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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장애우주일

관리자 2019-04-17 (수) 23:09 5년전 1169  

본문) 마15:42-16:8, 욥 21: 23-27, 고전 15:1-11

 

오늘은 세계교회가 함께 지키는 부활주일이며, 동시에 한국교회가 함께 지키는 장애인(障礙人)주일이기도 하다. 기쁨의 부활(復活)과 아픔의 장애(障礙)가 묘하게 겸친 주일이기도 하다. 언뜻 생각하면, 이 둘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서로의 얽힌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둘이 상호 관계가 주는 의미는 뜻밖에 너무 크다.

 

그것은 죽음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과 세상의 제약된 극한(極限)의 상황까지도 넘어서는 열린 완성으로서의 부활과, 신체 및 정신과 영혼이 상식적 균형을 갖지 못한 데에서 오는 장애라는 아픔의 골짜기에서 탄식하며 절규하는 모습은, 서로 다른 듯하나 사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부활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장애라고 하는 극한 아픔과 고통과 탄식을 전제하고 배경으로 한 것이지 부활이요 회복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그렇지만, 가축과 짐승까지도 그렇다고 한다. 자기가 아픔 속에서 고생하며 낳지 아니한 새끼들에 대한 애정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치유와 건강에 대한 뜨거운 희망과 열망이 결여된 체로 주어진 것을 소중히 감당하기란, 우선 내 몸과 마음이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진통하며 힘들여 낳은 자식은 예외가 없다. 자식 돌봄과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비한 영적. 정신적 질서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두 실존적(實存的)인 장애인들이다. 신체적인 균형 면에서도 누구나 완벽하지도 못할뿐더러, 정신면에서도 균형 대신에 어딘 가로 치우쳐 살아오고 있다. 영적으로는 어떤가?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여 살아오면서 우리의 삶은 아벨보다는 가인에 더욱 가깝게 살아온 자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늘 받아야 될 것을 받지 못한 체, 허덕이며 살아오고 있는 영적 장애우들이 바로 지금의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몸과 영혼 모두가 깊은 탄식 속에 지내는 자들이다. 

 

따라서 진정한 부활은 인간의 열망과 극복을 위한 간절함에서 맛볼 수 있는 영역이다. ‘가만 있으면 된다’는 말로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수장시킨 구호로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세계가 바로 부활이다. 모순과 장애를 벗어나고자 하는 열정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순을 보고 탄식하며 극복해내려는 몸부림이 있는 사람, 시대적 아픔과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뜨거운 노력에 전력하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열린 세계를 맛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거룩한 선물이 바로 부활의 은혜이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장애를 가진 자들이다. 하지만 그 장애를 영원히 치유 받고, 참 자유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마치 맹인 거지 바디매오 처럼(막10:46-52), 자신의 장애를 능력의 구세주로 인하여 치유 받고자 몸부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기에 교회와 강단의 설교는 그런 우리의 현실과 부활의 질서를 뜨겁게 선포하여, 모든 영육의 장애인들이 부활의 참 생명에 참여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우리들의 상황과 처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면, 어찌 예수께서 열어주신 오늘의 부활을 감격스럽게 맞이하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세 본문들을 다시 보자. 모두가 부활 세계를 맛 본 이들이었고 그에 대한 증언을 뜨겁게 하고 있는 이들인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얻어낸 부활의 세계가 그들이 처한 처지에 대한 목숨을 건 몸부림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의 욥의 경우가 그랬다. 복음서의 여인들의 경우도 그랬다. 바울 사도의 부활의 주를 만나고 그 세계를 통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난 일들 역시-순서에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정말 고난 속에서 얻어낸 부활 체험담이었다

 

구약의 욥기는 어떤가

 

구약에서 부활의 밝은 빛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빛이 고난의 대명사인 욥기에서 나타난 것은 정말 의미가 크다. 그것은 그의 예기치 아니한 고난의 아픔과 억울함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영적 투쟁의 과정에서 나온 욥의 신앙의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욥에게 그러한 고난의 터널이 없었더라면, 이런 부활의 놀라운 빛을 과연 기대할 수 없었을까-!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엄청난 불행들이 뭔가 하나님께 범죄한 일에 대한 대가로 인한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심판에 따른 것이라는 주변의 일방적인 비판들을 정말 수용할 수 없었다. 욥은 자기의 결백함을 철저하게 확신하면서, 후대에라도 자기의 정당성을 평가해주기를 바랐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그는 자기 말(증언)이 오래 오래 전해지도록 누군가에 의하여 기록되기를 바란 것이다. 즉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한 내용을 담은 문서가 작성되기를 바란 것이다. 예컨대, 돌로 새기기도 하고, 납을 부어 만들어 보존하게 해서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바란 것이다, 그 만큼, 욥의 억울함과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은 깊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욥의 그런 관심은 땅에서의 노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하늘까지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는 ‘하늘에 계신 대속자(代贖者)인 고엘’를 찾으며, 그에 대한 신뢰를 언급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그 고엘이 마침내는 자기가 아직 생존한 동안에도 자신의 결백(潔白)을 변호해 주시리라 고백하였다(25절). 그러면서 비록 자기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때에도(사후 세계), 자신의 고엘이 자기를 낯선 자 취급하지 아니하고(26절), 자기의 변호사이자 대변자로 최후의 소송에까지 개입하셔서 자기의 결백함을 확증해 주시므로서, 이 깊은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는 점을 떨림으로 고백하였다(27절,잠23:11참조). 

 

우리는 욥의 이 영적 통찰력을 주목해야 한다. 그가 하늘의 대속자인 고엘을 알고 있었다는 증언은 그가 과연 당시 하늘에 계셨던 그리스도를 알고 지내왔음을 엿보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죽음 이후의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식견을 그렇게 고백한 점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증언 자체에는 비록 그가 자신의 부활 신앙 여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의 고백 속에서 이미 부활의 밝은 빛이 서리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욥의 땅의 극한 상황을 넘어설 하늘의 대안으로서의 고엘을 향한 신앙고백은 이 땅의 또 다른 수많은 고단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오고 있는 숱한 영혼들과 의인들에게도 커다란 생명과 희망의 지평을 제시하였다고 본다. 인간에게는 땅의 고통이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서 땅에서 미처 해결되지 못한 것을 해결 받게 되고 평가받게 되는. 영원한 의로운 세상이 있다는 영생(永生)이란 지평을 열어준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욥 자신의 그러한 간구와 고대는 결국 하나님께 상달(上達)되었다. 욥의 그런 고백 후, 욥은 하나님의 인정을 다시금 회복하면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본다(욥42:10-17).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토록 고난 속에서 믿고 의지했던 그 고엘이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 메시아로 이 세상에 친히 오신 일이다. 예수의 고엘로서의 본색이 드러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게 바로 그가 십자가를 피하지 아니하고 빌라도에 의하여 고난과 죽임을 당하시다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무덤을 여시고 부활의 주로 새롭게 등장하시면서 부터였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복음서는 죽임 당한 예수에 대한 매장(埋葬) 기사와 그의 부활하신 모습이 함께 소개된 곳이다. 그 중에서 매장을 위해 소개된 인물들이 있었다. 당시 존경받는 공회의 일원이자 부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공관복음서)과 일찍이 예수를 영생의 문제를 두고 찾아뵈었던 바리새파 계열의 서기관인 니고데모가 그 사람이었다(요3장,19:30참조). 

 

요셉은 망자(亡者) 시신수습과 매장지를, 니고데모는 약33kg에 호가(呼價)되는 거액의 몰약과 침향을 각각 제공하면서, 망자에 대한 그들의 깊은 존경심을 마지막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온전한 몸의 부활이 되도록 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크게 평가 받을 일이다. 그런 그들이, 여러 주변의 불편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죽임 당한 하나님의 고엘인 예수에게 대한 헌신과 사랑을 그토록 드렸으니, 그들이 어찌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고엘의 변호(辯護)속에서 영생의 세계로 영접 받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의 시신을 끝까지 지켜보는 또 한 그룹이 있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와서(마27:55,눅24:55), 그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임 당하심을 힘겹게 지켜보고 있었던 갈릴리의 여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일편단심의 저항적 태도로, 그의 한계 밖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역사에 모든 시선을 집중한 사람들이었다. 막달라 마리아,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47절)

 

이런 이들에게 어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그의 가장 궂은 모습을 안타까이 지켜 본 그들에게, 그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까지 보도록 허락하신 것이다(16:4-6절).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충격적인 죽음과 매장만의 증인이 아니라, 놀랍게도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이자 증인들이 되는 자리에도 세움을 받게 되었다(4복음서 전체,16:7-8절 참조). 


이 여인들의 가장 뜨거운 예수 사랑의 모습은, 죽임 당해 매장되어 있는 예수를 찾아가는 그 모습에서 잘 드러났다(16:1-3참조).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신앙이 있어서 무덤에 간 것이 아니었다. 다만 예수 사랑과 존경 때문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시신에 바르려는 향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큰 근심도 있었다. 요셉이 예수 장례한 후, 그 무덤에 큰 돌로 무덤 문을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15:46,16:4참조). 그 일로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러 주리요?’(3절)라며 외부의 도움이 있기를 소망하면서, 무덤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런 큰 돌이 장애(障礙)로서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미리 포기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비록 그런 현실적인 걱정거리는 있어도, 그럼에도 자기들이 사랑하는 예수께서 바로 그곳(무덤/죽음)에 계시기에, 장애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해결되리라는 것을 믿고-, 그 무덤을 향해 일심(一心)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뜨거운 예수 사랑이 이미 죽음이나 돌문이라는 그들 앞에 있었던 장애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음을 말한다. 즉 그들은 그런 행동을 통하여 자신들이 이미 예수의 부활 세계를 향유할 자격자임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얻어낸 선물은 무엇이었나? 바로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으로 세움 받은 일이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의 진정성이 하나님께 확실히 전달된 만큼, 그들에게는 예수가 과연 어느 정도의 분이신지를 친히 확인할 수 있도록 매우 특별한 기회가 제공되었다. 그것도 빈 무덤의 현장, 곧 예수께서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역사적 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 자의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5-6절). 나에게는 어떤 부활의 흔적이 있는가?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12절). 교회와 복음의 큰 위기였다. 특히 바울에게는 그런 부활의 부정이 곧 자신의 사도(使徒)성을 부인하는 행위요 복음의 부정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사도됨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런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정되는 것은 사실상 바울의 사도됨을 부인하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신앙에 있었다. 그런 구원의 주제는 바울 스스로가 설정한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예루살렘교회에서나 혹은 안디옥교회로부터 받아서 전한 내용들이었다(1-3절.상 참조). 이것은 당시 초대교회들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인간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핵심이었음을 믿고 전했음을 말한다. 모든 교회들은 그 증언 전통 위에 일관되게 서 있는 공동체였다. 지금도 그렇다!  

 

주님의 죽음은 그의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과 장사되심에서 확인되었고, 부활은 그가 성경대로 살아나신 후에(3-5절,욜2:32,사42:1,6,49:6,51:4참조), 제자들과 다수의 지인들과 바울 자신에게까지 현현(顯現)하심으로서 입증되었다(5-8절). 바울은, 마가의 증언과는 달리, 베드로를 최초의 부활 증인으로 보았고(5절), 그 후 500여 형제들과 예수의 아우 되시는 야고보도 부활 예수를 만났으며(6-7절), 최후엔 바울 자신도 부활의 주와 만남을 가졌다고 증언했다(8-9절,행9:3-5,갈1:15-16참조). 증언이 중요함은 그 증언으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박해자였던 부끄러운 경력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부름 받은 감당하지 못할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고자, 다른 사도들보다 더욱 많은 수고한다고 고백했다(9-10절). 이런 부분은 예수의 부활과 그 구원의 은혜가 세상 모든 죄인(罪人)들에게도 온전히 열려 있음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그리고 믿으면, 부활이 현실이 됨을 말하여 준다! 

 

결론은 이렇다

 

오늘의 말씀은 부활의 자체의 가능성 여부나 그 능력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 그 부활의 세계가 주어지는 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난 속에서 하늘의 고엘의 도움을 믿고 구했던 욥이나, 자신의 소중한 것들로 주님을 섬겼던 아리마데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나, 어떤 장애가 있음에도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무덤을 향해 나아갔던 갈릴리 여인들, 그리고 아무 공로 없으나 자신을 택하신 주님의 은혜에 목숨 걸고 충성하며 부활의 증인되어 살아가는 바울, 이들 모두가 우리를 부활 세계로 안내해주는 훌륭한 가이드들이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도 결단해야 한다. 내 삶 속에 있는 유형무형의 장애들에 끌려 다니지 말고, 오히려 부활신앙으로 내 안의 장애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내가 되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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