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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4)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맥추감사주일

관리자 2019-07-03 (수) 09:27 4년전 1030  

본문) 딤전 6:6-19, 출32:1-4, 눅16:1-13

 

오늘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넷째 주일이다. 게다가 한국교회는 한 해의 전반기를 보내고 후반기를 열면서, 맥추감사주일로도 지킨다. 원래는 초여름에 추수한 보리 수확에 대한 감사절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올 해의 전반기를 은혜와 사랑으로 돌보신 하나님께 감사를, 또 후반기의 새 삶을 부탁드리는 절기로 보아야하겠다. 따라서 이 주일에는 우리의 마음을 모은 특별한 재물(財物)을 제물(祭物)로 구별하여 드린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드려져야 하겠다. 

 

일찍이 인간이 신(神)에게 나가는 방법은 몸과 마음만이 아니었다. 물질과 소유도 함께하였다. 신에게만 아니다. 자신을 포함한 이웃인 인간과 세상을 상대하는 데에도 그렇게 하였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와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입술만으로는 부족해 하였기 때문이다.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일수록 꼭 물질을 이용했다. 그러기에 사람에게서 물질은 자기를 나타내고, 자신의 위상(位相)도 과시하며, 목적과 뜻을 관철하는 합리적인 도구로 삼았다. 

 

그러면서 사람은 물질과 소유에 대한 힘과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것에 대한 통제력과 절제력의 정도에 따라, 사람은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지금의 세상은 사실상 물질이 인간들 위에 군림하고 신처럼 되어버린 상태이다. 물질 앞에서 인간은 아주 부자유해졌다. 교만과 비굴의 원조가 되기도 했다. 물질을 신처럼 좇기 시작했다. 우상(偶像)이 된 것이다. 그런 물질주의자들은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짐승이 되어 귀한 이웃도 죽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는 물질 욕망에 대한 강력한 통제(統制) 장치가 절실해졌다. 물질이 인간의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살리고 건강하게 할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무엇일까? 도덕과 윤리나 철학 같은 가르침으로 인간의 심성을 조절하려고 하였다. 인격이나 생명이 없는 물질 자체에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없어서, 그것을 주관하는 인간의 윤리와 책임성에 접근을 하려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통제할 지혜는 주지만, 힘은 없었다. 그 이상이 필요했다. 종교(宗敎)와 그를 견인하는 건강한 신앙(信仰)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 문제로 인간에게 개입해 오신 모습을 보자. 예배(禮拜)로 당신이 인간을 만나고 교제하실 때, 인간이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소유를 당신께 바치는 제물로 삼는 방법을 취하셨다. 창4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바로 그 점을 말한 것이다. 자기의 제물을 드리는 마음과 태도를 보면서, 하나님은 인간을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하셨다. 당신 앞에 재물을 복종시킨 아벨을 의인으로, 흥정하며 거래하는 듯했던 가인을 악인으로 판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유인 물질이나 돈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일(헌물/헌금)은 매우 의미가 크다. 그 결정적인 의미는 이것이다. 

-‘나에게는 섬길 이가 오직 하나님 당신뿐입니다. 오직 주님 당신뿐입니다’ 

-‘나는 물질을 섬기지도 않고 물질의 종(從)도 아닙니다. 당신의 물질을 관리할 청지기입니다’ 

-‘이 물질은 당신의 뜻을 펴는 데 쓰도록, 나에게 위임(委任)하신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물질로 당신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며 살겠습니다.’

 

어떤가? 나는 평생 물질을 사용하며 살아왔는데, 과연 어떤 마음과 태도로 소유를 취급하면서 살아왔는가? 물질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사용해야지, 무지하면 물질에 끌려 다니는 노예(奴隸)살이를 하게 되면서, 결국은 물질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가장 기본(基本)은 이것이다. 물질이나 소유가 진정 나에게 축복의 도구가 되어야하지, 저주나 버림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물질이 나에게 구원과 영생의 도구가 되어야하지, 버림과 심판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물질의 힘과 영향력은 과히 신적(神的)이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기준이듯 말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소유(所有)나 물질(物質)의 그러한 위력(威力)을 처음부터 아신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경고(警告)하셨다 : 

-‘집 하인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무슨 말씀인가? 나의 단호한 결단(決斷), 즉 ‘네 소유를 하나님께 굴복시켜라’고 명령하셨다. 왜 그래야 하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냐 소유냐’란 이중적 공식으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불행해진다 것이다. 그 때는 기회주의적인 입장과 이기주의적 입장이 뒤엉키면서 그는 갈등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인간만이 아니라 물질의 주(主)되신 하나님까지도 저울질하며 상대하는 불경(不敬)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 갈라진 까닭도 바로 그 점이다. 아벨은 자기 물질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굴복시킨 자였다. 자신과 물질 모두가 다 여호와의 것임을 보여 드린 것이다. 그의 첫 열매 신앙과 그 짐승의 기름으로 드렸다는 행동이 그 점을 입증한 것이다(창4:4).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과 물질, 두 사이의 거리 간격을 유지하면서, 형편대로 하나님 편에도 섰다가 물질 편에 서는 이중(二重) 플레이를 즐겼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만다!

 

마침 오늘 세 본문 말씀들 모두도, 바로 물질과 소유로 인한 인간의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지를 사례 별로 전하는 내용들이다. 두 가지 흐름으로 전한다. ‘어떻게 하면 물질을 가지고 자신의 경건한 삶에 큰 유익을 주면서 살아갈 것인가’하는 것과, ‘어떻게 물질을 사용할 때 사람은 불행해지고 결국은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인가’를 더불어 전한다. 그 점에서 오늘의 서신서는 이 두 양면을 총론으로 전하고, 구약과 복음서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각각 전해 준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세상에는 물론, 교회 공동체에도 존재함을 말한다. 하나는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있는 것과 주어진 것에 자족(自足)하며 지내는 인물들이 있다. 또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과 소유를 늘이고 확장하려는 소위 ‘부(富)하려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각각 다음과 같은 아주 다른 특성(特性)들을 보여 준다. 

 

<자족(自足)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1) 경건(敬虔)한 생활에 큰 이익을 누린다(6절). 그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살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에는 자신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도 없고, 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데, 이렇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이 얼마나 풍족한 삶인가라고 만족해하기 때문이다(7절). 은혜(恩惠)아래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2) 이들에게는 피(避)하려고 하는 것과 취(取)하려는 것이 따로 있다. 그것들이 무엇인가? 

☞ 피하려는 것 – 부하려는 데에서 오는 시험과 올무이다. 해로운 욕심과, 물욕으로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다. 돈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에 미혹되어 믿음에서 떠나는 일은 극구 경계한다(9-10절 참조). 

☞ 취하려는 것 - 의(義)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忍耐)와 온유(溫柔)다(11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永生)을 취하는 일이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까지 흠이나 책망 받을 것이 없이 주님을 온전히 맞이하는 것이다(12-14절).

              

<부(富)하려는 사람들>은 어떤가? 

1) 온갖 시험과 올무와 해로운 욕심들에 떨어져서, 결국은 파멸과 멸망을 빠진다(9절). 특히 돈 사랑을 못 버린 그리스도인들은 그 마음의 탐심(貪心) 때문에, 미혹(迷惑)을 받아 믿음을 저버리고 근심의 고통에 빠져 버린다(10절). 

 

2) 그러기에 부한 자들은 재물 위험에 대한 다음의 권고들을 경청하고 새겨서 실천해야 한다:

① 마음 관리를 잘해야 한다 – 마음을 높이지 말라 +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17절)

②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 선행(善行)을 행한다 + 나눠주기 좋아한다 + 너그러운 자되라(18)

☞ 이것들은 자기 위해, 하늘에 터를 쌓아두는 일이며, 영생(참된 생명)을 취하게 되는 일이다

 

구약은 어떤가

자신들이 가진 소중한 물질로 하나님께서 가장 분노(忿怒)하시는 우상 숭배하는 일에 투입하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멸(殄滅)을 당하게 되었던 매우 불행했던 구체적인 사례이다. 

 

그들은 출애굽 후,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고 시내산에 올라 그 분이 주실 십계명을 받는 40일간의 역사적인 때를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형 아론에게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를 대체(代替)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했다(1절). 그것은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보여주셨던 능력과 사랑과 약속에 대한 심각한 배신 행위였다. 그 결과로 황금 송아지가 하나님을 대체할 보이는 신(神)으로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경배를 받게 되는 어이없는 일이 전개되었다. 우상숭배에 이스라엘이 깊이 빠져든 모습이었다, 

 

왜 금송아지였는가? 당시 바알 신을 비롯한 다산(多産)과 풍요의 신으로 간주되던 주변의 우상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렇게 등장한 금송아지 우상은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에 계속 불행한 불씨가 되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사례가 되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 왕국의 왕이 된 여로보암 1세가 바로 이 금송아지상을 다시 만들어 세우면서, 북 왕국 백성들의 예루살렘 성전순례를 막고, 그것이 자기들을 지키는 여호와라고 강조하며 섬기도록 했기 때문이다(왕상12:28). 그 일로 북 왕국은 급속히 멸망당하지 않았던가?

 

복음서는 어떤가

예수님의 제자 교육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재물 사용을 위임 받은 청지기인 백성이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관한 교육이다. 이해하기에는 제법 난해(難解)한 내용이다. 

 

부자 주인의 재산 경영을 위임 받았던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浪費)한다’라는 소문에 휘말리면서 주인에게 불려가, 경위를 추궁당하며 정산(精算)할 것을 요구받고 그로 인해 지위마저 박탈될 위기에 몰린다(1-3절). 그가 주인의 돈으로 빚을 준 대상들은 대부분 농사짓는 소작인들로서, 소작료 문제로 이 청지기에게 간청하여 빚을 얻었던 가난하고 고단한 자들이었다(5-6절 참조). 따라서 부채를 제때 상환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들에게 이 청지기는 큰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청지기는 큰 고민에 빠진다(3절). 실직 당했을 때 따라오게 될 육체노동에는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두려웠다(3절). 결국 그는 퇴직 후의 자신의 보전을 위하여 매우 특별한 행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호의를 받은 이들에게 좀 더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이 자신의 퇴직 후의 힘든 때에 자신의 보호자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선택을 하였다(4절).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채무자들을 일일이 불러서, 그들의 부채 증서에다가 기존 부채보다 대폭 삭감된 금액을 기록하게 하였다(6-7절). 주인에게는 피해가 가중되는 일이었으나, 채무자들에게는 진짜 큰 은혜가 됐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청지기의 그 불의한 행동을 지켜 본 주인의 평가이다. 청지기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지혜 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칭찬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당신의 사람들보다도 더 지혜롭다고 칭찬하였다(8절). 이 장면은 정말 놀라운 반전(反轉)이었다! 대체, 주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의 내용이 담겨있음을 본다! 

 

1)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청지기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 분은 그의 재산 관리를 맡기신 일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신다(1-2절). 하지만, 그때 그는 청지기들이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얼마나 늘이고 줄였느냐에 연연하지 아니하신다. 재물이란 그 목적과 용도에 따라서, 늘 수도 있고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들을 어디에다 쓰고 왜 썼느냐는 점은 중요하게 보신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인간들의 재물 사용에 관한 전반적인 평가랄 수 있다. 대체 어느 누가, 그의 재산을 정의롭고 그의 뜻대로 맞게 사용했을까? 주께 불의하지 않은 자가 과연 누구일까? 하지만 이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라도 만들었다(9절).   

2)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자녀)들의 물질 사용에서 가장 관심하는 포인트가 보인다. 재물로 자신의 욕망이 아닌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9절). 삭게오처럼 재물로 어려운 이웃을 친구로 만드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물이 곤경에 빠진 자들을 구하는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내 소유로 어려운 이들을 친구 만들고 은혜를 입히면, 그들이 나중에 내 의와 친절한 삶의 보증인이 되기 때문이다(딤전6:18-19참조). 나에게 관리할 수 있도록 주어진 물질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소통과 화목의 도구가 되게 해야지, 관계를 단절하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결론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면 안 된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물질이 복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 재물을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시키자.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고 어려운 이웃들을 친구로 삼는 소중한 자원이 되도록 집중하자. 내 삶의 축복과 영생에 결정적인 도우미가 되게 하자. 내 천국행에 동원될 결정적인 증언을 수행할 도구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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