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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청년주일

관리자 2019-03-07 (목) 13:43 5년전 1054  

본문) 마 6:16-18, 사 58:1- 9, 고후 7:2-13

 

사순절기 40일 기간이 시작되었다. 나사렛 예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목회 기간이기도 하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시고, 왜 오셨고 목표가 무엇인지, 당신의 택함 받은 백성들이 이 세상과의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리고 당신 이후의 제자(교회)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당신 이후의 세계를 대처해야 하는 지-, 등등의 다양하고도 굵은 과제들에 대한 답을 쏟아내 주셨다.

 

그러기에 이 절기를 맞이하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을 자신과 민족의 죄에 대한 참회(懺悔), 생활에 대한 절제(節制)와 구제(救濟), 자기 부정을 실천하는 금욕(禁慾)과 금식(禁食),예수의 십자가 고난(苦難)에 동참하고자 하는 영적 훈련으로서의 기도(祈禱)와 말씀읽기와 이웃 봉사(奉事)등을 실시하면서, 구세주 예수를 닮은 자신으로 거듭나도록 힘쓴다. 점검과 확인하자. 우리는 이 뜻 깊은 사순절을 맞이하여, 지금 어떤 대응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이 사순절에 이전보다 더욱 관심해야할 일은, 우리가 그 과정을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면서 소화시킬 것이냐에 있다. 우리의 적은 노력이라도 하나님에게 상달되는 일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실과 겸손은 힘이 있고 반드시 열매가 따른다. 하지만 그런 모든 영적 행위들이 매년 행사의 반복성 차원으로 소화될 뿐, 내 삶의 변화와 성숙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날카로운 경고를 받는다. 내용은 금식(禁食)을 하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였지만, 사실은 당신을 믿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일깨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보이려는 자기과시(自己誇示)적인 행태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진심에서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특히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이, 공통적인 주제의 통로를 금식(禁食)이라는 다소 무거운 내용으로 설정한 것은, 금식과 같은 인간의 최고 수준의 신앙 행위라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될 수가 있음을 일깨우시려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들의 어떤 부분을 보셨기에, 그러신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당시 한 주간에 두 번씩이나 하는 금식에 대한 신앙적 접근을 매우 비효율적(非效率的)이고 비생산적으로 하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대 종교인들 대부분이 이 ‘영적 비효율성의 함정’에 너무도 깊이 빠져들어 있었기에, 그들이 지켜오는 다양한 제사와 헌신과 구제 등의 경건의 풍성한 행위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들’이 되었고 외식하는 무리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종교적 수고는 많이 하였으나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종교집단에 불과하고 말았다. 얼마나 안타까운 자들이었나! 생생한 예가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의 내용이 그것이다(눅18:9-14). 당시 아주 종교적으로 대조적인 위치에 있던 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각각 성전에 올라갔다. 누구의 기도가 상달되었을까?  

 

바리새인은 서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하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2-13절). ☞ 상달된 기도의 주인공은 인간 중심의 바리새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했던 세리였다(14절). 인간 자랑과 업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했다! 

 

실로 잘못 믿는다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마지막 결과가 전혀 엉뚱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평생 동안 기우린 우리의 믿음의 수고를 잠시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고 대단한가? 하지만 그 믿음의 접근이 잘못되면, 얻은 것은 전무(全無)하고 허무한 결과만 끌어안게 된다. 영광이 아니라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끝난다. 그러기에, 누구나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된다. 즉 하나님께 상달되는 믿음을 제대로 갖추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우리들도 평생 믿어오면서 걸려 넘어질 함정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신앙인으로서 다양한 모양세를 오래 간직해 온 나는 혹 어긋난 길에 들어선 면은 없는 지를 재점검해야 한다. 즉 내 신앙에도 혹 ‘거두어내야만 할 거품’은 없는가? 모양세(勢)는 된 것 같은데, 내용은 여전히 함량 미달인 것은 아닌지를, 두려움으로 성찰해 보아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금번 사순절의 시작은 ‘바로 그 점을 앞에 놓고, 주 앞에 서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그러면 주님이 그들의 접근 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는 무엇이었나? 바로 신앙이 사람 중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셨다. 그 어떠한 신앙 행위도 누군가에게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이다’는 등을 나타내 보이려는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면 안 된다는 점을 경고하셨다. 반면에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셨다. 겸손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그 분의 은혜와 응답과 축복을 사모하면서 나온 신앙의 행보가 바로 잡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금식의 역사는 길다. 모세의 시내산에서 보낸 40일(출24:18) 금식과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40일 금식(마4:2)을 쌍벽으로, 저들은 주로 민족의 문제와 하나님을 향한 백성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금식하였다(에4:16,욘3:4-9,왕상21:8-21). 주전587년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규칙적으로 금식일을 정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호소하기 시작했다(슥7:3,5참조)

 

예수님 당시에도 매주 두 번씩(화요일,목요일) 금식하는 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관습이 되기도 하였다(눅18:12,막2:18참조). 속죄일은 공식적으로 온 백성이 지켜야할 금식일이었다(행27:9참조). 교회시대에 들어가서도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나(행13:1-3), 장로들을 세우기에 앞서서 금식했다(행14:23). 바울은 금식을 자기 훈련의 기회로 이해하였다(고후6:5,11:27참조). 

 

예수님의 금식에 대한 입장은 기존의 제도적인 것에 비하여 매우 새롭다. 비록 당신이 40일간의 치열한 금식기간을 보내셨으나, 정작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서는 금식할 때와 하지 말아야할 때를 구분해 주셨다. 즉, ‘신랑(예수)이 그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축제 때이기에 금식하지 말아야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 날에는 어둠과 슬픔의 때이기에, 그 회복을 위하여 금식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하셨다(막2:18-20참조). 

 

이 가르침은 금식을 제도적이고 규칙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와의 관계와 그로 인한 축제적 삶의 여부 차원에서 결정되도록 지시하신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금식은(마4:2)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를 깊이 나누는 차원에서 일종의 축제(祝祭)의 장으로 경험되어진 것이라 보인다. 그러기에 주님은 제자들의 금식할 때의 마음가짐에도, 슬픔과 비통함의 외적 표현보다는 축제에 참여하는 식의 밝은 모습을 보이라 요구하셨다(17절 참조). 독일어에서도 이런 뜻이 잘 표현되었다. ‘금식하다(fasten)’는 말은 곧 ‘축제를 벌리다(festen)’이기 때문이다. 

 

☞ 주님이 안내하신 금식은 두 가지가 있다. 다음 둘 중,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① 하나님으로부터 상(賞)을 받게 될 금식이다(17-18절) – 인간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은밀하신 하늘 아버지께만 보이려고 집중하는 것이다. 표정도 보기 싫은 슬픈 표정이 아니라, (저 에스더의 방법처럼-에5:1-4참조) 축제에 참여하는 자처럼 최상의 표정으로 참여 한다!   

 

②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는 금식이다(16절) - 자기는 ‘금식까지도 하는 수준 높은 자’임을 인간에게 각인시키고자, 슬픈 모양세를 보이는 위선자 형(型)의 금식이다. 하지만 그것의 효력은 없다. 그들은 이미 인간에게 상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주실 상이 없기 때문이다(16절).  

 

위의 두 가지 류(類)의 금식들은, 구약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다

 

포로기의 쓰라린 고통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평소의 보편적 기도 이외에 금식을 제도화하면서 생활화하기에 힘썼다. 금식 기도의 힘을 민족적 차원에서 결집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힘입고자 열심을 낸 것이다. 그 취지만 보면, 얼마나 대단하고 가상(嘉祥)한 것인가!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그들의 금식 행위는 새로운 범죄 행위로 흘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책망과 외면을 불러오는 화근(禍根)이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그 원인을 모른 체, 자기들의 금식과 고행을 외면하시는 여호와께 불평불만을 토하기도 했다(1-3상.참조). 그러자 여호와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금식의 범죄적 내용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자상히 일깨워 주셨다. 제대로 된 금식만 한다면-, 그들은 새벽 햇살처럼 비치리라고 하셨다! 

 

1) ☞ 여기에서도 두 종류의 금식이 나타난다. 또 다시 묻게 된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① 상(賞) 대신에 범죄(犯罪)를 불러오는 금식이 있다(3.하-5절 참조) - 자기만을 생각하는 종교행사로 만든 금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전무(全無)한 것이다. 즉 금식하는 주어진 시간에는 오락과 향락을 찾으며, 자기가 해 온 일들의 멍에를 집안의 일꾼들에게 떠넘겨서 그들의 업무를 가중(加重)시키는 짓을 한다. 요즈음의 ‘갑집(甲質)’을 한다. 그 바람에 서로 다투고 싸우며 못된 폭력(暴力)도 서슴지 않는다. 통회와 괴로움의 날이란 금식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의 금식은 주변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될 터인데, 그게 어찌 하나님께도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모양세만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그게 어찌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금식이랄 수 있겠는가?  

 

② 상(賞)과 인정(認定)을 불러오는 금식이 있다(6-7절) - 금식이 자기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어려운 주변의 이웃들에게나 공동체(共同體)에도 도움이 되게 하는 금식이다. 금식은 절제와 금욕과 회개와 비움 등의 다양한 영성을 담고 있는 고도(高度)의 가치를 가진 기도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금식하는 동안 모아진 모든 것들(돈,시간,양식,휴식 등)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가지지 못한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게 바람직하다. 즉 자신의 금식이 주변 사람들에게나 공동체에도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되게 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그럴 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금식에 큰 복을 베푸신다! 그게 어떤 복인가?

 

2) 제대로 된 금식 행위는 다음의 풍성한 보상(補償)이 따른다(8-9절). 

삶에 빛이 드러난다. 아픔도 곧 회복된다. 여호와의 의와 영광이 그의 앞뒤에서 호위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응답도 빠르다. 주님은 언제나 그의 부르짖음에 민감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의 이웃과 세상의 아픔과 치유를 향해 행동하는 신앙이 계속 힘을 얻도록, 그를 더 북돋아 주셔서 그로 하여금 물 댄 동산과 마르지 아니하는 샘 같게 하신다(9-12절. 추가).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사도 바울은 마음에 깊은 근심과 아픔에 많이 시달린 분이었다. 그것은 그가 개척하고 목회하던 교회들로부터 당한 일련의 불신과 비판들 때문이었다. 예컨대, 그는 12제자의 그룹원도 못되었는데에도 자신을 스스로 사도(使徒)라고 한다는 사도권에 대한 의혹과 공격들, 그가 많은 교회 목회처들로부터 생활비를 (많이) 받으려고 그렇게 개척과 목회에 열심 한다는 의혹들, 그리고 글보다는 말이 약하다는 등등의 뒷이야기들이 그를 꾸준히 괴롭혔다(고후11-12장.참조).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외부 비판들에 대하여 해명(解明)에도 힘썼다. 그것은 자기변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증언한 복음과 그리스도가 그런 악소문(가짜 뉴스)으로 인하여 함께 거부되거나 의혹 속에서 그 간의 구원의 사역이 훼손당할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일 중의 하나는, 당신의 신앙지도를 받았던 신도들이 그런 의혹과 비난을 주도하는 거짓 교사들의 말에 너무 쉽게 편승하면서 시험에 빠져드는 모습이었다(2:1-13참조). 

 

그런 슬픈 현실을 극복하려고 바울은 여러 목회적(牧會的) 대처를 했다. 해명과 책망을 담은 서신 보내기, 당신의 특사로 동역자 디도를 보내서 당신의 입장을 전하기, 그리고 교회의 주이신 주님께 금식을 포함한 기도 올리기 등등의 제반 노력을 다했다. 본문은 그런 결과에 대한 디도의 보고를 들은 바울이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한껏 드러낸 내용이다(9-13절 참조). 그는 공동체를 통해 가져던 자신의 슬픔과 근심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이어서, 그들에게 사도를 향한 회개와 변호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면서 모두를 후회 없게 하면서 위로까지도 얹혀 준 선물이 되게 하였음을 확인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허약한 인간들의 마음과 관심을 사려고 행동했던 인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를 상대로 매달려 기도하고 탄원하였던 참 신앙인들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점을 분명히 구별지어 주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옛 이스라엘 유대 백성들은 그들의 위선과 인간중심주의적 행태로 인하여 신앙의 실패자의 모델이 되었으나, 하나님과 그의 교회 공동체를 위해 근심과 아픔을 걸머진 사도 바울은 승리자의 모델이 되었다. 이제 우리 모두 옷깃을 다시 여미자. 제도나 관습이나 문화에 얽힌 허풍이나 거품을 거두어내자. 온전하고 실질적인 접근으로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자. 복의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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