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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6-12 (수) 16:40 4년전 962  

본문) 갈 5:16-26, 신 30:15-20, 막 4:1-20 

 

오늘은 성령강림하신 후 첫째 주일이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육체가 아닌 영(靈)으로서 성탄하신 성령강림이, 지구촌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날이었는지를 놀랍게 경청(傾聽)하였다. 

 

그 중에서 우리는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인류(人類)는 두 종류의 존재들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소위 ‘새 인류의 탄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곧 ‘성령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여부로, 나타나게 된 현상이었다. 그런 갈라짐은 인간의 외형적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거듭남으로 인한 것임도 알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예수를 닮은 존재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존재들이 있다. 이들의 등장(登場)으로 이 지구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들과 하나님 없이 사는 존재들로 양분되었다. 

 

우리는 이들을 ‘하늘 사람’과 ‘땅의 사람’으로 구별 지어 부르려고 한다. 바울 식으로 정리하면, ‘영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면 그런 정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답(答)은 간단하다. 그의 행동과 관심사를 주목하면, 금방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 사람은 하늘의 일과 신령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땅의 사람은 땅의 일과 육신의 일만을 생각한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의 구별을 이렇게 정리해 준다 :

 

1)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과 육체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는 사람으로 세분한다. 

2) 모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생명과 복을 택하는 사람과 사망과 화(저주)를 택하는 사람으로 세분하였다. 

3) 예수님은 열매 맺는 ‘옥토 인생’과 열매 없는 실패 인생인 ‘거라지 인생’으로 세분하셨다.  

 

그런데 이 하늘 사람과 땅의 사람, 두 사람의 상호관계(相互關係)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의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1) 이 서로 상극인 두 사람은 내 안에서 모두 경험되어 질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때는 하늘 사람으로, 어느 때는 땅의 사람으로 경험되어 진다. 자칫 한 사람 안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함께 있는 경험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면 내가 어느 때 하늘 사람인가? 성령을 따를 때이다. 어느 때에 땅의 사람인가? 육체의 욕망을 쫓을 때이다. 언제 한 사람으로 평정이 되는가? 바로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이다. 그래야만, 내가 선과 악의 널뛰기를 면할 수 있다. 

 

2) 저 둘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다. 일종의 원수이며 상극(相剋)관계이다. 서로가 추구하는 것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있을 수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거스르고 대적하면서, 서로의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갈5:17절 참조). 그러기에 이 둘 사이에는 평화가 없다. 참 평화를 맛보기까지 그 안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구원이냐 버림이냐, 생명이냐 사망이냐, 알곡이냐 쓰레기이냐?’만 있다.   

 

3) 이 둘은 의지(意志-노력.교육.훈련)를 따르느냐, 본능(本能)를 쫓느냐에 따라 서로 갈라진다는 점이다. 특히 성령을 따르고, 생명을 선택하고, 옥토의 열매를 얻고자 할 때는 그만큼 노력이 요청된다. 가만히 먹고 놀면 불가능하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얻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르리라’고 요구하셨다(눅11:9참조). 하나님 사랑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서 하라고 하셨다.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제대로 얻어 내 것으로 누리려면, 자기가 먼저 십자가에 죽는 체험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하늘의 사람 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깨어 있어야 되고, 분별하고 선택을 잘해야 되는 길이다. 

 

하지만, 아담처럼 본능(本能)을 쫓아 사는 삶은, 힘쓰고 애씀이 없어도 자동적으로 된다. 누가 교육비를 지급하지 않아도, 시키지 않아도, 미워하고 시기하고 음행하고 이웃과 담쌓고 당 짓고 분열하고 타락하며 살게 된다. 그저 가만있으면, 본능을 따르는 생존법칙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런 삶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갈5:21참조). 땅의 사람의 길은 노력이 전혀 필요가 없다. 그저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아무 수고 없이 살아도 된다.

 

서신서를 보자

 

사도 바울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성령 공동체임을 밝히면서, 거기에 편입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강조하였다(16절).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에는 아직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서 성령이 아닌 육체를 따라 행하는 무리들이 있음을 보면서, 그들을 경고하였다. 그들의 특징은 주로 율법(律法)의 굴레 아래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모습들로 나타났음을 지적한다(19-21절).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는 달리 성령이 그 안에 작용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를 맺히며 산다고 말씀했다(22-23절 참조). 

 

1)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내가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내면에 있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원을 거스리면서, 서로 대적하는 일이 순간순간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때 만일 성령의 소원이 승리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혹 육체의 소욕에 승리하게 되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과 세상에 부끄러운 짓을 행하게 된다. 요즈음의 한기총의 전광훈과 같은 퇴행에 빠지게 된다! 

 

2) 바울은 그 육체의 욕구가 기승할 때, 어떤 현상들이 발생하는지를 보다 상세히 전한다. 그 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다음과 같은 타락(墮落)상에 빠지게 된다(19-21절). 

-음행(淫行), 더러운 것, 호색(好色), 우상 숭배, 주술(呪術), 원수 맺음, 분쟁(紛爭), 시기(猜忌), 분(憤)냄, 당(黨)짓는 것(한기총의 전광훈처럼), 분열(分裂)함, 이단(異端), 투기(妬忌), 술 취함, 방탕(放蕩)함 등등이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의 결과가 무섭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21절.하)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부정적인 행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표출되는 것이 더 무섭다. 교회 공동체에 크고 작은 신앙적인 위기들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요즈음이 그때다 

 

3) 우리는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그런 모든 정욕과 탐심들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여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죽었던 옛 것들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한다(24-26절참조).

 

4) 성령 받은 이들에게는 그 아름다운 열매들이 그의 삶에서 그의 인격(人格)으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러기에 그 열매를 보면, 그가 진정 성령을 받았는지 여부(與否)가 판가름 난다. 그 소중한 열매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22-23절 참조). 자신의 삶의 내용과 비교해 보라!  

-사랑한다, 기뻐한다, 평화롭다, 참는다, 친절하다, 선하다, 신실하다, 젊잖다, 자기통제를 잘한다 등 9가지이다. 

-이 모든 것들의 특징(特徵)이라면, 이 같은 것을 금지(禁止)할 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늘과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도 통제 받지 않아도, 영생을 누리며 살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구약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모세는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소원이, 생명과 복을 택하여 누리고 사는 것에 있음을 밝힌다. 어느 누구도 사망과 화(저주)를 택하여, 불행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선포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구원을 향한 분명한 지침(指針)도 확실히 제시하셨다. 당신이 모든 인간들 앞에 생명과 복-사망과 화를 두었으니(15,19절), ‘너희는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그 말씀 청종하고, 그를 의지하라’라고 명령하셨다(16,19-20절,하). 

 

그 지침의 틀은 마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엔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제1 의 에덴동산’의 지침과 비슷하다(창2:15-17절 참조). 구체적인 구원과 축복의 길은 밝히 알려주시되, 그것을 택하고 취하여 먹느냐의 여부는 듣는 자들 스스로가 결정하라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감스러운 것은 이 지침 앞에서도 여전히 사망과 저주의 길을 선택하며 사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일깨워주시는 경고와 교훈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 본능과 욕망의 욕구에 복종하며 사는 행태를 취하므로서, ‘다른 종교, 다른 문화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맡겨두면서 하나님을 배신하므로서’ 멸망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자신에게 부여된 1%의 소중한 선택권을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마치 에덴의 하와처럼, 본능과 호기심의 노예로 산 것이다. 나중에 기껏 쏟아낸 변명도, ‘왜 하나님은 내 앞에 생명과 축복만 두시지 사망과 저주까지 두어서, 나로 그것들을 취하여 이렇게 죽게 버려두느냐’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되는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불순종만 하다가 그렇게 저주에 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제시하신 최소한도의 요구들을 소중히 받아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손발을 주셨고, 일할 기능과 능력을 주실 때에는, 우리를 더 이상 로버트와 같은 기계 인간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나에게 삶의 방향 제시를 하신 것도 나를 인격적이며 자율적으로 반응하는 인간, 응답하는 인간으로 상대하신 것이다. 최소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줄 알고, 찾아먹을 줄 아는 인간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니 부디 헤아려보시고 그 받은 은혜에 오직 감사하는 자들이 되시라.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살아오기까지 도대체 내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이루어 놓은 것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거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모두가 주어진 것들뿐이잖은가! 

 

내 존재와 삶도 주어졌다. 부모와 형제자매도 받았다. 학교와 이웃들도 받았다. 나라와 동족과 삶의 터전도 거져 받았다. 더불어 살 자연과 환경도 받았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도 받았고 교회도 받았다. 생존을 위한 각종 재능(才能)들도 부여 받았다. 게다가 받은 그것들을 의미 있고 복되게 누리고 사용할 지침서인 성경(聖經)도 함께 받았다. 그러니 그 주어진 것에 대한 올바른 사용 매뉴얼을 잘 경청하고 따라 살면 되는 일 아닌가-!

 

생각해 보시라. 내 생존을 위하여, 조물주이신 하나님과 내가 각각 몇 %의 역할 분담을 한다고 보시는가? 나는 ‘99%는 하나님이 맡으셨고, 단 1%가 내 몫이다’라고 보인다. 그 1%는 그 분이 지시하시고 말씀하시는 내용에, 내가 ‘예’와 ‘아니요’로 응답하는 일 뿐이다. 그래도 그것이 중요한 것임은, 그것이 마치 배의 돛이나 닻 같아서, 내 존재의 운명의 방향을 ‘천국이냐 지옥이냐’, ‘복이냐 저주냐’를 결정 짖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운명은 아주 적은 것에서 결정됨을 명심하자. 내 마음 대신에 주님의 말씀을 선택하라. 하늘사람은 그 선택으로 살아간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하늘 사람은 그 심령이 옥토(沃土)와 같은 존재로서, 복된 생명을 누리며 그 받은 축복을 세상에 베풀며 살아가는 자임을 알려 주셨다.

 

주님은 땅에 뿌려지는 씨앗을 당신의 비유의 자료(資料)로 삼으셨다(14절). 그 이유는 당신의 선포되는 말씀과 계명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 밭에 떨어질 때 마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파생되는 다양한 현상과 결과물과도 흡사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씨앗은 정말 기이하고 신비롭다. 씨알 1개가 대략 100개의 낟알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줄기들도 만든다! 그리고 자기를 먹는 이들을 살린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이, 그 씨알처럼, 그만큼 놀랍고 신비하게 번성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의 구도(構圖)는 자칫 네 개(길가-돌밭-가시떨기-옥토)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결실이 없어서 실패한 인생과 결실이 풍성해 성공한 인생이란 두개의 대비적 형식으로 되었다. 실패와 성공의 갈림길은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됨을 분명히 하셨다. 승패(勝敗)는 말씀의 역사에 내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내 안에 씨앗처럼 떨어지는 주님의 말씀에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과 함께 내 안에서 자라고 있기에 그렇다. 말씀을 받는 내 마음 밭의 상태는 어떠한가? 혹 사탄(새)에게 내어 준 것 아닌가, 말씀을 전혀 받지 못하게 하는 바위 같은 돌밭이나, 자라는 모든 것들을 질식시키는 세상 염려 근심들로 내 심령이 지배당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렇다면 큰 위기이다.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뜨겁게 간구해야 한다. 어떻게 하든, 내 영혼의 밭에 떨어진 말씀은, 내 안에서 자라서 30배, 60배, 100배로 풍성하게 수확하게 해야 한다. 

 

결론이다

 

성령의 강림은 새 인류와 새 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늘 질서를 따라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과 땅의 본능을 쫓아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구별하였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고, 생명과 복을 택하며 사는 존재이며, 말씀에 순종하며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들로 선택 받았다. 그러기에 계속 깨어서 옛 사람, 옛 문화, 옛 낡은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도록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며 살아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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