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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3-14 (목) 12:41 5년전 1012  

본문) 막 10:17-31, 전 5:10-20, 약 1:2-11

 

인간은 누구나 행복(幸福)을 원한다. 불행(不幸)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의 문제는 그토록 원하는 행복을 얻고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행복이란 실체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에 대한 욕구가 강한만큼, 더 불행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고나 할까? 정말 알려고 하면 할수록,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행복이라고 본다. 

 

뿐만 아니다. 인간이 붙잡으려는 행복은 하나같이 절대적(絶對的)인 것이 없고 모두가 상대적(相對的)이요 가변적(可變的)이라는 점이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고, 세대와 시대에 따라 그 개념도 달라진다. 마치 게임 결과만을 놓고, 행복과 불행을 누리는 사람들이 갈라지듯이 말이다. 또 어제의 행복이 오늘엔 불행으로, 어제의 불행이 오늘엔 행복으로 판명 나는 것도 너무 많다. 그래서 내가 바라던 세상의 행복을 좇다 보면, 결국은 우리 가슴에 허전과 허망함만 안겨준다. 요즈음 세상이 참 어지럽다-!

 

최근 강남 카페방 버닝썬에서 독버섯처럼 번져 있는 연예인들 중심의 추잡한 성 향유사건, 아이들을 볼모로 자기들의 사익을 챙기기 위해 유치원의 개학을 거부하려던 한유총의 탐욕사건, 자기들이 집권했을 때에는 북한의 비핵화를 탄력 있게 조정하며 남북의 상호 교류 활성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다가-, 정작 지금의 새 정부가 본격적으로 남북평화의 시대를 위해 노력하니까, 그 앞장선 대통령을 ‘북한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고 국회연설에서 공격해대는 야당 원대대표의 이중적인 태도, 5.18만행을 회개할 줄 모르고, 북한군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며 매도하며 버티는 전두환을 비롯한 태극기부대들의 망동들, 그리고 법원 판검사들의 일탈된 권력 오용과 남용의 실태들, 게다가 정부의 적패청산작업을 ‘이제 그만하라’고 외쳐대는 제일 야당과 기득권의 몸부림들---, 이 하나같이 자기들만의 행복을 지켜내려는 변태적 행동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이 원하는 행복은 거의 모두가 갈증(渴症)만을 부추기는 것인데, 그 연유가 대체 무엇일까? 그 행복의 밑바닥에는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주의, 그리고 자아중심주의적 어둠의 죄의 검은 그림자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행. 불행의 현실과 실체가 그런 데에도, 인간은 여전히 그런 신기루 같은 행복을 붙잡고자 끊임없이 씨름한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안은 무엇일까?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런 난해(難解)한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준다. 

첫째는 행복 지상주의(至上主義)란 허구에서 어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 대신, 이 땅의 행복보다 더 본질적이며, 더 우선적이면서도 이 땅의 행복의 문제까지도 해소가 가능한 보다 높은 차원의 행복의 새 지평(地平)인, 영원한 생명에 우리의 시야를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생(永生)의 신앙 안에서 세상의 행. 불행의 제반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고도 행복을  해결 받는 것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련해서는 복음서에서 확인하게 된다. 

 

둘째는 피조물로서의 자신이 바라는 수준의 행복 보다는,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하신 선물로서의 행복의 실존적 차원에 관심과 마음을 두고 사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내 욕망의 충족을 위한 행복론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의 백성으로서의 이웃과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펼치며 살아가는 새로운 차원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전도서가 확인해 준다. 

 

이런 시각 조정은 신앙의 진정한 본질을 맛볼 때 가능한데, 그럼에도 일단 그런 안내를 믿음으로 수용하면 그 사람은 외식적이거나 상황에 따르던 갈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중심을 확실히 잡은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인정받아(잠3:4)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다(약1:4). 이러한 안내는 야고보서가 안내해 준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젊은이 한 사람(눅18장에서는 관원)이 예수를 찾아왔다. 그는 놀랍게도 영원한 영생(eternal life)에 관심하고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는지를 예수께 물어온 것이다. 이것은 그가 평소 거리의 랍비인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대하여 끊임없이 증언하였던 것을 주목하면서, 그렇다면 자기의 현 위치와 수준에서는 영생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싶어 한 것이다. 예수 앞에 무릎 꿇은 태도로, 그는 자신의 진정성까지 보여드렸다(17절). 

 

예수께서는 그에게 친절히 응답해 주셨다. 먼저 십계명의 후반부에 나타난 계명들 6가지에 대한 준수(遵守) 여부를 친히 재확인 하신 후, 그에게 아직 남은 과제인 영생(하늘의 보화)을 위하여 해결해야만 할 마지막 한 가지를 ‘꼭 짚어서’ 요구하셨다. 

‘너에게는 부족한 것 한 가지가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게 하늘의 보화가 있으리라. 그런 후에 나를 따르라’(19-21절). 

 

결과는 어떠했나? 젊은이는 주님의 말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가진 재산(財産)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22절). 그는 자신이 가진 문제, 즉 ‘쥔 것(재물)을 내놓을 수 없다’는 강한 욕망과 집착의 벽에 부딪치면서 나가떨어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신앙과 재물, 모두를 다 함께 가지고 영생의 문을 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문전(門前)에서 예수의 만나 제재(制裁)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그걸로 끝난 것인가? 젊고 믿음도 깊고 유능한 그가 그것으로 끝나기에는 아직 기회는 있으리라고 본다. 등을 돌리고 돌아가는 그 젊은이를 본 예수님의 마음이 그러셨을 것이다(27,31절 참조). 그렇다면, 혹 그의 영생 얻기가 그 후에도 여전히 가능하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그에게는 영생에의 접근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계명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음이 드러났다. 바로 공적(公的) 계명과 사적(私的) 계명이다. 공적 계명이란 십계명과 같이 세상 모든 이들이 공히 지켜야할 기록된 계명들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이 없이 주어진 계명에 순종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적 계명은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부여하신 은사와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서, 오직 그만이 감당해야할 소명(召命)과 책임(責任)으로 부여하신 개별적 계명이다(21절 참조). 그러기에 이 사적 소명의 내용은 모든 이마다 서로 다르다. 놀랍게도 영생의 문은 이 둘을 다 준수할 때 비로소 열린다는 것을 주님이 그곳에서 일깨우신 것이다. 오늘 복음서의 이 젊은이가 이 점에서 큰 벽을 만난 것이다! 

 

1) 예수께서 영생 신앙이라는 차원에서 본 이 젊은이의 결핍(缺乏)부분은 무엇이었을까? 

① 그는 공적 계명을 잘 지켜 온 사람이었다. 즉 ‘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십계명 지시를 성실히 따라 살아왔다. 부모 공경도 잘 해왔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신앙은 대부분의 유대 바리새인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본적 신앙윤리를 지켜온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영생을 원한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② 사적 계명의 핵심인 이웃 사랑에까지 나가는 일이었다. 최소한 그가 남달리 보유한 역량과 하늘로부터 받은 행복의 분량으로,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나누는 일이 있어야만 했다. 즉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적극적 응답이 필요했다. 그가 남보다 더 가진 것이 바로 재물이었기에, 그는 주님으로부터 아무나 쉽게 들을 수 없는,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21절)라는 족집게 명령(?)을 듣게 된 것이었다. 

 

잠시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왜 나의 가장 소중한 자랑거리를 그렇게 내놓으라고 요구하실까? 세 가지 이유들이 생각된다. 첫째는 그것을 자기만을 위한 것으로 고집할 때, 그는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고 탐욕으로 죄를 짓지 만, 내어 놓으면 하나님- 자신- 이웃들 모두에게 좋은 축복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것은 본래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게 아니라, 조물주께서 영광을 받고 싶으셔서 그에게 잠시 맡기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내 재능과 탁월함이 본래 누구의 것인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저 남달리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다가 얼마만큼 쓰다보면, 어느 순간 내 자랑거리나 재능이나 재물, 모두를 홀연히 그분이 거두시지 않던가―! 

셋째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서 내놓으라고 하신다. 그 점에서 의심을 하거나 시험에 떨어지면 안 된다(29-30절). 그 답을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찾으라(창22장). 믿음의 승리는 바로 여기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신적 영역인 영생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생각을 넓고 크게 가져야 한다. 비록 개별적으로 임하는 하늘의 소명이 내게는 감당하기에 좁은 문이라도,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 남보다 내가 더 가진 것이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재산으로, 누구는 지식으로, 누구는 건강으로, 누구는 시간으로, 기타 누구는 다양한 재능들로 더 받아 누린다. 혼자서 다 받은 자는 없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이 맡기신 그것을 요구하시나? 주변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과 나보다 더 필요한 자들을 돕고 싶어서 그러신다. 종종 믿음도 테스트하시기도 하시고! 그때 응답하면, 그것은 오병이어가 된다. 영생을 목표하는 자는 늘 대비하라! 

 

신앙의 초점이 변해야 한다. 내 개인 행복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소유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가치관이 이동해야만 한다. 땅의 행복에 매이면, 영혼과 몸 모두가 금방 무너진다. 재물이 곧 행복을 담보한다는 인식도 버려야 한다. 재물은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일 때, 행복 메이커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영생의 관문인 죽음 앞에서는 ‘빈손’임을 기억해야 한다. 영생의 믿음만이 행복의 함정을 극복한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원숭이를 쉽게 잡는다고 한다. 그것은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 등의 맛있는 과일을 입구가 좁은 병 속에 들여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원숭이가 그 안의 과일을 잡으려고 손을 넣으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 안의 과일을 쥔 원숭이가 그 손을 펴지 안하여 그 병에서 손을 빼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모습이 본문의 젊은이의 모습이었고, 재물에서 인생을 행복을 찾으려고 헤매고 사는 모든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구약 전도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전도서의 지혜자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치열하게 얻어낸 결과물인 돈과 부(富)가 막상 인간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안겨주는 지를 보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오히려 행복이 아닌 불행을 안겨주는 사연이 훨씬 많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고 인간에게 참된 선물로 주신 것들에 더욱 시야가 열려서 그것을 즐거워하며 누릴 것을 권고한다. 

 

1) 없이 사는 사람보다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의 고통과 불행은 훨씬 많고 크다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돈은 아무리 많아도 만족을 모르게 하는 것이어서, 부자들은 돈벌이에도 만족이나 행복이 없음을 지적한다(10절). 재벌들의 문어발 기업경영을 떠올리게 하는 증언이기도하다. 또한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도, 쓰는 사람만 많아지고 정작 돈 번 당사자에게는 눈요기일 뿐이란 것이다(11절). 이래저래 부자는 잠도 편히 자지 못한다(12절). 어디 그 것 뿐인가? 

 

2) 재산과 부가 인간에게 해나 비참함을 안기는 일을 두 가지나 목격했다는 것이다(13-17절).  

① 사업 한 번 잘못하여 망하는 등의 재난(災難)을 만나니까, 다 잃게 되어 그 아픔이 너무 크다. 자식에게 남겨 줄 것도 없을 정도가 된다(14절). 뿐만 아니다. 인간 자체가 빈 손으로 왔는데, 그토록 애써서 벌어 모은 돈도 세상 떠날 때 보니,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더라(15절). ② 재물은 믿을 것이 아니다. 평생을 재물 얻으려고 이른 새벽부터 먹고 지내며 온갖 울분과 고생과 분노에 시달리며 악착같이 일하였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도 지니지 못하더라(17절). 

☞ 돈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들은 덧없이 흐르는 인생의 작은 행복마저 빼앗는다-!

 

3)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20절).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제 몫(분복-세상에서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이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신 몫)을 자유롭고도 만족해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누리는 것이 좋다(18-20절). 특별한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일상과 평범한 삶을 감사하며 즐기고 살아라.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젊은이의 사례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본다. 그의 슬픔과 아픔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지금 예수를 만나 시험에 들었다. 시련의 폭풍 속에 빠져 들었다. 영생의 불합격자가 될 처지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잠자리도 더욱 불편해졌다. 재산이 도대체 무엇이길 레 그럴까?

 

이제 꼭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쥐 것에 대한 애착과 놀 것에 대한 불안함 대신에, 왜 주신 분이 나에게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는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금방 답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마음 소유자에게 영생의 길은 절대 없다. 목표의 수정이 필요하다. 순간의 땅의 부자에서 영원한 하늘 부자로 거듭나는 기회를 붙드는 것이다. 과정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도 그 새 길에서,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다시 나야만 한다(5-11절). 

 

결론을 말한다

 

두 마음을 품어 방황하는 이들이여, 땅의 행복에 매달려 취해 살지 말고 어서 영생의 빛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으라. 예수를 온전히 믿고 따르면, 시냇가에 물댄 동산 같은 삶을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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