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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1-31 (수) 12:03 6년전 1294  

본문) 눅4:16-30, 사61:1-9, 행4:5-12

 

오늘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이란 제한(制限)된 무대를 넘어서, 세계 역사의 현장에서 중심 세력으로 자리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게 해주시는 내용들이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특정 민족이나 영역이나 집단을 초월하셔서 세계 역사란 전 무대에서 주(主)님이 되실 수 있었는 지를 알리는 내용들이기도하다. 

 

그 근본 동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종(여호와의 종)과 그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거룩하신 희년(禧年)의 영(靈)을 부어 주심으로서(눅4:18,사61:1), 그 영이 세상의 묵은 땅(굴레와 제한)을 갈아 업고 새로운 세상과 보다 온전한 차원의 인간들을 생산해내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희년은 결코 세상의 어느 특정한 위인이나 영웅호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 그의 택한 자들에게 소명(召命)으로 임하시면서, 그들을 통하여 밝혀주신 하나님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은혜(恩惠)의 영역이며 현장일 뿐이다. 

 

주의 은혜의 영이 임하시면, 우선 모든 기득권의 굴레나 제한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그 앞에서는 기존의 모든 것들이 한낱 상대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힘은 민족이나 국경이나 혈족이나 문화나 가족이나 종교까지도 훌쩍 넘어선다. 기존의 것들은 자기끼리 만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데에 필요한 것들이요, 더 크고 본질적인 은혜와 영광의 세계를 못 보게 하는 일종의 가림막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년의 성령을 받은 자들은 행동이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진다. 기존의 보고 생각해온 차원과 세상 것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임하신 말씀이 바로 그 희년의 영이었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그는 아비와 본토와 친척의 집을 홀연히 떠날 수 있었다(창12장 참조). 그리고 그의 후손된 이들 역시 그 영을 좇아 사는 이들이라고 믿는다. 예수를 만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 한마디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와 그의 세계를 좇았던 제자들과 그의 후손들 역시 그 영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그 영이 부여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 때문에, 그들은 땅에서는 영원히 ‘나그네’로 살다갈 수 있었다(벧전1:17참조). 머물다 가는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다하되, 그러나 이 세상의 육체적인 것들에다 미련을 두거나 애착하며 욕망을 펼치는 곳으로는 생각하지 아니하는 존재들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보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런 희년의 영성과 마음을 갖고 이 땅을 살아가는 무리들을 하나님은 이 땅에서 변두리 세력이 아닌 가장 중심 세력으로 택하여 사용하신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하여 펼쳐지는 희년의 모습이 너무도 가치 있고 고귀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세 본문의 내용들은 희년 세상을 여는 성령의 실체와 그 영을 받아 그 사역에 참여하는 그의 백성들이 어떤 존재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는 지를 입체적으로 전하여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존재와 역할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다. 

 

o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두 가지 시각으로 볼 수 있다. 

1) 출가(出家)하셨던 예수께서 최초의 고향 나들이를 하셨을 때, 왜 고향 사람들로부터 극단적인 배척을 당하고 그곳을 떠나셔야 했는지, 그 원인(原因)을 통하여 예수의 품은 세계와 고향 사람들의 세계의 엄혹한 차이에서 오는 문제들을 오늘 우리들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  

2) 예수님의 이 행보는 후대 선교사들의 행보의 지침을 제공했다는 점도 확인하게 된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

1) 시작은 말씀 읽기였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관행에 의한 것이었는데(16절), 

 예수께서는 성경 맡은 자로부터(20절) 올라온 이사야서를 받아 그 글 중에서 사61:1이하의 내용을 글을 택하여 친히 읽으셨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自由)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恩惠)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18-20절). 

 

2) 그 말씀 봉독 후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는데, 이는 이사야의 그 희년 예언이 당신으로 인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21절). 여기에는 두 가지 강조점을 담고 있다. 

 

첫째는, 예수의 이 세상에서의 메시아로서의 역할은 하나님의 되찾고 회복케 하시는 희년의 은혜(恩惠)를 모든 빼앗기고 가난한 자들(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에게 베풀어 주시는 일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이런 억압의 현상은 유대를 넘어 범(凡)세계적인 것이기에, 예수의 이 희년 사역은 그 자체가 모든 눌린 자들에게는 절대 복음일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가슴에 가득한 희년 세상을 향한 비전과 열정을 전혀 공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예수가 요셉 목수의 아들이라는 점에 집착하면서, 그런 능력으로 먼저 자기 고향에다가 표적의 보따리를 제공해야한다는 입장을 요구했다(22-23절). 결국 이들은 예수의 큰 뜻을 외면하고 작은 이해에 매달리는 바람에, 예수의 외면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둘째는, 그런 당신에게 임하신 성령(聖靈)은 그런 희년 사역의 역할을 수행할 직임을 부여하고 또 감당할 수 있게 하시고자 함이다는 것이다(마3:16참조). 

☞ 주의 이런 증언은 오늘날 한국교회 성령운동 그룹에서 보여 준 성령이해에 대한 편협 된 입장과는 아주 다르다. 이들은 희년 세상을 열기 위해 주신 성령을 기복주의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의 도구로만 인식하게 하는 경향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성령이 갖게 하시는 진정한 이웃 사랑과 억울한 이들이 누려야할 자유와 해방의 충만한 은혜를 못 보게 하므로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받기를 아예 외면하게 만든 기이한 현상이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3) 그런 고향의 입장을 확인한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은 자가 없었으나, 믿음 있는 이방인들로부터는 환영 받았다’는 구약의 사례들을 들으시면서, 당신이 행하실 희년 사역도 이제는 고향이나 혈연 등에 매여 있지 않고,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세계 만민 그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펼쳐질 것임을 예고하셨다(25-27절 참조). 즉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과 같은 이들을 향한 당신의 희년 운동이 전개될 것을 과감히 예고하신 것이다.  ☞ 하지만 예수의 희년 세상을 열고자 한 ‘탈 고향, 민족의식’의 발언은 극심한 반발에 직면하는 것으로 끝난다(28-30절). 

 

o 이사야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서 널리 알려진 곳이다(사42:1-7참조). 우선은 바벨론 70여년 포로의 복역(服役)을 끝내면서 예루살렘과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뜨거운 위로와 회복의 약속들로 가득하다. 그 동안 빼앗겨 살아왔던 모든 것을 되찾게 되는 은혜의 해와 보복의 해를 백성들에게 활짝 열어주시겠다는 희년(禧年) 선언이다(2절). 이 본문은 후에 예수께서 당신의 사역(使役)을 소개하려고 직접 택하여 읽으신 곳이어서, 더욱 중요한 곳이다(눅4:17-18절 참조).

 

그렇다면 여기에서 그 희년 사역을 펼치게 될 일꾼이 누군가? 주인공의 이름이 없다(1절). 1인칭의 ‘내게’ ‘나를’이란 표현만 확실하게 올라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익명(匿名)의 직분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본국에로의 귀환의 해방의 선물을 안겨 주었던 페르시아의 건국의 황제인 고레스로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인 고레스를 일인칭의 주인공으로 보는 시각은 곤란하다. 

 

그보다는 삼위일체 중의 성자이신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리스도는 창조 이래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나 되어 이 세상 역사 현장을 주도해 오신 주역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정확히 전하고 펼치는 일꾼이셨기 때문이다. 또한 희년을 통해 펼쳐질 놀라운 새 세상과 인간에 관한 증언들을 감안(勘案)할 때에도(2-9절 참조), 그 주역은 어느 특정인 인간일 수 없고 오직 성령이 함께하시고(1절), 아버지가 함께 하시는(8절) 삼위일체의 그리스도만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후(後)에 인간되어 오신 그리스도이신 나사렛 예수께서 이 예언의 말씀을 그렇게 선뜻 택하여 당신의 존재와 사역을 소개하실 수 있었다! 

☞  독자들은 여기에서 거론된 희년의 놀라운 내용들을 더욱 살펴보시기 바란다(2-9절 참조). 

 

o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나사렛 예수의 이 희년의 놀라운 영을 받은 새 인간들이 종교 기득권을 수호하려고 총동원 된 낡은 유대교 폭력적인 종교권력의 세력들과 피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고 있음을 보여준 곳이다(5-6절). 

그 충돌의 발단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온 자가 예수의 사도들을 만나 벌떡 일어나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며, 예루살렘을 커다란 충격 속에 몰아넣은 데에 있었다(9-10절, 3:12-16참조). 그 일은 예수 희년의 정수(精髓)로서, 예수의 죽음으로 그 생명회복의 사역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의 영을 받은 이들을 통하여서도 이 희년의 역사가 더욱 계속 이어질 것임을 보여 준 것이었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 바람에 저들 억압세력들은 나사렛 예수 하나를 죽여 묶어 두려다가, 또 다른 예수의 다수의 분신들이 만나면서 상대해야 하는 절벽(絶壁 ?)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저들이야말로, 생전에 예수께서 예고하셨던 대로, 예수가 행한 일은 물론 행하지 아니한 일들까지도 행하는 무리들로 나타난 생명체들이었다(요14:12참조). 그러니 낡은 세력들과의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사도들은 이 때부터, 하나님이 제 삼일에 부활시키신 그리스도 예수 시대가 저 앉은뱅이와 같은 이 세상 만민을 살려내시는 ‘집 모퉁이 머릿돌’과 같은 존재로 드러나셨음을 선언했다(11-12절). 즉 온 세상 만민이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 없이 구원을 받게 되는 시대가 개막(開幕)되었음을 선언하였다(12절). 그 때부터, 예수의 희년의 영을 받은 이들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복음 선교사의 시대, 그들을 통하여 변화되는 국가, 사회, 가정, 공동체, 문화가 이 지구촌 곳곳에 세워지는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o 결론은 이렇다

 

그렇다. 희년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그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영을 부어주셔서, 그 희년의 영을 받은 이들과 함께 하시면서 모든 생명체들의 정상화와 구원을 위해 앞장 서 일하신다. ‘세상을 세상 되게, 종교를 종교 되게, 인간을 인간 되게’ 하신다. 모든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희년의 영성에 늘 충만해야 한다. 내 안에 이 희년의 주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드려야 한다. 머릿돌 영성으로 불구의 세상을 살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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