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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 " 위대한 나라와 그 백성들 "

관리자 2019-03-04 (월) 16:51 5년전 1097  

교회) 한신(분당)교회 주일설교

                                               

본문) 신4:5-8, 눅8:19-21, 벧전2:5-9

                                                                                                                                                    최 부 옥 목사 (말씀목회연구원장)

 

(반갑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니까, 본 교회 설립자이셨던 고 이중표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선배 목사님께서는 유독 나라와 민족(民族)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셨고, 특히 시대를 이끌어 갈 인물(人物)을 배출하는 일에도 그렇게 관심이 크셨습니다. 

 

마침 며칠 전에는 기미 3.1절 제100주년 기념일도 있었고,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우리 한반도의 평화를 논의했으며, 또 내일부터는 우리의 미래 세대인 자녀들의 새 학기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제가 오늘 이곳에 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증언은 ‘위대한 나라와 그 백성’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오늘 받은 세 본문 말씀이 주신 답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구약 신명기(申命記)서는 지도자 모세의 설교문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기대가 무엇인지를 전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받게 된 본문에는 매우 주목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들어가 살 이스라엘 백성(百姓)을 향한 축복을 전한 내용입니다. 내용은 바로, 그들이 ‘큰 나라, 큰 백성’으로 사는 일이었습니다(6-8절). 그것은 당시 광야에서 40여 년간 떠돌이로 살아가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하면, 받기에 너무 크고 버거운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축복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잠시 그 후 약 4,0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체를 들여 다 봅시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지금의 이스라엘이 큰 나라 백성 같습니까, 아니면 그냥 작은 나라 백성에 불과합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든 지금의 이스라엘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놀랄 것이 참 많습니다. 우선은 땅덩어리 면적이 너무나 적은 데에 놀라고, 그들의 내면의 크기나 세계에 미친 영향력의 크기(힘) 때문에도 또 놀랍니다. 

 

그들의 땅 면적은 우리 한반도의 1/10정도에 불과하게 적습니다. 하지만, 그들 이스라엘이 지금의 세계 모든 분야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가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이스라엘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評價)는, 그들 민족이 지구촌에서 차지한 노벨상 수상자 비율(比率)일 것입니다. 전체 노벨상의 1/3정도에 가까운 수상자가 이스라엘 출신임을 잘 알려진 일입니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이제 1명에 불과한 것과 비교해보면, 정말 엄청나고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지금의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배후의 주역들은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동(中東)이란 큰 땅덩어리와 압도적인 아랍인들 틈새에서도, 전혀 밀리지 아니하는 그들의 힘과 저력은 실로 경이(驚異)롭기까지 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주변의 4대 강국의 틈새에서 시달리며 살아온 모습과는 그 점에서도 크게 비교가 될 정도입니다. 

 

그 점에서 이스라엘은 지구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작은 대국(大國)’의 모델입니다. 그들은 지금 비록 땅덩어리가 작고, 인구 역시 많지 않아도, 얼마든지 크고 위대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음을 온 세상에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현 어려운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출구(出口)가 필요한 우리에게도, 신선(新鮮)한 도전(挑戰)과 함께, 우리의 위기를 극복하게 할 귀한 자료(資料)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용어(用語)상으로 확인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큰 나라’라는 표현을 다른 성경 번역들에서 보니까, 양적 크기의 ‘BIG'이 아니라, 질적 크기의 ’Great'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덩치와 수량(數量)의 많음에서 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그 됨됨이에서 크고 위대함을 담고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계획하신 ‘큰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사람의 수에서나 땅의 크기 차원에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 그 어느 민족보다도, 삶의 내용상에서, 영향력에 있어서, 품질의 수준에 있어서, 그리고 가치에 있어서, 당신의 백성이 다른 나라의 백성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들이요 인물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같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도 이제는, 관심을 수량적(數量的)인 것을 벗어나, 질적(質的)이고 내용적인 것을 우선하는 차원으로 전환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위대한 백성, 위대한 나라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의 세 본문 말씀에서 담고 있는 내용을 네 가지 부분에서 전하겠습니다!  

 

1)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고(寶庫)인 여호와의 말씀(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 행하면, 그는 반드시 크고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6절).

인간은 그 내면 세계란 그릇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품질과 수준이 결정됩니다. 최고의 것을 담고 있으면 최고가 되고, 최하의 것을 담고 있으면 최하의 인생이 됩니다. 하늘의 것을 담고 있으면 하늘 사람이 되지만, 땅의 것만 담고 있으면 땅의 사람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하늘의 말씀과 영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짧은 차원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늘 생명의 차원이 공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성, 공공성, 탁월성, 초월성 면에서도 차원 높은 계명과 윤리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맛과 능력을 일찍부터 받아 활용한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특히 저들은 광야 40년을 감당하고, 또 약속의 땅 가나안을 취하는 된 모든 일들도 결국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좇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2,000여년 해체(解體)당한 나라의 오랜 비극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들과 가정을 지켜내면서, 오늘의 이스라엘을 복원해낸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율법을 삶의 양식으로 취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 이스라엘의 수천 년간에 이어온 일관(一貫)된 삶의 일과는 이렇습니다. 아침에는 가정의 아빠로부터 토라 교육을, 오전 교육은 학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발표하고 토론하며, 오후에 가서야 세상 삶에 필요한 교육을 받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학과(學課) 운영(運營)방식입니다. 즉 그들은 세상 교육과 학문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실천할 삶이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학문과 직업 영역은 그 말씀을 실현할 곳으로서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접근법과는 완전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상위 개념으로 두지 않습니다. 목표는 언제나 세상 분야이고 직업전선입니다. 그곳에 잘 들어가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의 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게 아닙니다. 세상과 직업 전선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영광을 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필요할 뿐입니다. 즉 영적 교육과 가치를 우위에 두고, 그 기반에서 세상 교육을 실천해 갑니다. 예수님의 마6:33절도 바로 그 기반 위에서 나온 제자교육 헌장이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의 결과는 어떨까요? 저들은 모든 교육의 기반을 하나님의 말씀 교육에 두면서, 거기에서 얻어진 탁월한 기억력과 암기력과 토론에서 습득된 폭넓은 사고력까지도 발휘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그 어느 나라 백성들과도 비교가 되지 아니할만한 이론과 논리에서 우월성과 탁월성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들이 전 인류사에서 가장 크게 받은 축복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들이 받은 축복의 실체는 ‘인류의 머리와 두뇌(頭腦)가 되는 것’이었습니다(신28:13)! 다른 민족이 못 보는 차원을 보고, 못 듣는 소리를 듣고, 전하지 못했던 것을 전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세계 4대 종교가 그들에게서 나오고, 전 인류는 그들이 전하는 소식을 통하여 구원의 문에 들어가잖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교육정책 방향을 수립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현실적으로 우리는 다종교사회이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그들 유대인처럼 종교교육을 실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가정의 부모들은 저들 성서의 백성들에게서 벤치마킹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지혜와 지식을 풍부히 습득하게 하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 직업(職業)을 찾도록 도우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믿음, 즉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우리 자녀를 살린다는 믿음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그 어떤 세상의 교육도 결코 제 빛을 볼 수가 없고, 우리 자녀들도 제대로 살 수 없음을 아는 데에서 나옵니다. 오늘의 이 세상이 이 정도로 악하고 타락한 것은, 세상 교육을 풍부히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無視)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크고 위대한 백성이 됩니다(7절).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당신과 가까이 함으로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깊은 영적 훈련과 그와 동행하는 습관(習慣)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삶을 익히는 일입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으로 무장하고 사는 일입니다. 

 

이런 삶의 훈련이 잘 뿌리를 내리면, 그에게서 품어 나오는 모습은 결코 일반인들과는 그 결이 같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차원 높은 행동과 환경과 상황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발휘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애굽의 노예에서 일약 그 나라와 온 백성을 살려낸 총리가 된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고, 바벨론의 포로기에서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제국의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하다가,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시대가 열리자 자기 백성을 무사히 귀환(歸還)할 수 있게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의 공통점은 어떤 경우에도, 환경이나 국가 권력이나 인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하며 그의 뜻을 드러내는 일에 전력(全力)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행(同行)과 임재의 삶은 ‘크신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 줄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놀라우시며, 은혜롭고 정의(正義)로우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성품도 가지신 분이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의 성정을 뛰어 넘는 놀라운 인격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과의 동행에 힘쓰는 사람’은 자연히 인간 일반의 모습보다는 신(神)의 품성과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반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는 위대하고 큰 인격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대표적인 의인(義人)인 에녹과 노아가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5:22, 6:9).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Walk with Gold)하였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승천한 첫 인물로 기록되었고,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였기에, 세상의 극심한 죄악과 타락으로 대홍수로 온 세상이 진멸당할 때, 그의 8명의 가족들과 함께 살아남아서, 다시 시작하는 새 역사의 주역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으로서 이 세상 역사의 주체로 살아가려면, 꼭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고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는 반드시 옵니다. 금방 옵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흔들림 없이 보여주는 일입니다! 

 

3) 우리의 후손들을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와 그 나라의 백성으로 키워낼 때, 큰 인물 위대한 인물이 나옵니다’ (눅8:19-).

우리는 보통 우리 집안이나 가문에 적합한 인물 배양에 심혈을 기우려 왔습니다. 하지만, 정말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나라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을 생산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 만들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적합한 자식을 육성하는 차원의 노력이 선행(先行)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적합한 인물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도록 육성하여야 합니다. 그런 토양과 문화가 마련이 되어야, 비로소 다음 세대를 책임질 든든한 일꾼들이 나오지 아니하겠습니까? 

 

이런 ‘차원이 다른 삶의 방향’을 제시하신 분이 바로 우리 나사렛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는 출가한 당신에 대한 악소문(惡所聞)에 시달렸던 가족들이, 참다못해 당신을 데리러 왔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렇게 입을 여셨습니다. 

‘(도대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며 어머니이니라’(막3:33-35)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이 유대인이란 제한된 영역에만 머물 존재들이 아 닌, 하나님의 뜻을 세계 속의 펼치는 세계인이 되기를 바라셨던 뜻을 담은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요 하늘 시민이라는 큰 정체성을 담은 새로운 존재인식을 가져야 비로소, 위대한 백성과 위대한 나라가 가능하심을 지적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를 담아낼 종교가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 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생산하려는 제대로 된 접근이 잘 되지 못한 연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신도들을 내 교회에 적합한 일꾼들로는 만들었으나,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는 꼭 필요한 소금과 빛 된 존재들을 재생산 해내지 못한 연고입니다. 그 바람에, 교회에는 좋은 교인들인데도, 세상에는 맛 잃은 소금이 된 자들이 범람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교육 방향의 대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의 거리를 좁힐 신앙교육이 실시되어야 합니다. 그 대안을 놀랍게 베드로가 증언해 줍니다.

 

4) 교회와 신도들이 세상에서 자리 잡을 가장 적합한 위치를, 예수의 ‘모통이 머릿돌’이란 자리와 그 영성(靈性)에서 찾으면 큰 인물이 됩니다(벧전). 

여러분은 ‘모퉁이 머릿돌’이란 말을 들어 보셨지요? 그 용어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별칭(別稱)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와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의 ‘모퉁이 머릿돌’이셨다고 지칭했습니다. 

 

모퉁이 머릿돌은 도대체 어떤 돌입니까? 그 돌만의 생김새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돌입니다. 건축자가 공사 중에 필요치 않다고 버린 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돌은 그 돌을 볼 줄 아는 건축자의 손에 들리게 되면, 역할(役割)은 아주 신비스럽게 변합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아주 독보적(獨步的)인 역할을 그가 그 한 가운데 들어서서 해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주변에도 간혹 그런 놀라운 인물(人物)이 눈에 띄지 않습니까? 그가 그곳에 들어가면, 그간 쌓였던 모든 문제들을 일시에 해결하는 마치 ‘마스터 키’ 같은 존재 말입니다. 그런 인물이 교회에 있고, 국가에도 있고, 세상에 있고, 또 가정 안에도 있으면, 그곳은 문제가 해결되면서 평화가 임합니다. 분쟁이 그치고 하나가 됩니다. 

 

다시 봅시다. 모퉁이 머릿돌은 코너 스톤이 아니라, 모든 돌들을 이어주는 중심(中心)돌입니다. 특히 아치형 구조에서 이 돌을 설명하기가 쉽습니다. 양쪽에서부터 서로 다른 돌들이 간격을 좁히며 올라와 최정점(最頂点)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그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그 정상의 자리에 끼어 들게 된 돌입니다. 그래서 그 돌 때문에, 서로 다른 돌들이 만나서 하나 되고, 교통이 가능해지며, 한 가족이 되고, 한 공동체인 교회도 됩니다. 실로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는 신비하고 기이한 돌이지요! 

 

사도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에게서 그 모통이 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퉁이 머릿돌 예수 때문에, 모든 민족을 향한 선교와 화해와 일치와 평화가 가능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종, 종교, 문화, 빈부귀천, 남녀노소, 학식유무, 모든 다름과 차별들, 나눠지고 갈라짐 들을 다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품과 사랑을 예수와 그의 십자가 속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머릿돌’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그의 사랑이, 분열과 대립으로 망해가는 시대의 구원을 위하여 가장 필요하다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역할과 필요성(必要性)에서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는 각 가지 분열과 분단의 오래 된 아픔과 부끄러움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우리 교회들마저 한없이 갈가리 분열되어, 백성들을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하고, 심지어는 평화통일의 훼방 세력의 일원으로 지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정치와 사회의 분열과 대립상도 극심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고려하면, 이 모퉁이 머릿돌 예수의 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우리 한신공동체가 바로 그 모퉁이 머릿돌의 위치와 역할을 맡아서 평화와 화해를 주도하게 된다면, 교회는 물론 나라와 세계까지도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이곳 경기도 분당에서 새로운 선교의 무대를 활짝 열어갈 비전을 가진 우리 한신(韓信)교회 가족들은, 오늘 주신 말씀들을 생각하며, 진정 위대한 나라와 그 백성. 그리고 위대한 교회의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 한신교회와 성도들의 미래 행보에 큰 디딤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9. 3. 3 / Ⅱ-Ⅲ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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