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7:6-11, 마 5:43-48, 롬 1:1-7
<들어가는 말>
501년 전 종교개혁은 당시로는 부패한 제도권 교회를 향한 왜곡된 교리에 반기를 든 개혁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의 면면을 좀 더 세밀히 살펴보면, 결국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그들이 이루어 놓은 공동체의 영성에 대한 개혁운동이었습니다. 즉 왜곡되어져 가는 교리와 말씀의 빛에서 벗어난 실천들에 대해서 'NO'라고 '응답'하였던 운동입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우리 개혁교회가 끊임없이 진행시켜야 할 제3의 종교개혁을 이루어 가야 한다고 역설하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요, 그렇기 때문에 그 구속의 은총에 믿음으로 실천적 응답을 외쳤던 것입니다. 중세의 종교개혁 운동은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운동이었고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 신 7:6~11>
이스라엘의 별칭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입니다. 오늘 신명기 본문에서는 애굽의 종으로 지냈던 암울했던 시절에 구원해 주셨던 일을 회상하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민(聖民)으로 택(擇)함을 받은’ 백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광야생활과 가나안 입성의 과정에서 치열한 싸움을 경험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러한 민족의 전쟁은 신탁의 대리전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신을 대신해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원주민들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양이나 질적으로 우세했습니다. 하드웨어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전쟁에서 야훼 하나님은 3가지 이유로 이스라엘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첫 번째는 ‘민족 중에서 가장 적은’ 이스라엘을 택하십니다.
두 번째는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십니다.
세 번째는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십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약속받았지만 광야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이집트에 있었다면 이런 배고픔과 목마름은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고생은 모세 때문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이집트 노예 생활이 그립다.' 그들은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울부짖고 원망하고 후회했습니다. 결국 그 원망대로 그들은 그 광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어려움은 무덤입니다. 과거가 더 나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약속 따위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 맹세를 통해 현실의 싸움을 이길 힘의 원천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들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과거에 경험했던 좋았던 순간의 기억을 가지고 현실의 문제 앞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주저 앉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가 있습니다. 바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칠흙 같은 인생의 어두운 터널속에서 말씀의 등불을 다시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자리를 비추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살리고 구원하시는 빛이십니다. 그 예수의 빛을 받아서 다시 이 세상의 곳곳에 비추어야 할 사명이 저와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너희도 온전하라! ; 마5:43~48, 롬1: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적은 수였고, 노예였던 결코 온전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격이나 공로가 전혀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그 '영적인 의미'와 '소명적 선택'을 발견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향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의 기준 앞에서 결국 한없이 나약한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많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될 수 있습니까? 나의 의(義)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옷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율법의 요구 앞에서 스스로 온전하고자 시도한다면 결국 바리새파의 폼나는 종교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이르지 못합니다.
선택된 이스라엘(그리스도인)은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자신을 확실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택정함을 입었다’로 해석된 아포리조(ἀφορίζω)는 ‘어떤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두다’, ‘경계선을 확정지었다’라는 의미로 원문에서는 완료 분사형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바울은 복음을 위해 따로 세워두신 하나님의 과거 행동이 현재에 와서 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었고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바울을 복음을 위한 사도로 택하여 따로 세우셨고, 때가 되어 불러주셨기에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기꺼이 종이 되기로 결단했고, 낮은 자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응답하는 교회>
501주년을 맞는 사랑하는 한국 교회! 그리고 부름을 받은 여러분!
사분오열된 한국교회가 성령의 하나 되는 능력으로 일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분단된 이 조국이 십자가 정신으로 하나 되어 화해와 용서를 이루어 통일의 시대를 준비해 가야 합니다. 개발의 논리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무분별하게 훼손하여온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계층, 지역, 이념, 세대 갈등의 문제와 더불어 물질만능, 생명경시, 음란, 폭력, 중독, 자살의 부정의를 극복하고, 무너져가는 가정과 학교, 변두리로 밀려나는 사회적 약소수자들, 이 모든 사회적 문제와 병폐들을 예수 사랑으로 품고, 복음의 능력으로 치유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속해있는 지역사회에서부터 먼저 신뢰받고 인정받는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한국교회가 새롭게 세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루어가려면 우선 교회(나)가 뿌리 깊게 회개하고 가슴을 열어 화합하고 강도 높게 개혁해야 합니다.
그것이 2018년 오늘 이 시대에 구원 역사의 완성을 위하여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며 사는 길입니다.
“종교개혁은 어느 단계에서 정지표 (Period) 가 찍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히 진행하는 생명의 공동체운동입니다. 개혁한 교회만이 아니라 개혁하는 교회라 하겠습니다. 생명은 궤짝 속에 차근차근 넣어 둘 수 있는 “상품” 이 아닙니다. 인간생명은 주격입니다. 이유 없는 탄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언간이 스스로 그 고귀성과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완성은 계속되는 개혁에서만 기대되는 것입니다.”
<장공전집 17권, 개혁하는 교회, p. 22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