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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1-24 (목) 18:59 5년전 1220  

본문) 마7:13-23, 미6:1-8, 약1:16-27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포함)의 목표는 열매에 있다. 선포된 말씀이 겨냥하는 것은 사람들이 듣고 깨닫거나 즐기는 수준이 아니다. 그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기록되거나 선포된 모든 말씀들은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씨가 되어 싹을 내고 나중에는 열매를 맺는 것이 목표이다. 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들은 말씀에 대한 실천(實踐)과 행함이다. 그럴 때, 거기에서는 좋고 선(善)한 열매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듣고 외면하거나 무시하게 되면, 그 때는 자신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요3:18-21참조). 

 

그 까닭은 말씀에 대한 무시는 곧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시로 이어질 뿐더러, 진리를 향하여 뻔뻔스러운 자가 되고, 또 그래서는 안 되는 자신까지도 속이는 자가 되는 이중삼중(二重三重)의 어리석음을 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전(傳)하는 자도 제대로 전해야 하고, 듣는 자 역시 그 말씀을 잘 분별하여 확실한 응답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앞에 모인 우리 모두는, 선택(選擇)의 문 입구에 선 자(者)들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 그게 좁은 문인가, 넓은 문인가? 

 

예컨대, 좁은 문을 선택한 이의 삶의 모습을 보자.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지는 아니한 사람이 분명할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지는 아니한 사람이 분명할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누가 알아주던 몰라주던 개의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뜻을 좇아 선하고 가치 있는 일에 힘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힘겨운 일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헌신된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좁다’는 말에는 ‘환란’이란 뜻이 들어있다. 어렵고 힘겹고 십자가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환란은 종말론적 소망을 안고 있고, 또 생명의 문으로 가는 길임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좇는 무리들도 결국은 두 종류로 나누어질 것을 예고하셨다. 그들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과(13절.상)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13절.하)이다. 주님은 일편단심 당신의 제자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무리들도 많이 있을 것을 예견(豫見)하시기도 하셨다. 

 

좁은 문은 어떤 문인가? 생명(生命)으로 인도하는 문으로서,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은 자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14절). 넓은 문은 어떤 문인가? 멸망(滅亡)으로 인도하는 문으로서, 그 길이 크고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13절,하). 결국 우리의 생명과 멸망이 결정되는 갈림길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 주의 말씀을 듣고 받는 일 자체가 얼마나 엄중한 일이며, 그 자리가 있는 것 자체도 얼마나 운명적인가! 

 

먼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을 살펴보자

 

세 본문은 공히 주의 백성들을 멸망의 길인 ‘넓은 길’로 인도하려는 세력들이 있음을 공개하고 있다. 그들이 누구며, 그 정체는 무엇인가? 

 

1) 거짓 선지자(先知者)들이다(마7:15). 이들의 특징은 겉은 순진한 양(羊)인데, 속은 무서운 이리(wolf)라는 점이다. 낮과 밤이 상극인 ‘지질 박사와 하이드’의 극단적 양면을 가진 자들이다. 겉모습은 모두를 위해 자신을 다 내어줄 것 같은 고급의 의인 같은데, 속 내용은 야욕과 탐욕으로 노략질을 일삼을 저급의 인간임을 말한다. 오늘날 이런 류(類)의 교회 지도자나 목회자들이 성폭력과 재산 갈취와 잘못된 교회 분열 등으로 인해 세상에 자기 정체를 드러내면서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기도 하다. 그 바람에 기독교의 신뢰도를 크게 훼손하고 순진한 신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모습에서도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까지 들어나지 않으면서도 어린 양들을 실족하게 하는 많은 거짓 선지자(지도자)들을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어떻게 분별(分別)하며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점에서 주님은 일단 그들의 열매를 보고 알라고 조언(助言)하신다(16,20절). 좋은 나무인가, 못된 나무인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지, 나쁜 열매를 맺고 사는지-? 아니, 지도자요 선지자인 그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넓은 문으로 들어간 안이한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보이는지-? 이런 점에서 관심을 갖고 관찰하게 되면, 우리는 거짓된 지도력으로 인하여 당할 피해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의 영적 경험과 능력을 말씀 자체와 거기에 담긴 뜻보다 앞세워, 자신의 의(義)와 공로(功勞)를 내세우려는 인물들이 많은데, 그들 역시 경계해야 될 대상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며, 기적도 행사한 일은 분명히 놀라운 일을 한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런 신령한 행사들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받들어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에,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존재일 뿐이다(21-23절). 

 

3)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우릴 줄 모르는 사람이나 그 말씀을 전혀 마음에 기억하지 않고 살거나,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도 알려고 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번제물이나 헌금이나 헌물 등을 제물로 드리면 신자의 의무를 다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자기와 하나님을 속이는 사람들이다(미6:1-7절 참조).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제사는 어떻게 가능할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고 대처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과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몸과 물질 중심만으로 밀어붙이듯 하는 모습은 마치 뇌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와 같아서, 수고만 많은 뿐 하나님에게는 전혀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중에 심각한 후유증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실망하신 까닭도 바로 그 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제물이나 큰 공로나 업적을 못 받으셔서 기분나빠 하신 분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들 위주로 하나님을 상대하려는 태도와 그 마음에 분노를 하셨다. 

 

4) 교회에서 ‘첫 열매 된 자들’(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이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모르고, 처신을 함부로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깨버리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세력들이다(약1:18-20, 26절 참조). 그들의 대체적인 모습은 이러했다. 

 

-자기 통제가 전혀 안된 자들인데, 예컨대 성내기를 잘한다. 그래서 거친 언사를 통하여 욕설을 내뱉거나 더러운 악한 모습을 보이는 모습이다(20-21절). 한마디로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못하므로서, 자기 통제력(統制力)을 상실한 사람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중요한 직책에 있거나 영향력(影響力) 있는 자리에 있게 되면, 그 교회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고 목회자의 목회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된다(26절 참조). 

 

5) 말씀을 들으면서도 실천(實踐)할 줄 모르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으로 듣지 않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말씀을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받지 아니하기 때문이다(21,하-22,25절). 그런 자의 특징은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자신을 계속 속이며 산다는 점에 있다. 늘 자신의 모순도 알면서도 고칠 줄 모른 체, 긴장감도 상실한 체, 종말과 심판의 그 날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과연 어떤 선물을 안겨 주실 수 있겠는가? 선물이 아니라, 분노의 잔을 쏟아주실 것 아니겠는가! 

 

오늘 받는 야고보서에는 유달리 ‘속이지 말라’는 요구가 강렬하다(16,22,26절). 하나님의 우리 자신에게 속임을 당할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이며, 자신을 속이는 일도 계속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하라.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을 속이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다. 그 실체와 진실이 들어나는 날은, 마치 ‘양(羊)치기 소년’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속이고 속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로 살지 말라. 그들을 깨우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한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생명의 길은 본능(本能)의 욕구의 산물이 아니라 의지(意志)의 결단에서 찾는다. 교육과 훈련이란 연단에서 갈고 닦으며 얻어내는 보화이다.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힘들고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 곳으로 가려는 사람 역시 많을 수 없다. 그래서 좁고 협착한 길이다. 하지만, 그곳은 생명이 있고 기쁨과 보람이 있고 구원이 있음을 알기에 가야만 하는 길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란 거인(巨人)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철저히 부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분이 매어 주시는 멍에까지 매지 않으려고 하여도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마10:38). 

 

그러면 이렇게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을 그래도 선택하며 들어 갈 사람이 누구인가? 자기 것으로는 안 됨을 깨닫고, 오직 예수의 것으로만 됨을 믿고 따라나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지워주시는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우며 사는 사람이다(마11:29). 그러면서 그 분이 주시는 쉼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다. 오늘 세 본문에는 이런 좁은 문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을 보다 자세히 전한다. 그들은 어떤 이들인가? 

 

1) 거짓 선지자의 속임수에 빠지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받드는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다(마7:15-21참조).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여 불법(不法)을 범하지 아니하고 산 사람이다(23절). 

 

최근 한국교회의 원로 중의 한 목사가 교인들에게 남북정상회담이 잘 못하도록 금식(禁食)하자는 선동을 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의 머리와 가슴에는 무엇이 들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의 영향 하에 있는 그 교회의 많은 성도들도 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믿었기에, 그런 황당한 목사가 아직도 활개 치게 하고 있으며, 그 말이 그들에서 통용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거짓 선지자의 전형이랄 수 있는데, 그런 거짓 인간의 선동에 극우 신자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었을 일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거짓 선지자인 발람을 억제하기 위해 고통을 받았던 그의 나귀와 같은 신자들이 그것에는 그렇게도 없는지 궁금하다(미6:5참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그곳 교인들은 왜 외면하는가? 그런 자들은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간 자들이 못된다. 신도들도 매우 분별을 잘 해야만 한다. 

 

2)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들, 즉 정의(正義)를 행하며 인자(mercy)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미6:8참조). 여호와는 균형과 공평과 치우지지 아니함으로 그의 백성들을 올바르게 세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비록 자기 백성이라고 해도,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악행 하는 자는 책임을 묻는 분이셨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M.루터).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깊게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교회에서는 언행(言行)에 신중한 사람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신중한 사람이 좁은 길에 들어간 사람이다(약1:19,27절). 이런 사람은 교회에 큰 유익을 주고, 특히 목회하는 목사에게 큰 힘이 된다. 스스로에게도 큰 기쁨과 평화를 누린다. 

 

4)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주신 말씀을 마음에 받되, 온유함으로 받은 까닭에, 그 말씀을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게 되어 좇게 되었기 때문이다(21.하-25절).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곧장 행하며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쉽게 받는다(25절.하). 

 

5) 이웃을 사랑하는 영적 경건이 깊어야 한다(27절). 지난 시간에도 들었던 대로, 우리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늘 두 곳을 향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위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고, 아래로는 땅에서도 매우 고통 하는 가련한 이웃들을 향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오직 우리만이 돌보아야할 이웃들이 많다.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숱한 곤고한 무리들이 많다. 그들을 돌봄은 곧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런 생활을 통하여 자신을 세속 사회로부터 구별하고 지켜나가기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넓은 길을 가는 인생의 모습 5가지와 좁은 길을 가는 인생의 모습 5가지를 대비하여 들었다. 선택은 여러분 자신의 몫이다. 부디 복과 영생의 길을 선택하시라! 눈앞의 안일이나 손쉬운 인생길을 즐기지 마시고, 다소 힘들어도 견디시면서, 가치와 보람과 평화를 더불어 누릴 인생길을 취하시라.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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