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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2-14 (수) 12:24 6년전 1397  

분문 ) 눅9:51-62, 욜2:12-17, 딤후2:11-13 / 설 명절 주일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한 마지막 작업에 들어가신 절기이다. 이들 위하여 주님의 마지막 선교순례인 예루살렘 행이 시작되었다. 저 갈릴리 북쪽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부터 남쪽의 예루살렘까지 주님의 마지막 순례행진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을 우리는 앞으로 6주간 동안 의미 있게 만나고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침 평창동계올림픽으로 인해 갑자기 불어 닥친 남북화해분위기 속에서 이 절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이 사순절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이라는 우리 민족 최고의 가치를 어떻게 이 절기에 대응해야 하는 지도 우리 설교자들은 필히 감당해야할 주제가 되리라고 본다.

 

우선 분명한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내부에서 통일에 접근하는 방법에서 완전한 견해차들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매우 엄격한 규제와 제재를 통하여 북한을 굴복시켜야 가능하다는 입장이 있다. 이들은 북한의 핵 폐기와 적화통일론의 폐기를 주장한다. 하지만 또 하나는 대화와 화해를 통한 평화를 일구어내자는 입장이다. 이들은 불가능한 현실인 핵 폐기 대신 동결을 말하면서, 우선해서 남북의 평화 교류와 화해 협력을 통한 우리 모두의 일치와 평화를 이루어내자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에게 이 평화통일의 문제는 구원론에 해당하는 차원일 정도인데-, 그러나 이 두 흐름은 생각보다 매우 대립적이고 날카롭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 세력들과 맞서신 상황도 그와 유사했다는 것이다. 전통적 보수 유대교세력들은 모세의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론에 매달려왔다. 총 613가지나 되어 그들 자신들도 제대로 못 지키면서도, 그 율법을 통한 구원관에 천착해 왔다. 

 

부작용도 컸다. 절대적 의인이 나타나지 못하니까, 상대적 의인들이 나타나 상대적으로 더 큰 죄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을 정죄하며 자신들의 우월감을 뽐내는 어처구니없는 시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풍조가 가장 극성스러웠던 때가 바로 나사렛 예수께서 오신 때였다. 

상대적 의인이란 누구였나? 바리새인들로 대변되는 종교전문 집단들 내지 종교귀족들이었다. 상대적 죄인이란 누구였나? 그런 영역에 들어갈 수도 없었던 일반 대중(민중)들이었다. 

 

그들은 아예 직업상으로 죄인들 그룹들로 분류되어 정죄를 당해 온 자들이었다. 예컨대, 세리들, 창녀들, 중병이나 귀신에 들린 자들, 이방인들, 제국의 앞잡이들, 각종 불행에 빠진 이들 등등이 대표적인 죄인들로 취급을 당했다.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돌봄의 대상들이었던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과 여자, 아이, 노인 등 소외된 그룹들도 포함되었다고 본다. 

 

그 바람에 당시의 세상은 위선적 의인들과 정죄당해 사는 죄인들도 가득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특단에 의한 조치가 베풀어지지 아니하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이 모순된 평행선을 깨고 모두를 건강한 하나로 묶어낼 특단의 조치가 기다려지는 시대였다. 

그 특단의 조치가 어떤 것이었나? 그 새로운 것은 바로 율법을 좇게 하는 정죄와 심판을 통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베풀어주는 자비와 긍휼(사랑과 관용)을 통한 것들이다. 사순절은 바로 그 일의 성취를 위해 예수께서 어떻게 저 정죄세력과 맞서면서 일 하셨는지를 알게 한다. 주님의 그런 모습은 평화통일의 길이 어느 차원에서 가능한 지에 대하여서도 답을 줄 것이다. 

 

o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예수께서 당신의 마지막 생을 위해 예루살렘 행(行)에 오르셨을 때, 그 첫 경유지로 당시 유대인 모두가 혐오(嫌惡)하며 기피하던 사마리아를 선택하신 일 자체가 의미심장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비록 예루살렘을 향한 지름길에 사마리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피해 저 동편의 요단강변을 따라 예루살렘을 오가곤 했었기 때문에, 이 날의 예수님의 사마리아 선택은 그 자체가 파격(破格)이었고 파문(波紋)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혐오하고 있었나?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점령자 아스르제국의 강제혼혈정책에 의하여 이방인과 혼혈민족을 이루게 된 일로 인하여, 그 후부터 그들은 같은 동족이었던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부정한 족속으로 배척을 당해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통과 요구가 사마리아 당국에 의하여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했다(53절). 이유는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기 위해 자기들의 땅을 이용하는 일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인 역시 유대인 못잖게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나빴음을 보여 준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태를 모르실 리가 없을 예수께서 왜 이곳을 원하셨느냐 점이다. 왜 그랬을까? 주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때 통과 불허에 분노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대응하신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거부한 저들에 대하여 극도로 분노하고 나섰다. ‘감히 저들 주제에 주님의 통과를 과분한 은혜로 알고 기쁘게 허락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불허하는 만행까지(?) 저지를 수 있느냐’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에게 청원했다. ‘주님,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십니까’(54절). 

 

주님의 반응이 어떠했나? 한마디로 놀라운 반응을 보이셨다! 그런 요구를 한 제자들을 오히려 신랄하게 꾸짖으며 책망하셨기 때문이다. 그 책망의 강도(强度)가 마치 귀신이나 사탄에게 꾸짖으셨던 바로 그 용어를 사용하시며 두 제자들을 거칠게 책망하신 것이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고대 사본)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55절).

 

예수의 사마리아 방문 이유가 분명히 나타났다. 세상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영원히 저주 받고 버림당한 자들로 보았을지라도, 예수님은 그게 아니셨다. 그들 역시 구원을 받아야할 당신의 또 다른 백성들로 보고 계신 것이었다. 당신의 마지막 가시는 길목에서, 그들 사마리아인들을 가장 우선적인 되찾아야할 ‘길 잃은 양들’로 보신 것이었다. 현재의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들로 보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마리아에 대한 이런 깊은 애정과 미련은 어떤 근거에서 였는가? 알고 보면, 뿌리 깊은 사연(事緣)때문이었다. 그 사연의 실체(實體)가 바로 구약 요엘서의 내용에 담겨있다. 

 

선지자 요엘은 기원 전 722년에 임했던 북방 아스르 제국에 의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참혹한 멸망을 앞두고 있음을 미리보고,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절박하게 외쳤다. 그것은 백성들이 금방 그들에게 밀어닥칠 미증유의 심판의 사태들(욜2:1-6,17절 참조)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제사장이나 장로나 백성들이나 가릴 것 없이 온갖 우상숭배와 음란과 부정부패와 강대국 숭배 등으로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신하며 타락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들은 그들을 창조하고 양육해 오신 하나님으로서도,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심판할 수밖에 없는 수준까지 빠져들어 갔지만, 그러나 회개할 기회는 다시 한 번 주셔야만 했다. 그래서 주신 절박한 초청(招請)의 말씀이 바로 12절 이하의 본문 내용이다. 다 함께 당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 마지막 초대사를 읽어보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12-13절.상) 

 

그러면서 그런 초대사의 근거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제시하셨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13절.하-14절)

 

그들에게는 그 초청에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실로 주의 임박한 심판 앞에 서, 어서 속히 소집나팔 불어 전 백성을 소집하고 금식 기도에 들어가야만 했다. 어른-어린아이 가릴 것 없었다. 갓 결혼한 신랑신부도 함께 나와 엎드려야만 했다! 제사장들은 제단 사이에서 울며 이런 절박(切迫)한 기도를 올려야만 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17절.중)

 

이 요구된 기도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그들이 이방의 관할을 받아 조롱거리가 되는 치욕당할 구도를 짜고 계셨음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본래 그런 상황을 원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었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오면 뜻을 돌이키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꿈은 실현되었던가? 아니었다. 무참하게 무시당했고, 결국 그들은 예정된 심판을 참혹하게 당하면서, 끝내 저주의 혼혈족 사마리아로 역사에 등장했던 것이었다---!

 

그런 역사의 아픔을 안고 있던 사마리아에 대한 기억은 긍휼과 자비의 예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며 안고 가고 싶으셨다. 그러기에 그 깊은 미련이 예수의 마지막 길목에서 그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자들이 그들에게 불벼락을 쳐서 몰살시키자고 요구했으니-, 주님의 입장에서는 어찌 사탄의 짓으로 보이지 아니하였겠는가? 

 

실로 준비되지 못한 제자들의 설익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옛날 요엘 시대에 절박한 하나님의 초청에 대하여 안일하게 대응하므로서 모든 것을 빼앗겼던 그들의 모습을 엿보신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의 제자들은 그 함정에서 반드시 해방되어야만 하였다. 그래서 경고조로 나온 말씀이 바로 57-62절의 내용들이었다. 

 

주의 제자들은 자원만으로도 안 된다. 주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57-58절). 공과 사를 분별하여 처신할 수 없는 사람도 제자가 될 수 없다(59-60절).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선권을 확보하지 못한 자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61-62절 참조). 하나님 나라 위해 부름 받은 이들이 새겨둬야 할 지침이 분명하다! 

 

결국, 사마리아를 향한 예수의 그러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은 복음의 불씨가 되어 예수의 무리들의 가슴에 품는 대상이 되었다. 주님이 승천하시면서까지 유훈으로 그 사마리아를 지목하신 바가 있었고(행1:8참조), 실제로 성령 받은 사도들이 그곳을 찾아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행8장 참조). 뿐만 아니다. 그 때부터 사마리아는 지역적, 인종적인 구별로서만이 아니라, 신분상이나 직업상에서의 소외된 그룹들의 상징이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최고의 선교의 대상들이 되는 결과도 안겨 주었다. 

 

o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하나

 

그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린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예찬한 곳이 디모데서였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느니라’(2:13)

 

o 결론은 이렇다

 

혹 우리 신앙과 열심이 저 제자들 야고보와 요한과 같지는 아니한지 성찰해보자. 내 신앙의 독선과 오만이 하나님의 선교의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선교는 내 패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낮은 곳, 잃어버린 곳, 빼앗긴 곳, 그러나 찾아내야할 곳을 기억하며 찾아가서, 그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내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 안에 자리한 정죄와 심판의 영성을 씻어내고 주님께서 품으신 자비와 긍휼의 마음, 특히 우리 주변의 사마리아인들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마음까지 있어야 한다. 이번 사순절은 이런 영성으로 거듭나야할 때이다. 그리고 온 백성들이 이 마음으로 평화통일을 열어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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