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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15) - 인생 9학년 졸업생들을 위한 추모의 글 (2)

관리자 2020-05-01 (금) 19:14 3년전 777  

김인호 목사님에 대하여

 

김 목사님과의 만남은 내가 일본 유학 후, 1985년부터의 서울남노회에 같은 노회원이 되고, 또 1994년의 동노회 분립 후에는 같은 강남시찰회의 시찰회원이 된 후에 본격화되었다. 그 전에는 다소 멀리서 뵈는 선배 목사님으로서, 늘 활화산 같이 뜨겁고 적극적이며 따뜻한 품성과 덕성과 영성을 가진 열정적인 목회자로만 생각되었던 분이었다. 

 

1931년 전남 영암에서 출생하신 목사님은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을 갖게 되면서, 자기 자신의 판(영역)은 물론, 자기가 만나는 모든 대상과 교회들과 상황들의 판을 놀랍게 바꾸어 놓는 능력자로 평생을 사신 분이었다. 믿어도 제대로 믿은 신앙의 전사였음이다. 말씀대로 믿고 믿는 대로 행하면서 사셨기에, 그에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들이 잇달아 발생한 것이었다. 참 두 달란트-다섯 달란트 인생을 살아오셨다.

 

그의 모습들을 이 지면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를 생각하는 증언들도 풍성할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나와 관련된 차원에서 몇 가지 기억될만한 이들을 담으려한다. 이 목회서신을 쓰면서 내 스스로 놀라고 있다. 한 인물을 들여다보고 대하려니, 그의 역사와 그 주변의 역사가 동시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리할 수 있는 대목들 몇을 올려본다. 

 

1) 어린아이와 같으셨다. 유치하거나 미련해서가 아니라 천진난만하셨음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그 점은 목사님 안에 항상 하늘나라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 모습 때문에 목사님은 항상 웃으셨고 밝게 상대와 사물을 보시며 즐기실 수 있었다. 물론 바로 그 품성 때문에 배신도 받고 상처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목사님은 먼저 믿고 보고 먼저 주고 보는 삶을 견지하셨다. 그 뒤는 다 하나님께 맡기시며 사신 것이다. 그런 모습이 나는 무척 좋았다. 

 

2) 매사에 열심하셨고 맡은 일에 충성하셨다. 그에게 대충하고 지나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후배들에게 격려와 축복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그중 나를 향한 신뢰와 축복은 끊임없으셨다. 과분한 긍정과 칭찬이 많았다. 아마도 ‘더욱 힘내라’고 그러셨다고 판단했다. 목회와 노회와 총회를 섬기고 돌보시는 일에도 목사님은 정성을 다하셨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이 목사님의 사역에는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고 본다. 목회와 교회 일에 대한 우선순위가 확실하셨기에, 가족들 돌봄에는 아쉬움이 많았으리라고 본다 

 

3) 교단은 물론, 교계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다. 그는 풍부한 덕성과 인격을 가진 지도자로서도 큰 존경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적 입장에 따라, 교단이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인권과 사회선교에 집중하는 바람에, 빈곤해 있던 교단내의 교회의 빈곤한 현실에 아픔을 가지셨던 목사님은, 교단의 그 기우러진 운동장의 넓이와 폭의 부족과 균형을 채우기 위해 뜻있는 동료 목회자들(오병직-한상면-김정현-조규향-김수배-이중표-조원길 목사 등)과 함께 교단 안에 성풍회(聖風會)라는 기도운동 단체를 세워서, 교회 부흥운동을 오랫동안 주도하셨다. 

 

그때의 성풍회의 바람은 매우 거셌다. 그곳에서 총회장 출신들이 여러 분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한 때는 교단이 마치 두 쪽으로 갈라진 듯 말들도 많았다. 소위 ‘성풍회 측과 인권파인 종로5가 측’으로 말이다. 지금도 나는 그 때 이 둘을 하나로 아우르는 교단의 리더십이 부재했던 것을 크게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그 간극을 좁히려고 양측에서 조금만 더 긍정적인 노력만 있었어도, 지금의 우리 기장은 훨씬 더 성숙한 교단으로 발전되었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서로 돕고 협력하면 훨씬 더 역동적인 교회상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것을 못한 체 피차 갈등만하다가 세대교체와 함께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물론 긍정적인 면도 컸다. ‘기장도 기도하고 부흥하는 교단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한국교회의 완고한 보수 측으로부터 이끌어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풍운동의 후배들이 일 년에 두 차례씩 마석기도원의 그 성풍회 집회를 계속하며 교단의 기도운동을 주도하고 있잖은가? 영적 동력의 산실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단순히 계승차원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두 진영의 협력과 발전을 견인하는 기도운동 차원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4) 목사님의 성풍운동의 열매는 아무래도 당신이 직접 개척하고 섬기시던 동광(東光)교회였다. 20년간의 개척과 목회를 통하여 노회와 총회 안에서 매우 건강하고 모범적인 중견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목사님에게는 평소 영성운동 못잖게 인권 및 사회선교에도 매우 긍정적인 식견을 가진 분이셨다. 시대의 아픔에 민감하셨고, 그들을 돕는 일에도 손이 크셨다. 그런 입장이 후임을 선택하는 데에 그대로 반영된 바 있었다. 후임은 당신과 똑같은 흐름의 사람이 아니라, 계승은 하되 보완까지 할 후임자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지금도 그 뜻이 후임자들을 통하여 굳건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해서, 아픔을 느낀다.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목사님은 개척자로서 설립한 교회의 미래를 위한 기반과 틀을 잘 마련해 놓으셨다. 그러기에 동광교회는 하늘과 땅의 균형 있는 좋은 목회와 신학의 지도력만 확실히 보유하게 된다면, 교단이 안고 있는 다양성(多樣性)을 조화시킬 모범적 교회로 발전해갈 저력과 기초를 이미 갖고 있다. 그곳에는 밑받침할 평신도 자원들도 풍부하게 있다!  

 

5) 목사님은 교단은 물론 한국교회의 어른이요 원로이셨다. 후배 양성에 남다른 관심도 컸다. 우수한 신학교와 신학도 양성을 위하여 한신대학교의 이사장으로서도 열정을 갖고 후원 운동을 오랫동안 펼치셨다. 호남지역 초교파 목회자 모임인 호산나회도 오랫동안 섬기면서, 고향쪽 교계 인사들과의 연대활동도 활발하게 하셨다. 동북아시아 교회선교협의회의 한국측 모임도 오랫동안 관계하시면서, 일본과 대만의 교계인사들과도 유대를 나누셨다. 

 

어찌 그 뿐인가? 지난 2001년에 은퇴하신 후에는 시골교회들을 매주일 찾아다니시면서 무보수 부흥회와 격려하기 위한 순방을 이어가셨다. 당신의 처음 목회의 어려움을 잊지 않으시고, 남은여생 허약한 교회와 목회자들을 섬기는 일들을 계속하셨다. 동광교회 당회는 그런 목사님을 적극 협력하면서 모든 밑받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고맙고 고마운 목사님과 교회였다. 나중에 힘이 부쳐 그만 두실 때가지 그 일은 계속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나 귀한 자산인가!

 

6) 총회를 섬기면서는 아픔도 있었다. 제83회 총회에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하셨는데, 그 경쟁자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지내온 이중표 목사였다. 두 분의 사전 조율이 실패하면서, 양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끝내 경선하였고 결과는 패배였다. 그 후유증은 컸다. 그때 나는 마침 김 목사님의 참모로 힘을 보태드렸으나, 이중표 목사와의 관계는 깊게 꼬이고 말았다. 결과는 그 선거가 이기고도 졌고, 지고도 이긴 선거가 되었다. 목사님은 더이상의 재출마를 접으셨다. 

 

7) 목사님과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생각난다. 은퇴를 준비하시던 목사님이 나를 일차로 당신의 후임자로 적극 생각하신 일이었다. 당시 당회원들 대부분이 응원을 보냈는데, 그 중에 어느 분이 나의 청빙으로 인하여 제기될 우려되는 부분을 문제로 제기하자, 진행이 보류되었다. 목사님은 목회후임 선정은 당회의 만장일치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목사님의 청빙 의지는 강하셨다. 좀 더 기다리고 기도하면 되지 않겠냐고 기대하신 듯했다. 하지만 내가 동광의 후임자로 가는 일은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다. 같은 시찰회에서 너무 가깝게 지내던 목사요, 또 양무리교회를 떠나게 되면, 양무리들에게 초래하게 될 여러 부작용들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목사님의 마음과 배려에 뜨거운 감사를 표하고, 다른 후임을 정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드렸다. 그 바람에 이미 두 후배들이 동광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떠나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목사님의 아쉬움은 가시지 않으신 듯했다. 고마웠다. 부족한 후배를 변함없이 인정해주시고 세워주시려는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생각해본다. 그때의 청빙이 이루어졌었다면 지금의 내 목회는 어떻게 흘렀을까? 물론 내 오랜 꿈인 선교와 교육 중심의 교회목회를 비교적 활발히 펼쳐갔을 것이다. 그리고 교단의 이중적 폐해를 극복하고 에큐메니칼 신학을 꽃피울 교회상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혹 그 길에 들어섰다면, 지금처럼 교단의 제100회기를 섬기던 총회장의 길이나,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중심의 말씀목회연구원장의 길에 들어서는 일은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회는 없다. 결국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주님의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8) 끝으로 목사님의 후배들의 육성과 발전을 위한 따뜻했던 배려의 손길도 기억하고 싶다. 특히 시찰회에 개척하던 가난한 목회자들의 해외목회연수 활동에 그늘에 되어 주신 일은 보이지 않은 큰 도움이었다. 적잖은 경비와 놀러간다는 교회안팎의 오해도 목사님이 그늘과 울타리가 되어주시면서, 우리 강남시찰회는 일찍부터 하나 되어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며, 목회자의 성서와 설교 발전을 위한 연수모임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국내와 일본과 중국 등의 나들이는 물론, 이스라엘-이집트-터키-그리스 등의 성지 순례도 꾸준히 접하면서, 목회자들의 성서와 설교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지금의 나도 분명히 그 산물임을 고백한다. 

 

이런 분이 지난 2월 20일에 90세의 삶을 끝내고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코로나의 위협이 드센 때였으나, 그 분의 가시는 길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과 함께 같은 시대에 목회활동을 해온 목회자로서 새삼 큰 행복감을 느낀다. 그 분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 교회와 성도들에 향한 사랑, 뜨거운 가슴, 따뜻한 시선, 풍성한 손길, 드넓은 품, 후배와 동역자들에 대한 배려,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본받을 것들만 교회와 후배들에게 남기신 체, 홀연히 떠나셨다. 못 다한 인사는 그 분을 본받는 모습으로 갚으려 한다. 이제 고백을 드린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 목사님, 당신의 배려와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머잖아 우리 다시 반갑게 만나요-!’

 

 

이성래 집사님에 대하여

 

이 집사님은 내가 섬기던 양무리교회의 교우이셨다. 95세의 고령에도 얼마 전까지도 딸 용숙 집사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신 신실한 집사였다.  

경기도 마석에서 태어나신 집사님은 그곳에서 초중고교 과정을 마치신 후, 청주대학교 경제학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나중에는 경희대학교의 한의학(韓醫學)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신 후, 1990년대 말까지 한의사로 활동하셨다. 그 과정에서 집사님은 협성학교 교사로, 조치원 중학교와 울진 중고교의 교사로도 교육계에서 봉직도 하셨고, 서울경제에 재직하면서는 국회의 출입기자와 청주대 교무주임으로도 활동하셨다. 후에는 한의사로서 활동을 활발히 하시는 중,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는 한의분야에 대통령 주치의까지 하신 경력도 가지신 분이셨다. 실로 교육, 언론, 경제, 의학 분야에 두루 섭렵하시면서 나라의 각 분야에 공헌하신 어르신이었다. 

  

우리 교회와의 관계 맺기는 딸 용숙 집사의 인도를 받으면서 집사님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2010년대 초중반 경에 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집사님은 부인 고 조중애 집사에 뒤이어 교회에 나오셨다. 그 때만 해도 담임목사의 혈당을 체크하시고 진맥을 짚어주시며 한약을 처방해주시는 등의 진료까지도 선보이셨다. 감사하고 든든했다. 세례도 15년 추수감사절에 받으시면서 믿음을 고백할 정도였다. 

 

하지만 약사이셨던 부인 조중애 집사님이 먼저 소천하시면서, 집사님의 건강은 허약해졌다. 몸은 괜찮은데,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이 큰 듯했다. 그런 중에 집사님은 놀라운 도전을 하셨다. 성경 66권 전권의 필사(筆寫)작업을 시작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2년여 걸쳐서 끝내 해내셨다. 꼼꼼하고도 정성을 다한 필사본을 봉헌하시면서, 교회는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다. 본 교회 최초의 필사본이기도 하였기에 그 의의가 컸다. 

 

그 이후, 집사님의 정신적 허약성은 깊어졌으나, 딸과 함께 교회생활은 최선을 다하셨다. 최후까지 든든한 교회의 울타리 역할을 하신 것이다. 마지막까지 간병에 헌신한 따님 이용숙 집사님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는 듯, 지난 3월28일에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 사랑하는 아내 중애 집사님이 기다리는 천국으로 편안히 떠나셨다. 나는 고인을 기리며 교회 밴드에다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올렸다(2020.3.28.).  

 

고(故) 이성래 집사님께 

온 세상은 요란한데, 홀연히 가셨군요! 집사님과 더불어 주님을 섬겨온 나날이 새삼 새롭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양무리교회의 너무도 소중한 믿음의 가족이셨고 든든한 신앙 동지였습니다.

비록 짧은 신앙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언제나 꿋꿋하셨던 품성대로 주님을 향한 신앙의 자세는 매우 모범적이셨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도 온 몸으로 잘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성경66권을 필사본으로 남기신 기록물은 우리 교회에도 매우 기념비적인 신앙의 유품이었습니다. 

이제 94년간의 이 땅에로의 소풍(消風)길을 마치시고 하늘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귀한 영생 길에 오르셨는데-, 우리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앞서가신 부인 고 조중애 집사님과의 반가운 해후도 있을 것입니다. 큰 기쁨 누리시길 빕니다. 

 

사랑하는 이성래 집사님! 

평안히 가시고 부디 하늘 영광도 기리 누리소서-! 귀한 따님 이용숙 집사님을 비롯한 모든 유족들은 주님께서 잘 돌보아 주실 터이니-, 아무런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후손들은 당신이 평생에 심으신 수고의 열매들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당신을 전송하는 우리도 잘 압니다. 머잖아 우리 모두 다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 복된 순간을 위해 이제는 그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이 집사님, 당신의 사랑과 신실한 동행에 감사했습니다. 진정 고맙습니다---!!

 

원로목사 최부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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