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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1-23 (화) 19:00 6년전 1297  

본문) 11:2-15, 44:1-8, 5:27-42

 

예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5:38)고 선언을 하신 바가 있다.

 

이것은 당신으로 인하여 이전(以前)의 낡은 시대는 마감되고, 전혀 다른 차원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한 말씀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이전에서 이후로이전(移轉)하고 낡은 것에서 새 것으로변화(變化)되는 과정은 분명히 거기에 따른 큰 진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변화와 이전의 정점(頂點)에 십자가(十字架)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로 인해 온 새 시대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율법(律法)을 넘어 복음(福音)의 시대가 열렸음을 말한다. 정죄의 시대에서 용서(긍휼과 자비)의 시대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대립의 시대에서 공존의 시대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전쟁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말한다. 머리의 시대에서 가슴의 시대로 옮겨갔음을 말한다. 따짐의 시대에서 이해의 시대로 이전하였음을 말한다. 바로 이런 특성이 예수로 인하여 열린 새 시대의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분명히 예수의 시대, 즉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은혜를 받는 자들인데-, 그렇다면 과연 우리 마음과 생각과 가슴의 현 주소는 어떤가? 혹 여전히 율법의 시대, 정죄의 시대, 머리의 시대, 따짐의 시대의 자녀들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이 복음의 시대에 적합하지 못하다면, 거기에서는 축복은 없다. 평화와 진리의 능력을 맛볼 수는 더더욱 없다. 아직도 옛 것의 종이고 낡은 것의 종이어서, 거기엔 여전히 갈등과 분열의 주역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1세기에 깊이 접어든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은 심히 걱정스럽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율법주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복음주의적인 인물이다.

 

마침 오늘 세 본문들은 이 두 상반된 시선들과 입장들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음과 함께, 하나님이 그 중에서 누구와 함께 일하시는 지를 생생히 보여 주신다. 그러기에 오늘 세 분문을 통해서 확인하고, 어서 그 옛 것들의 속성에서 벗어나 진짜 복음의 사람으로 새 출발해 보자.

 

o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하나

 

두 가지 포인트로 보는 게 좋겠다.

1) 세례자 요한이 본 예수와 예수가 본 요한의 시각의 차이는 매우 컸다.

2) 당신을 오해하는 그런 요한에 대한 예수의 시각과 마음에서 우리는 참된 복음을 다시 본다

 

옥중(獄中)에 있던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요한의 이 질문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오랜 판단과 인식에 혹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나온, 깊은 고민과 갈등에서 확인하고 싶어서 묻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나사렛 예수께서 오실 그 분임을 믿었고, 확증하며 증거해 왔었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의 하시는 행위를 지켜보면서, 결국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나사렛 예수의 행태가 그가 바랐던 그 메시아의 상()과는 무언가 큰 차이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요한의 갈등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역시 예수로 인해 오는 새 세상과 새 차원을 수용하기에는 역량과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역시 예언자였다. 불같은 예언자로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을 끝없이 선포했다. 수많은 백성들은 말라기 이후 400여 년간의 단절된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을 통해 재게된 일을 기뻐하고 환영하면서, 그에게 나와서 회개하고 새 삶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는 오실 그 분은 자기가 터놓은 심판(審判)의 길, 율법의 길을 완성하시리라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예수에게서 갈등이 깊어지게 된 것은 예수의 선교가 자기가 바랐던 그 정죄와 심판의 유형이 아니라, 용서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특히 죄인의 친구가 되어 마치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처럼 행동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기대와는 큰 오차를 보인 예수가 과연 자기가 그토록 고대하던 분이었는지가 정말 궁금해진 것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혹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며 질문했던 것이다.

 

요한의 갈등과 고민을 헤아리신 예수의 답변은 단호했고 분명했다. 타협적이지도 아니했으며 오히려 요한이 이제는 새 흐름을 받아들여야 됨을 분명하게 통보하셨다. 당신의 오심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태껏 율법주의에 빠져서 제대로 된 희년(禧年) 세상의 맛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당신으로 인해 시작될 복음의 시대에서 그 맛을 충분히 보고 누리도록-, 그 일을 위하여 오셨음을 통보하셨다(4-5). 하나님의 구원은 정죄와 심판의 위협에 의해서가 아니라, 용서와 긍휼의 사랑 안에서 주어질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 후 요한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다음, 예수께서 그런 요한에 대한 평가를 내리신 장면은 정말 큰 스승다우신 모습 바로 그것(복음) 자체이었다. 자기에 대하여 의심하는 요한을 향하여 배신감이나 실망감이나 단절이 아닌, 최고의 찬사를 보내신 예수의 언행과 그 관용의 마음은 우리가 왜 그를 닮아야하는 지를 새삼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랬다. 인간적 이해가 아닌 구원사적 흐름에서 평가하신 것이다.

-모든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9), 당신의 사자요 예비자(10), 인간들 중에 가장 큰 자(11),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11), 선지자와 율법 세대의 최종 주자(13), 다시 오리라 했던 바로 그 엘리야(14)

 

o 구약 이사야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하나님 여호와와

그 하나님이 보시는 이스라엘 백성에는 큰 차이(差異)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포로기의 참혹한 생활을 70여년 오랫동안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두려움과 의혹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먼저는 그들이 믿어 온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그런 자기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으랴는 의문과 함께, 오랜 지배자들인 제국(帝國)의 위협 또한 항상 그들의 희망을 꺾어놓고 있었다. 앞날을 생각하기만 하면 그저 두렵고 막막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아주 달랐다.

그들은 이미 그들 조상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다 치루고 난 존재들로서, 정죄의 시대가 아닌 위로와 영광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그들이었다. 따라서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그들임을 알리셨다(1). 그 점을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요약해 선포했다.

 

1) 그들은 이제 야곱(속이는 자)이라기보다는 여수룬(정직한 자)으로서, 여호와가 도와 줄 택한 무리들이다. 당신의 생수와 영과 복을 받게 될 결정적인 대상이었다(1-4).

2) 외국인들이 닮고 싶어 하는 존재가 되며, 함께 하나님의 백성 됨의 복을 받게 된다(5).

3) 참 반석 되신 왕이요 구원자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누구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6-8).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 회복과 부여는 나사렛 예수의 오심과 그에 대한 믿음과 함께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예수로 인한 희년(禧年)운동과 참 생명 회복 운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세례자 요한은 몰랐으나, 성령은 예수의 제자들과 그의 교회 공동체에게 그런 세상이 도래하였음과 그런 복음적 인간으로 살아가야함을 일깨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o 서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율법 시대()와 복음의 시대()가 첨예하게 맞서는 현장을 목격한다.

예수의 이름이 두려움이 되느냐 삶의 희망이 되느냐를 놓고, 두 신구 세력들 간에 충돌한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게 된 일이, 그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포악에 대한 보복과 심판의 차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서 그를 만민의 임금과 구세주로 삼으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임을 선언하였다(29-32참조). 여기에는 사44:6-8의 예언이 예수로 성취되었음을 담고 있었다.

 

그 양측의 충돌의 결과는 최악(最惡)으로 갈 수도 있었다(33).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또 다른 일꾼인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율법학자인 힐렐(Hillel)의 손자이며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던 인물로서(23:3),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던 자였다(34). 그는 극단론자들인 동료들과는 달리 복음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 운동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기다려 보자며 당시의 거짓 메시아들이었던 드다와 유다의 사례를 들어 흥분에 빠진 동료들을 진정시켰고, 제자들의 희생(犧牲)을 막는 매우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o 메시지 결론을 제시해본다

 

율법적 인간이 아닌 복음적 인간이 필요한 시대이다. 세상과 인간을 움직일 지혜와 힘은 율법에서가 아니라 복음에서 나온다. 예수가 그런 분이셨고, 또 그런 자들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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