그런데 노래로 싸우면 절대 싸움이 안 되는데 가장 큰 문제 하나가 있는데 막상 싸울 때가 되면 노래 부를 생각도 안 나고 노래도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처럼 훈련이 필요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훈련을 쉼 없이 해야 합니다. 기쁨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불평이 사로잡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멈추는 순간 마귀의 충동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망이 사라집니다. 살려면 쉼 없이 숨을 쉬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노래하다 죽었답니다.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죽었어요. 그 사람이 보던 악보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악보는 쉼표가 빠진 악보, 쉼표 없는 악보였습니다. 그래서 죽은 것입니다. 쉼 없이 숨을 쉬어야 살 듯 쉼 없이 기도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