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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2)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6.25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19-06-19 (수) 12:24 4년전 1141  

본문) 롬 6:15-23, 사 54:1-8, 눅 19:1-10

 

오늘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둘째 주일이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 속에 깊이 참여하는 축복이 넘치길 기원한다. 게다가 본 교단에서는 이번 주일을 우리 동족 간의 비극적인 대 전쟁을 치룬 69년 전에 있었던 6.25의 아픔과 수치를 기억하면서, 전쟁의 재발(再發)을 막고 민족평화가 우리 한반도에 영구적으로 정착되도록, 민족화해주일로 설정하여 지키고 있다. 

 

때 마침, 금주간 남과 북에는 6.25 당시의 전쟁 당사자들이기도 한, 미국의 대통령과 중국의 주석이 우리 남한과 북한을 각각 방문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뭔가 반드시 생산적인 회동들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일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들 강대국 정상과의 만남 이전에 남북의 정상들이 먼저 만나서, 우리의 공동의 입장을 마련하고, 그들에게는 협력을 요청하는 형식이면 좋겠는데-, 그것이 과연 어떨 지 궁금하다.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남북은 아직 완전한 자주(自主) 국가가 아니다. 남북의 자주적 교통이나 왕래나 협력사항들이 아직 우리의 마음대로 실행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주 국방도 안 된 상태이다. 그 점에서는 북한보다도 우리 남한이 더 심한 제재를 받고 있다. 그것도 미국으로부터 말이다. 통탄스럽다. 어서 우리가 자주 국가로 나아가야만 하겠다. 이제 우리 남북의 8천만 민족이 깊이 각성해서, 우리를 얽매고 있는 굴레들을 하나하나 벗겨내야만 할 때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느 나라의 종속(從屬) 국가도 아니고 백성일 수 없다. 우리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고 자주권을 행사할 당당한 주역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오랜 기득권을 행사해 온 뼈 속 깊은 친일(親日)세력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은폐하려고, 민족화해세력을 종북(從北)세력이라고 매도하면서, 국민을 낡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분열시키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미국 성조기를 흔들며, 혼자만의 짝사랑을 드러낸 종미(從美)세력들도 더없이 부끄럽다. 그런 극우(極右)세력에 우리 일부 기독교인이 앞장선 일은 더 부끄럽다. 우리는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주민이다. 우리에게 주인은 이 땅을 우리 민족과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창조주 하나님뿐이시다! 

 

마침 우리나라는 새 검찰총장에 윤석열 검사가 지명되면서, 그 동안의 적패청산을 비롯한 검찰개혁 등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커졌다. 그는 지난 정권 때, 국정원의 불의한 압력에 ‘나는 인간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어찌 불법과 타협하라는 말이냐’라며 저항하면서,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때를 만나, 이제 검찰총장에까지 오르며 새 시대를 견인하게 되었다. 불의가 아닌 의를 선택한 열매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쾌거가 분명하다

 

마침 오늘 강림 후 둘째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들은 성령 받은 우리가 과연 누구에게 지배를 받고 누구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되는 지를 일깨운 내용들이다. 그것은 인간은 연약해서 본질적으로 자기 지배(支配) 세력에게 자기 삶을 종속(從屬)시켜 살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기에(롬6:16참조), 우리의 삶은 진리를 기반으로 올바르게 세워야만 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 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한정되어 있다. 아무나 못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어둠에서 빛으로 확실히 교체(交替)된 적이 있는 이들이어야 비로소 이 부분에서 온전히 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생이 완전히 새롭게 거듭난 경험자라야 이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비교하여 설명하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의 주인공 모두는 주인의 교체를 생생히 체험한 자들이다. 

 

첫째는 나사렛 예수를 부활의 영인 성령 안에서 만난 바울이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직전까지, 당시의 유대교 율법의 엄격한 법 집행자였다. 그래서 신흥종교 교도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면서, 그들을 체포하고자 이웃 나라인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까지 쫓아갔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오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그를 찾아온 예수’를 만난 바울은, 한순간에 새 존재로 뒤바뀐다. 그래서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를 자신의 새 주인으로 영접하게 된다(행9장 참조). 그러면서 그는 이 세상 역사를 정죄 시대에서 은혜 중심의 시대로 세우는 주역이 된다. 

 

둘째는 나라가 강대국에 망하고 그들의 오랜 포로생활로 인하여 가진 것들을 다 빼앗긴 채로, 귀국 길에 오른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어 회복(回復)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모습이다. 그들의 가슴은 처절한 박탈(剝奪)감으로 가득했고,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가득했다. 하늘과 땅에 버림을 당하여, 오직 눈치만 보며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그런 그들을 찾아 주신 이가 바로 일찍이 그들과 화평의 자비로운 언약을 맺으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셨다(창9:8-17참조). 그는 철없이 집나간 아낙을 다시 따뜻하게 맞이하는 남편(男便)의 모습으로 찾아 준 여호와이셨다(5-6절). 그들의 빈 가슴을 꽉 채울 은혜의 하나님이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셋째는 죄인 삭개오가 예수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하는 복음서의 증언이다. 삭개오는 당시에 가장 불의한 관리로서, 죄악의 종으로 살았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가 의로우신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하며 그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게 되었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길에 들어선다. 더 이상 불의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요 선을 행하며 사는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 된 것이다. 바울의 변화된 새 삶이 그에게도 임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 인생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모두가 은혜 안에 살게 되면서 거기에서 얻어진 감동과 감사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종(도구)으로 기꺼이 내어 놓는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흑암에 빠져 세상과 인간의 탐욕의 종이 되어서, 죄와 불의의 도구로 자신을 불행과 사망에 던져 넣고 말게 된다! 

 

그런데 여기 모인 우리는 이미 이 새 주인의 교체를 경험했던 자들이 아닌가! 육신을 좇는 사람에게서 성령을 좇는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법을 좇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좇아 사는 사람이 되었다. 땅의 속성을 좇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속성을 좇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묻는다. 새 주인을 만나니 좋으신가? 좋다면, 얼마나 좋으신가? 이제 오늘의 말씀들로 재확인해보자. 

 

서신서를 보자

 

사도 바울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길이 있음을 깨닫고, 이렇게 그 길을 소개한다. 그것은 인간이 법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을 때라고 말한다(15절). 법 아래서는 언제나 불안전한 내가 주인이지만. 은혜 아래서는 완전하신 여호와가 내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법은 왜 죄를 끝내 다스리지 못하는가? 감시와 질서와 심판을 전제로 하는 법치(法治)는 본질적으로 모든 굴레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통제할 힘이 없다. 법아래 있는 인간은 그 법의 속박에 계속 저항한다. 아담 부부가 그랬다. 비록 그 범법의 결과가 형벌과 사망임을 알면서도, 그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다. 역설이지만 법치로는 인간의 범죄를 원천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경찰서와 형무소가 많아진다고 세상이 결코 밝아지지 못함과 같다.   

 

하지만 은혜 아래 사는 자들은 전혀 다르다. 내가 은혜 아래 있는 일은 성령의 개입을 통하여 된다. 성령께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제적(先制的)인 사랑과 자비를 미리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있기 전에, 아니 내가 원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 주시고 대비해 주셔서, 지금의 내 모든 것이 가능했음을 깊이 알고 살아가도록 챙겨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은혜 아래서의 삶은, 결국 우리를 저항과 거부와 배신이 아닌, 감사와 사랑과 자발적 복종의 자리에로 세운다! 바울은 이 원리를 바탕으로 로마 교인들에게, 몇 가지 당부한다. 

 

1) 사도는 우리에게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에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한다(15-17절). 그 바람에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의 복음을 마음으로부터 순종(順從)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요 의의 종으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17-18절). 

 

2) 그 결과로 우리는, 이전(以前)의 내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서 부끄러움 속에서 사망을 바라보게 되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내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어주어, 삶이 점점 더 많이 하나님의 것이 되게 됨으로서(거룩함에 이르게 되었다-19,22절), 죄로부터도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되어, 영원한 생명까지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되었다(19-23절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 구해야 한다. 항상 은혜 아래 살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불의나 죄악이나 어둠의 종노릇에 빠져들지 않도록 깨어 살아야 한다. 우리의 충성(忠誠)은 오직 정의.평화.생명의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한 것들은 책임져 주실 것이다. 

 

구약을 보자

 

본 예언의 말씀은 서신서의 개인적 차원과는 달리, 민족적 차원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한다. 비록 포로에서 귀국하여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대하면서 박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유다인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오랜 화평의 언약에 근거하여(10절), 깊은 애정과 자비와 긍휼의 은혜로 거두실 것을 생생히 전한다. 

 

1) 당시 예루살렘 주민의 실상은 이랬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했으며’, ‘산고를 겪지 못하였고’, ‘홀로 된 여인’의 황량한 처지와 흡사했다(1절). 하지만 그들에게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이 통보되었다. 흩어진 주민들이 돌아와서 거주민들이 많아지리라 예고하셨다(1절). 

 

2) 예루살렘도 새 천막 덮개를 덧붙임으로써 넓힐 수 있는 유목민의 천막과 견주게 됐다(2절).

 

3) 그들의 힘이 커지며 자손들은 열방을 얻고 황패했던 성읍들엔 사람이 살게 되리다(3절). 

 

4) 그들은 민족적으로 두 번의 수치와 치욕의 역사를 겪었다. 애굽의 종살이(젊었을 때의 수치)와 바벨론에의 포로 된 사건(과부 때의 치욕)이 바로 그 일들이다. 이제는 두려울 것 없다. 이제는 그들의 남편(男便)이 되시고 만군의 여호와이신 온 땅의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그러한 수치와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도록 완전 회복시키실 터이기 때문이었다(4-5절. 참조)

 

5) 비록 한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극심한 악행과 범죄 때문에 진노하여 버린 적은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철없는 때의 행위로 간주하시고 당신의 큰 긍휼과 영원한 자비로 그들을 다시 모으고 품으실 것임을 약속하셨다(6-8절). 이 은혜의 일은 전적으로 그들의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자비로 인한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이 다시 소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보자

 

인간 사회에서 가장 미움과 배척을 받던 사람이 가장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되는 일이 있을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게 충분히 가능하다. 삭개오 이야기는 바로 그 점을 열어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의 공적 활동 전체의 요약 판이기도 하다. ‘나는 의인(義人)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罪人)을 부르러 왔노라’(막2:17,눅19:10). 본문은 그가 말씀하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장 실감나게 느끼게 해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 삭개오 이야기에 담긴 본 메시지는 누가복음 전체의 메시지의 총계이다. 

 

1) 삭개오의 모습은 인간 실존의 축약(縮約)이라 보인다. 그는 외부적으로는 강자의 자리에 섰지만(세리장-부자), 자기 내면에 있는 약자의 모습(작은 키와 그로 인한 인간적 한계)에는 잔뜩 웅크려 사는 모습을 동시에(우월감 & 열등감)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1-3절). 

 

2) 하지만 그에게는 인간의 그런 갈등과 모순을 한순간 극복할 만한 결정적인 출구가 있었다. 바로 나사렛 예수를 통한 자기 통합을 이루려던 열정과 열망이 바로 그것이었다(4-5절). 본문은 삭개오의 그 마음이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와 맞닿았을 때(5-7절),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예수가 자기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삭개오는 이미 그 직전의 삭개오가 아니었다. 자기 인생의 참 주인을 만난 기쁨과 행복의 황홀감에 깊이 빠진 ‘뉴 삭개오’였다. 그는 예수의 은혜 아래로 순간 들어선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을 버려야하고 무엇을 붙잡아야할 것인지’ 분별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의 주인이었던 재물과 그로 따른 행복은 이제는 내려 놓아야할 것들이고, 예수와 그가 안겨주신 나라가 이제 자기가 복종해야할 새 주인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자발적(自發的)인 삭개오의 인생 새 출발 선언이 발표되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 그의 이 고백에는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만이 율법도 온전히 준수할 수 있음도 함께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4) 이를 잠잠히 지켜보신 예수께서 그와 그 집안을 향하여 엄숙한 심판(審判) 선고를 하셨다. 

 

-‘오늘 구원(救援)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子孫)임이로다-!’(9절). 

 

결론이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입어, 삭개오와 바울의 반열에 오르자. 우리 민족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날개 아래 한 민족 한 조국의 시대를 열게 되는 날이 오도록 간구하자. 더 이상 저 이스라엘처럼, 수치와 치욕의 굴레에서 완전 벗어나는 그 날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구하자. 

 

그를 위한 첫 걸음은 성령 받은 우리가,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의의 종으로 순종하며 사는 모습을 어서 회복하는 일이다. 죄인과 불행한 자를 순식간에 영광과 기쁨의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우리 한반도에 임하시기를 다시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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