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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기고문 - " 사닥다리 계시와 교회력 설교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18-06-19 (화) 17:09 5년전 1590  

 - 창28:10-14,눅24:44-48,계1:1-3를 중심으로 -

 

20세기 세계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K. Barth의 기념비적 대작인 교회교의학(Churh Dogmatics) 13권이 한국의 바르트 연구 학자들의 합작으로 완역되어 대한기독교서회에 의하여 최근에 출간되었다고 합니다(국민일보6.4). 매우 반갑고 기쁘고 축하할 사건이라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바르트의 이 교의학 책은 중세시대의 카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개혁교회 신학자인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에 능히 필적할만한 대작으로 손꼽히고 있어서 더욱 반갑습니다. 

 

바르트는 이 책을 1967년부터 30여년 넘게 무려 8500여 쪽의 방대한 내용의 시리즈로 집필하면서, 고대와 중세기 교부들은 물론 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뱅 등의 종교개혁자들,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입장까지도 소화시키며 복음의 실체를 담아냈습니다. 

 

바르트는 서론에 해당하는 1부(1-2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자신의 교의학의 뿌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삼중 형식에 따라 기술했습니다. 2부(1-2권)인 신론에선 ‘자유’와 ‘은총의 선택’,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그리스도교 윤리로 묶어내었습니다. 3부(1-2-3-4권)인 창조론과 인간론에서는 창조 세계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을 윤리적 차원에서 살폈습니다. 

 

그의 교의학의 핵심으로 꼽히는 4부(1-2-3/1-3/2 4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아들로, 중보자로서의 예수에 대하여 썼습니다. 4부의 4권의 집필은 78세에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주기도문 해설과 성만찬론과 세례론을 논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세례론 만 기술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정된 5부의 구원론과 종말론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총 13권의 총서만 남기도 가신 것입니다. 이 채워야할 부분들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라고 판단됩니다. 

 

그의 신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합니다. 초기 한국 신학자들의 바르트 신학접목은 대부분 일본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그의 신학이 한국교회에 들고 들어올 때에는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한신을 중심한 진보 그룹에서는 제대로 된 세계적 신학을 맛볼 수 있는 출구로 여기면서 그의 신학에 깊이 빠져들었으나, 보수층에서는 ‘자유주의 신학’, ‘용공주의 신학’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비판과 견제를 심하게 하였습니다. 마치 그들이 최근에 WCC를 용공이며 마귀 신학이라고 대하듯 말입니다. 

 

                                     *   *   *

 

흥미로운 사건이 기억납니다. 보수 신학자요 목회자인 합동 측의 조동진목사가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하기 위하여 네델란드 신학자인 G.C.Berkouwer이 쓴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arth Barth>의 책을 1968년 에 번역하여 국내에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동기는 바르트 비판과 배척의 소재로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재 상황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작 그의 책을 읽어 본 독자들과 목회자들은 그의 신학과 신앙이 얼마나 말씀 중심적이고 복음적인 것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수주의자가 바르트 신학을 선전하게 된 것입니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격이었습니다. 

 

그 책 덕택에 나도 <바르트의 선택론>(2/2권, 전반부)으로 한국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74)을 쓰는 데, 적잖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바르트에 대한 한국어판 자료가 아주 희귀했는데-, 그의 번역판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때, 나는 그의 글을 접하면서 바르트야말로 진정한 복음 전파의 차원 높은 대 부흥사였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복음과 말씀을 향한 뜨거운 열정에 내가 깊이 빠져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영향력이 나에게도 너무 컸기에, 그를 만난 지 50여년이 가까워진 지금도, 그가 추구하는 말씀과 복음의 세계를 호흡하고 전하기 위하여 목회현장을 떠난 지금도, 말씀목회연구원(www.wpci.kr)을 창립하여 한국교회와 설교자들을 섬기게 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지난 2013년도에는 우리 부부가 스위스 방문길에서, 바젤의 ‘브르더홀츠 알레’가 26번지에 위치한 바르트 유택(幽宅)까지 직접 방문하여, 그의 생전과 사후의 모습을 감격스럽게 호흡하고 돌아오기까지도 했습니다. 

 

아무튼 한국교회에서의 바르트 신학 논쟁의 후유증은 컸습니다. 바르트의 성서영감론을 놓고, 문자 및 축자적 영감론을 강조한 보수주의 정통신학자들은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비난하고 배척한 입장을 고수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신학을 철학적 합리주의와 현실주의 등을 활용하여 변증법적 신학의 영역을 새롭게 제시한 신(新)정통주의 신학의 지평을 열어준 대표적 인물로 인정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열된 게, 바로 한국의 최대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 측과 통합 측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이번 바르트 교회교의학 전권 한국어판 출간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배워서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이 끝나고, 그가 가진 폭넓은 복음과 말씀에 대한 이해 속에서 온 교회 특히 장로교단이 하나가 되는 기적의 열매들이 맺혀지길 소망해 봅니다. 

 

                                   *   *   * 

 

내가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13권 완역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르트가 그토록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히 받았던 계시와 영감이 마치 성서의 족장(族長)이었던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노숙(露宿)하며 하란으로 가던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일명 <사닥다리 계시>(창28:12-13,19)를 받은 ‘바로 그 사람’과 같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실질적인 ‘조상 중의 조상’입니다. 그의 허리에서 생산된 12명들이 모두 이스라엘 12지파들의 조상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관련된 지금의 4대 종단들(유대교-이슬람-카톨릭-개신교)도 모두 그의 후손들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받았던 창28장에서의 <사닥다리 계시>는 매우 독특한 계시로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늘과 땅을 이어줄 대표적인 인물로 선택하셨음을 보여 준 구체적인 암시(暗示)였습니다. 

 

사닥다리(ladder, stairway)는 양쪽을 이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야곱의 경우는 그가 잠자던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닥다리였습니다(12-13절). 야곱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사닥다리였습니다. 이어주되, 그것은 양쪽 줄만의 이음이 아니라, 그 사이를 밑에서부터 위로 단계(段階)별로도 이어줌을 말합니다. 한 단계, 한 단계를 차근차근히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주는 계시가 바로 야곱의 사닥다리 계시였습니다. 그 단계들 사이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야곱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 놀라움과 환상의 충격과 감동의 힘은 떠돌이 청년 야곱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자기 인생 전체를 걸고 그 때 받은 약속(보화)의 실현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인물이 되게 했습니다. 

 

신학이나 신앙도 사닥다리 계시와 같다고 봅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인간을 하나님께 이어주는 선(線)들이지만, 그러나 그 선 안에는 각가지 디디고 밟아 올라가야만 할 제반(諸般)의 신학적 단계들과 신앙적 단계들이 엄존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신학이란 큰 하나의 덩치 속에는 신구약을 포함한 성서신학, 조직신학, 교회사, 윤리학, 기독교교육, 목회학, 설교학, 예배학, 및 각 가지 상황 신학들이 계단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무시한 신학훈련은 사실상 빈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신학도로서 실패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신학생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수준에 맞게 매 학년별로 step by step으로 각 분야별 신학 이수(履修)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정상적인 단계를 다 밟아야만, 비로소 건강하고 균형 잡힌 목회자와 설교자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야곱의 사닥다리 계시로 비유하고 있음은, 그의 교의학이 담아내고 있는 제반 13가지의 신학적 논제들(앞에서 소개함)이 모두 우리 신학도(神學徒)들이 반드시 밟고 이수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핵심 주제들을 담고 있는 계단(階段)과 같은 것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   *   *

 

세상은 전체(全體)로만 있지 않습니다. 개체(個體)들로도 존재합니다. 세상도 사닥다리 체제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전체로서의 하나와 개체로서의 디딤돌, 이 둘은 분리하면 안 됩니다.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도자는 전체 속에서 개체도 보고, 개체를 통하여 전체도 보는 훈련을 잘 해야 비로소 건강한 식견과 안목을 가진 이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년 보내는 한 해도, 알고 보면 24개의 개체 절기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압니다. 농사하시는 분들, 사업하시는 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참조 지침들입니다. 지금 지방자치장 선거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앙정부 하나만 잘해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전국의 17개의 광역단체들도 함께 잘해야 온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수백 개의 시군단위의 지자체들도 역할을 잘해주어야 온전합니다. 

 

그런데 신학(神學)세계에만 사닥다리 주제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신앙(信仰)의 세계에도 사닥다리 계시들이 있습니다. 성서 66권은 ‘무조건 믿어라’는 식의 맹목적 신앙을 소개한 곳이 아니라, ‘이런 눈으로 믿어라’라는 지침들이 다양하게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길, 인간에게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며 사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교회력(敎會曆)에 따른 세 본문 설교를 오랫동안 해오면서, 이 신앙세계에 펼쳐져 있는 그 사닥다리 계시들을 놀랍게 발견했습니다. 교회력이란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소중하게 유지되어온 교회의 설교와 교육의 체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1년 주기로 묶어 정리하여 지키되, 그 생애가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서 나타난 것이며 또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온 세상에 복음으로 전파되고 실천되어진 것임을 인정받으며 형성된 절기 시스템입니다. 

 

기독교 교회력은 7절기들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우리 교단이 새 역사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채택한 바 있는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에 따르면, 창조절(創造節)로부터 시작하여 대림절(待臨節)-성탄절(聖誕節)-주현절(主顯節)-사순절(四旬節)-부활절(復活節)-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기로 이어지는 7절기가 있습니다. 

 

그 절기를 좇아가 보면, 누구나 신앙세계의 사닥다리를 만나게 되는데, 땅에서 하늘에 오르고 하늘에서 땅에 내리는 단계들을 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이 인간에서 찾아오시는 디딤돌들을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제시된 신앙의 제반 단계들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차근차근 밟고 오르는 일입니다. 바르트는 그 단계들을 신학적 주제들로 채워가며 제시하였습니다만, 놀랍게도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말씀들 역시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나아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참고로 신학과 신앙의 차이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신학(神學)은 우리의 지식과 깨우침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학문적 이론적 도우미입니다. 신앙(信仰)은 그런 신학의 정보에 공감(共感)하며 그 내용을 내 가슴에 받아들이며, 내 생의 지표로 삼고 따라 사는 영적 대응입니다)

 

내가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에서 만난, 그 사닥다리 신앙 계단들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1) 창조(創造) 신앙입니다. 온 천지 만물의 주권(主權)이 하나님 여호와께 있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천지와 인간과 그 세상 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동시에 그의 창조 사역은 완성형이면서 동시에 진행형임도 믿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그가 내 주인(主人)이심을 믿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요 백성이며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그의 창조 세계의 파트너로서 그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2) 선택(選擇) 신앙입니다. 예정(豫定) 신앙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은혜로운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 땅에서 주도적으로 선도하는 계보에 속한 바를 믿는 신앙입니다. 구약의 셈족과 그의 후손들인 족장들이 모두 그 계보에 속한 자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 무리들입니다. 임마누엘 신앙도 여기에서 말하게 됩니다. 

 

3) 해방(解放) 신앙입니다. 희년(禧年)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바로의 학정과 박해와 억압의 굴레에서 탄식하고 신음하던 히브리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며,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자유케 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젖과 꿀이 흐르는 새 하늘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해방의 하나님을 믿고 그를 따르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언제나 고난 당하는 낮은 자와 낮은 곳을 향합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 출정식에서 선포된 희년(禧年) 신앙의 근저(根柢)이기도 합니다(사61:1-,눅4:18-19참조). 인간들에게 부여되었으나 실재로는 마귀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주는 일이 메시아의 사역임을 믿는 신앙입니다. 

 

4) 언약(言約) 신앙입니다. 계약(契約) 신앙으로도 봅니다. 하나님은 택하여 부르시고 세우신 당신의 백성들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하여, 약속을 주시고 언약을 맺는 분이십니다. 구두(口頭)로도 하시지만, 기록된 말씀들로도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들은 모두 언약 신앙을 위한 것들입니다. 구약(舊約)이나 신약(新約) 모두가 이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분이시고, 또 반드시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점이 우리가 그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할 이유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들은 그와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5) 섭리(攝理)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지혜는 세상과 인간의 것보다 선하고 우선하며 탁월하여, 우리는 그의 뜻에 복종하고 따르는 믿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에 앞서서 일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셉의 시련, 히브리 백성의 이집트에서의 고난, 그들의 광야 40년 생활, 그들의 오랜 바벨론 포로생활, 디아스포라들의 오랜 해외 떠돌이 생활, 기타 크고 작은 집단이나 개인이거나 이 섭리의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만 풀리게 되는 일들이 가득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서 의미 있는 증언들을 많이 했습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서게 일과 함께, 고전1:25, 롬8:28 등에서 섭리 신앙의 지침을 제시합니다. 

 

6) 구속(救贖) 신앙입니다. 대속(代贖) 신앙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신앙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관계 복원을 위하여 희생(犧牲) 제물과 제사가 필요함을 믿는 신앙입니다. 제물의 기본 요건은 흠 없는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처음에는 양과 염소 등의 짐승들이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되는 속죄물이었습니다. 가축의 생명인 피를 인간의 죄 씻음의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첫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 그 기원입니다. 짐승 제물 중 아사셀 염소는 대표적입니다(레16:10). 나중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께서 저 십자가에서 친히 속죄제물이 되셔서(요1:29), 더 이상의 짐승의 희생을 끝내시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에게는 누구나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7) 첫 열매 신앙입니. 이스라엘 신앙에 있어서 첫 것(Firstborn)의 의미와 비중은 대단합니다. 소위 장자의 특권과 무게가 남달랐습니다. 사람은 물론, 짐승을 막론하고 처음 난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했습니다(13:2). 장자들의 무책임한 대응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을 하셨어도, 그러나 처음 것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받치는 일은 엄격했고 또 받으신 하나님도 기뻐하셨습니다. 첫 예배인인 아벨도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4:4참조).

 

이 신앙은 첫 것이 잘되어야 나중의 것들도 잘 된다는 믿음을 나면서, 서원(誓願)신앙으로도 이어지고, 인간의 각 영역에 걸친 첫 번째 것에 대한 성별(聖別)신앙으로도 이어져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성미 등등의 믿음생활의 큰 줄기들을 세우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8) 화육(化肉) 신앙입니다. 성육신(成肉身) 신앙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늘의 하나님이 낮고 천한 인간이 되어 오셨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영원자가 유한자의 몸을 입고 내려오심을 믿는 신앙입니다. 당신을 과시하시고 군림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 인간됨을 친히 체휼(體恤)하시고 도와서 구원에 이르도록 돕기 위함을 믿는 신앙입니다. 오시되 성령에 의한 동정녀(童貞女) 탄생으로 오신 이유도 담고 있는 신앙입니다.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원천적으로 무흠(無欠)한 존재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진정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신 분이신지를 보여 준 매우 구체적인 증거가 된 신앙입니다. 

 

9) 고난(苦難) 신앙입니다. 십자가 신앙 및 연단(鍊鍛) 신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롬5:4). 이 신앙은 자기의 범죄나 과오로 인한 징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드러내고 더 귀한 존재로 쓰임 받기 위하여 당하는 시련에서 맛봅니다. 또한 공동체나 이웃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짊어지는 책임과 멍에가 피할 수 없이 있음을 믿는 데에서 나옵니다. 새 세상을 열기 위한 해산의 아픔이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영원한 모델입니다. 이 고난은 고난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부활로 이르는 지름길이요 통로이기에 귀한 것입니다. 이 신앙이 있으면, 환란과 박해와 억압도 가벼워집니다. 그 너머를 바라보는 밝고 긍정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10) 부활(復活) 신앙입니다. 생명(生命) 신앙이기도 합니다(요11:25). 영생(永生) 신앙의 문이기도 합니다(요11:26). 어둠과 불의와 거짓이 빛과 진리와 정의를 이길 수 없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런 점에서 승리(勝利)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최악의 위협 세력인 죽음의 허상과 그 한계를 폭로해 낸 실체가 바로 이 부활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불의한 세상의 권세에 의하여 십자가의 형장에서 참혹하게 대속의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의해 제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영원히 죽지 않으시고, 그들 믿는 모든 자들의 구세주가 되셨음에 기인합니다. 그로 인해 예수는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그를 살리신 부활의 영을 받아 그를 믿고 사는 우리도 결국 예수와 함께 죽을 몸에서 다시 살게 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모든 기독교 신앙 영역의 최고 핵심이랄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는 이 부활 신앙의 빛으로 쓰인 증언들이기 때문입니다. 

 

11) 승천(昇天) 신앙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하늘로 ‘들림 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신앙입니다.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과 더불어 예수님의 승천이 믿는 자에게는 이 승천 신앙을 품게 하였습니다. 이 신앙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보게 하였고, 죽음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간주 하게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다시 오실 주님을 깨어 맞이할 종말론(終末論)적 삶을 기쁨으로 살게 하였습니다. 이 신앙 때문에, 마가요한의 다락방의 공동체는 예수와의 이별을 슬픔이 아니라 다시 만날 기대 속에서 깨어서 기도하고 기다리며 성령 시대를 준비할 수 있었고 끝내는 성령과 교회 시대의 주역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건강한 이 신앙의 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매우 큰 역동성을 부여한다고 봅니다. 

 

12) 재림(再臨) 신앙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재림 신앙은 두 갈래로 우리에게 진화된 신앙의 길들을 열어주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늘에 오르신 주님이 그의 백성들을 데리러 다시 오신다는 신앙입니다(행1:11). 사실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초대교회 신앙 선배들은 이 다시 오실 예수를 맞이하려고 열렬히 응답하며 지냈습니다. 순교자들도 이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로마의 카타콤베 신앙이나 터키의 갑바도기아 신앙의 유산도 모두 이 신앙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재림의 주님은 초림(初臨)의 주와는 달리 심판의 주로 오시기 때문에, 이 신앙인들은 항상 깨어 마지막에 있을 영원한 심판에 대비하여 경건과 두려움에서 살았습니다(고후5:10). 오늘의 기독교가 크게 힘을 잃어가는 까닭은 세상의 풍료로움에 빠져서 이 재림 신앙이 고갈된 더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13) 종말(終末) 신앙입니다. 성령은 본질상 종말론적인 영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指向)하며 살도록 언제나 우리를 깨우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약속된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상황에 연연(連延)하지 않고, 그의 뜻을 헤아리며 항상 그 분과 그의 심판 앞에서 서서 살아가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신앙이 바로 종말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지금 여기’에서의 시간을 ‘오메가 포인트’로 보게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응답하며 사는 일을 지고의 가치로 간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과 보다는 과정에 대한 책임과 결단을 중시(重視)합니다. 살전5:16-18의 바울의 증언이 우리의 종말 신앙의 근간으로 봅니다. 말세 대응용 신앙입니다. 

 

14) 은총(恩寵) 신앙입니다. 매사에 받은 은혜(恩惠)를 깨닫고 감사(感謝)하는 신앙입니다. 특히 받을 자격이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거져 주신 은혜로 사는 것에 감사로 반응하는 신앙입니다. 알고 보면 내가 원해서 받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생에서 없어서는 아니 되는 모든 것은 다 내 생존을 위해 조물주께서 주신 것들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먼저 계셔서 나란 존재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내 부모와 내 가정, 내 형제자매와 이웃들,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과 온 세계, 내가 살 나라와 백성들, 내 영혼을 위한 복음과 교회, 나를 양육시키고 키워주는 학교와 모든 교육시설, 내 안에 주어진 지각과 재능들, 건강과 삶에 도움이 될 다양한 정보들을 안겨주셔서 나를 살게 하시니---, 생각할수록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욥이 이 은총의 신앙으로 그토록 험한 고난을 극복한 모델입니다(욥1:20-22참조). 바울도 그랬지요! (살전5:16-).  

 

15) 영생(永生) 신앙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신앙이기도 합니다. 이 신앙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 범한 행위들을 기록한 생명책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인 둘째 사망(불못)을 넘어선 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준비한 영원한 나라를 믿는 신앙입니다(계20:11-22:5). 천당(天堂) 개념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이 옳습니다. 이 신앙은 사닥다리 신앙의 종착지에 위치합니다. 교회는 교우들에게 늘 그 나라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도록 지도해야 마땅합니다. 노인 세대가 많아지는 요즈음엔 더욱 천국 백성의 대비를 잘하도록 신앙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 나라도 자세히 가르쳐야 하겠고, 그 나라를 상속할 자로서의 영적 품격도 잘 갖추고 살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내 영혼이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평화와 기쁨 속에서 떠나게 됩니다. 이 신앙까지 소유해야 합니다!

 

                                     *   *   *

 

이 사닥다리 계시 속에 들어있는 신앙의 단계들에 대한 증언들이 어떠했습니까? 아마도 하나하나의 신앙의 주제들이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설교에서는 끊임없이 증거해 온 내용들이었을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신도들에게는 이런 신앙의 유형들이 체계적으로 소개되지 못하고, 너무도 단편적이거나 무분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 바람에 균형 있는 건강한 신앙인들을 생산해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지금의 소위 ‘태극기부대’에 참여하는 극우 세력들의 주축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훈련의 과오에서 기인한 것 아닙니까? 이 모든 책임은 평신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목회자요 설교자에게 있습니다. 목회자인 우리부터가 사닥다리 계시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지내왔기 때문이며, 그래서 평신도들이 이 영역에 무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왜 사닥다리 계시를 주시면서, 그 거창한 역사의 주역으로 그를 세우겠다고 언약하셨는지를 말입니다. 동시에, 그런 선(先)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야곱이 어떤 서원(誓願)을 드리며,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닥다리 계시에는 우리의 안이한 태도를 거부합니다. 한발 한발 그 발걸음이 무겁지만, 그러나 책임 있게 디디며 올라가는 행보만이 있을 뿐입니다. 화려한 점프나 놀라운 초자연적 기적은 거부합니다. 우직하게 그러나 차근차근 오직 앞만을 향해 올라가면, 머잖아 약속의 가나안에 반드시 도달하리라는 믿음만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신도들이 그들의 목자들에게 진심으로 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실한 목자가 아닐까요? 이제 한국교회는 지난 20세기의 초보적 발걸음에서 떠나야 합니다. 21세기에 걸 맞는 보다 성숙한 신앙인의 발걸음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 대답은 바깥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야곱에게 계시된 사닥다리 행보의 신학과 신앙을 습득하려는 우직한 목회자 설교자들의 충성된 행보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살려낼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설교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닥다리 계단을 놓치지 않고 밟고 올라갈 충분한 단계들이 든든히 설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강단과 신도들의 영적 욕구를 충분히 채워 줄 자원들이 넉넉히 매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세 본문이라고 미리 부담을 느끼며 회피하지 말고, 먼저 동참하여 사닥다리를 밟아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우리를 모든 생명들을 성숙하게 돌보도록 잘 도우실 것입니다. 새 역사, 새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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