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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여신도회주일

관리자 2019-01-17 (목) 23:57 5년전 1186  

본문) 마5:17-20, 신10:12-22, 딤전1:1-11

 

예수의 천국 복음이 계속 전파되고 있었다. 그의 모든 선포와 가르침은 일관되게 하나님 나라로 귀결이 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한 특징이다. 땅의 현상만을 규정하거나 인간의 삶만을 규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선포가 아니었다. 여태껏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선포 속에는 아주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예수의 선포의 파장(波長)은 매우 컸다. 

 

우선은 제자들의 놀라움도 컸고, 그를 주목하는 시선들도 많았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해왔던 율법(律法)과는 차원이 다른 선포여서, 매우 새롭고 신선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의 생활을 규제하고 통제하던 율법을 직접적으로 손대고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에 엄청난 주목과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우리의 반공법을 손대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의 선포가 어떤 동기에서 그렇게 나온 것이며, 당시 주변으로부터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일까? 

 

예수께서 거침없이 율법을 손대시는 까닭은 그의 말씀 속에서 그 직접적인 동기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閉)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完全)하게 하려 함이라’(17절). 그렇다. 예수께서 율법을 손보시는 까닭은 율법의 내용이 비(非)복음적이기 때문에 폐기처분(廢棄處分)할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종교와 인간들에 의하여 오랫동안 그 본질과 정신이 크게 훼손 되어 집행되고 있었기에, 당신이 이제 제대로 율법을 원상복구(原狀復舊)시키고 예언을 성취시키고자 함에 있었다. 

 

예수님의 그런 선언은 당시 율법을 집행하던 유대교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일종의 체제에 대한 도전처럼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들의 그러한 반발과 예상되는 억압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이미 당신은 그 진리 회복과 그로 인하여 오랫동안 구원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수  많은 영혼들을 눈뜨게 하고 구원하시려는 일에 목숨을 거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 보시기에 당시 유대교가 율법을 왜 그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고 보신 걸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맡아 시행하도록 심부름하는 청지기인 유대교가, 하나님이 맡기신 율법을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자기들을 위한 복음만으로 각색(脚色)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 말은 그 때 그들이 제시한 율법은 그 말씀을 주신 분인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는 관심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유용(流用)하고 악용(惡用)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법규로 변질(變質)시켜 놓았음을 말한다. 

 

그 바람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크게 변질시키는 죄(罪)를 범한 것이다. 율법이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공의와 정의의 정신을 빼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가르치는 자들은 범죄자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담처럼 등을 돌리게 되었고, 듣고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군림하는 지배자처럼 되게 하였다. 율법의 기본 정신이 담고 있는 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 모두의 삶을 통제하고 거룩하게 하며 온전하게 하는 기능이 급격히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율법은 가르치는 자에게는 편한 말씀으로, 배우는 자에게는 힘든 말씀이 되게 하면서, 사람을 차별화시키고 계층화시키는 질이 매우 좋지 못한 종교가 되게 한 것이다. 

 

율법은 본질상 하나님의 마음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담고 있다. 그러기에 율법 앞에는 계층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겸허하게 순종하며 따라야할 생명의 법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당시의 율법과 그 집행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망가뜨린 것일까? 그것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과 마음을 무시하고, 문자를 활용해 자신들을 위한 패거리 집단을 만들고 보호하려는 규범들로 변질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자기들과 백성들의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강조되었다. 자기들은 전하고 가르치는 일만 잘하면 되고, 백성들은 오로지 자기들의 가르침을 실천(實踐)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종에 잘못된 평행(平行)이론이 부지중에 설정된 것이었다. 그것은 율법을 주신 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였다. 주님에게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교육과 실천을 함께 할 통합(統合) 이론이었고, 필요한 사람은 그 이론을 성실히 실천해낼 인물이었다. 

즉 새 시대에는 내용과 행함이 겸비된 일꾼이요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낡고 병든 유대교의 영역 안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전혀 새로운 인물군(人物群)에서 창조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찾아 낸 무리들이 바로 갈릴리 중심의 12제자들이었다. 그들의 성향을 보면, 기존의 유대교 영역과는 전혀 무관한 무리들이었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무리를 아예 사회의 밑바닥 인물들에서 찾으셨다.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의 미래(未來)를 담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예수님으로서도, 그들 교육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떨어진 예수의 1차적 분부(分付)는 바로 이것이었다.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당신의 제자들의 수준(水準)끌어올리기가 매우 절박(切迫)한 일이었음이 담겨있다. 만일 당신의 제자들 수준이 당시의 종교 주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수준에 머물거나 그보다 못한 것이었다면, 당신의 오심과 목적은 실패한 것이 될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런데 그 극복 대상은 당시의 종교 최고 엘리트 그룹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다는 점이다. 내용상으로 그들보다 좋아야하고 나아야만 했다. 실로 가벼울 수 없는 큰 과제였다. 어떻게 그 미션을 해결해 가야만 할 것인가? 

 

복음서를 다시 보자

 

예수님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 사랑을 다시 보게 한다. 율법과 예언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오랫동안 먹여왔던 영혼의 양식으로서의 말씀의 두 기둥들이었는데, 당시는 그 기둥들은 부실한 청지기들에 의하여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하늘의 주인이시며 일찍이 그 말씀들을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셨던 주인공인 그 주님은 바로 그 점이 너무도 아팠다. 그러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 말씀의 기둥들을 제 모습으로 복원(復元)시켜야만 했다. 예수님은 그 새로운 출구를 제자들에게서 설정하셨고, 그들의 기본적 의(義)의 수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것’으로 제시하셨다. 그 내용을 확인하자. 

1) 주님은 성육신의 목적이 율법과 예언에 폐기가 아니라 완전하게 하심에 있음을 밝힌다(17절)

2) 주님은 율법이 가진 영원성(永遠性)과 불변성(不變性)을 확증하신다(18절). 

3) 특히 율법을 받고 가르치며 전하는 자들의 고유한 임무(任務)와 그 소중함을 일깨우셨다. 그들에게는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취사선택(取捨選擇)할 권리가 부여되어 있지 아니하다. 그 까닭은 그가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데로, 하늘에서도 그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9절).

 

특히 가르치는 자는 율법 중에 얕잡아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명심(銘心)해야만 한다. 하찮은 작은 것이라고 얕잡아 보는 일로 인하여 피해를 보게 되는 사례가 발생한다면, 그런 사람은 예외 없이 천국(天國)으로부터 자신도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특별히 강조하신다. ‘누구든지 이를 행(行)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하셨다. 

 

4)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신다. ‘너희 의는 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부도 더 나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생각을 말아라’(20절). 엄청난 부담을 주셨다. 애매모호한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온전하심을 제대로 밝히고 전하는 청지기들이 되라고 엄명하신 것이다. 그래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본 목적을 이룰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주인공들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여기에서 잠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저들보다 더 나으려면 어떤 점에서 접근해야만 할까? 그것은 그들이 말로 가르치고 남에게 시키는 삶의 행태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영역’을 주목하면 된다. 그게 무엇이었나? 이른 바 ‘황금률(黃金律)’이다. 예수께서 친히 언급하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절). 즉, 지도자들부터의 이웃 사랑의 영역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런 주도적인 섬기는 태도를 밑받침으로 해서, 말씀교육이 실천되어야 그곳에서 천국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주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Identity)을 일깨우시는 말씀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은 존재들인지, 그러기에 그들의 삶은 어떤 차원을 향하여 가야하는 지를 일깨우신 말씀이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진정 특별(特別)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들의 위치에 접어들게 된 이들이 되었기 때문이다(22절). 그러기에 그들에게 긴히 요구되는 분부(分付)는 ‘특별(特別)한 마음가짐을 갖고 살라’는 것이었다(16절). 요약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시선(視線)은 ‘위로는 하나님께, 땅에는 낮은 자를 향하여’ 두고 사는 것이다!

 

1) 그들은 누군가? 야곱의 후손 70명으로 시작된 자들이었는데, 그래서 애굽의 타향살이 400여년이 넘도록 마치 보잘 것 없는 노예(奴隸)족(하비루)처럼 살아왔던 그들이었는데, 지금의 그들은 마치 하늘의 별 수같이 창대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복을 주신 것이다(22, 14-15, 7:6-8절). 

2) 그러기에, 그들은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삶을 살아야만 할까? 그 실천사항들은 이것이다: 

①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목을 곧게 하면 안 된다’-특별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16절)

②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일 의(義)로 알고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뜻과 마음을 분별(分別)하며 좇아 사는 일에 전념(專念)해야만 한다(12-13절). 그 내용을 우리 모두 합창해 보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③ 그러면서 겸손한 마음, 보다 낮은 자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자들(고아-과부-나그네)에 대한 특별한 이웃 사랑의 마음과 행실을 요구하셨다(17-19절). 그 근거는 자신들도 예전에 그런 불우한 처지에서 은혜와 복을 받았던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19절). 이런 부분은 예외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은혜를 저버리게 되면, 그들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마5:19-20참조). 

④ 하나님을 알고, 또 그 안에서 사는 삶(인생)을 고착(固着)시키는 일이다(20-21절). 

경외하며-섬기며-의지하며-맹세하며 살아라. 그는 네 찬송이시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바울 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자 후배 동역자인 디모데가 사역 현장인 에베소 교회와 그 영적 환경에서, 영지주의(靈知主義)란 이단(異端)과 유대교의 거짓 율법(律法)교사들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을 안타까워하면서, 흔들리지 말고 복음의 자리에 더욱 굳게` 설 것을 권고하고 있다. 

1) 사도 바울이 그의 믿음의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임을 밝힌다(1-2절). 

2) 바울은 자신이 디도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도록 명령한 이유를 밝힌다.(3-4절). 

3) 당시 이단자인 영지주의(그노시스)는 영혼의 불꽃을 물질세계에서 철저히 끄집어내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기에, 물질과 몸에 속한 것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인 태도가 깔려 있었다. 완전한 이원론자를 만든 것이다. 그 지식을 가진 자들은 자연히 물질을 깔보고 현세의 질서에도 무관심하며 세상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게 했다. 그러기에 그 교리에 빠지면, 기독교의 신구약의 두 핵심인 율법과 복음도 외면하게 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못 보게 만든다. 

 

즉 율법도 낮은 영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그 영(지식)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려는 도우미 정도의 수준으로 보았다. 그리고 예수의 성육하셔서 인간의 죄 된 몸을 입고, 또 낮고 천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기독교 구속사적인 진리와는 전혀 관심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실로 기독교 신앙인들의 영적 자세를 완전 무장해제시키는 파괴자들이었다. 그 이단 신자들은 두 종류가 나왔다. 혼인과 성을 적대시하는 엄격한 금욕주의자가 되거나(딤전4:1-5참조), 윤리적인 질서를 일부러 무시하고 파괴하려는 방종주의자가 나왔다(유7-8,18절) 

 

결론은 이렇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다시 보자. 불법하는 자를 제재(制裁)하기 위함도 있지만(9-10절), 인간에게서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순수한 믿음에서 나온 사랑을 견인하기 위한 것이기에(5절), 그것을 적법하게만 사용하면 선(善)하다(8절). 

 

율법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유도한다. 지식과 각성 차원에만 머물지 않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향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복음의 위한 것이기에, 잘 가르쳐야 하고 또 모두가 실천함으로 지켜내야만 한다(11절). 한국교회의 위기도 가르침과 행함을 함께 하라는 이 율법의 지침에 충실할 때, 능히 극복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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