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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탄 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2-22 (토) 16:10 5년전 1182  

본문) 요 3: 16-21, 미 5: 2-5, 요일 4: 7-12 

 

성탄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교회력에 의하면, 성탄절은 연(年) 7절기 중, 가장 짧게 지나는 절기이다. 오늘 성탄일과 다음 주일인 성탄 후(1)면 마감하기 때문이다. 시작하면서 끝나는 계절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마음을 집중하지 아니하면, 7개의 절기 사닥다리 하나를 무심히 건너뛰게 되는 무리(?)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탄절을 맞이하는 주의 백성들은 어느 때보다 이 계절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세상력(世上曆)으로는 년말연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성탄의 지도(地圖)를 보여주는 복음서는 대략 두 가지 갈래였다. 

 

첫째는, 마태와 누가가 전하는 성탄이다. 그곳의 소식을 듣다보면,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 벌어졌던 환상적이면서도 숨 막히던 아기 예수 탄생의 순간들을 접하게 한다. 거기에는 저 페르시아의 현자(賢者)들인 동방박사들이 오랜 순례를 거쳐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 드린 감동적인 모습과, 베들레헴 들녘에 있던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메시아 탄생의 소식을 듣고 구유에까지 찾아와 아기 예수께 경배했던 그 아름다웠던 모습들이 담겨 있다. 

 

둘째는, 사도 요한이 전하는 성탄이다. 이 성탄에는 앞의 복음서들과 같은 성격의 시청각(視聽覺)적인 드라마(Drama)들은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남다른 큰 감동(感動)과 울림이 있다. 그 어느 곳보다도 예수의 성탄하신 이유(理由)를 우리 가슴에 확실히 전달하고 각인시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리 같은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가슴으로 풍성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 요절은 요3:16절이다-! 이는 성경 66권 전체의 대지(大旨)로도 각인된 구절이며, 모이면 함께 불렀던 성가(聖歌)였고 복음송(福音頌)이었다. 마침, 이번 성탄일의 복음서 첫 본문이 이 구절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 이 기회에 이 요3:16을 합창(合唱)해 보자. 두 번 부르자. 한번은 말씀 자체만을 부르고, 또 한 번은 마지막 뒷부분을 성경구절로 대체하여 불러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영생을 얻으리로라. (두번째- 요한복음 삼장 십육절-).’

 

어떠신가? 함께 노래로 불러보니 뭐가 보이는가? 그렇다. 이번 성탄은 요한을 통하여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만나게 되는 이가 곧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아기로 오신 예수가 아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얼굴과 마음이다-. 요한은 그 어느 곳보다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죽음과 심판이 기다리는 험지(險地)인 인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참 모습을 전하는데 집중(集中)하였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큰 뜻에 복종하여 그 모든 하늘 영광을 포기하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인간되어 오신 이가, 바로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이심을 전하고 있다. 

 

여러분은 혹, 부모가 자식과 생이별(離別)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아는가? 아마도 인간이 생존하는 중에, 가장 슬프고 견디기 힘든 통한(痛恨)의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자식을 당신 앞에서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일 것이다! 

 

최근에는 젊은이들의 참사(慘死)가 잇따르고 있어서 매우 유감이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젊은이인 김용균씨가 둘이 일해야 할 곳에서 혼자서 야밤의 임무를 감당하다가 참변(慘變)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능의 어느 펜션에서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 10명이 ‘우정여행’을 갖는 과정에서, 가스관리 잘못으로 인해 한밤중에 3명이 참사(慘死)를 당했다. 

 

진정한 문제는 그렇게 홀연히 떠난 자들이 아니다. 남은 자들과 산 자들이 당할 고통이 큰 문제이다. 특히 그들 부모들의 멍든 가슴의 후유증과 계속될 탄식은 심각하다. 그 아픔을 보상할 것이 이 땅에 과연 있을까-? 그 중, 이번 목숨을 잃은 한 학생은, 집안의 아픈 누나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수시 응시하여 합격까지 했었는데, 이런 참변을 당한 것이다. 그 엄마가 그렇게 떠난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의 내용을 잠시 들어보자!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엄마에게 남편이었고 아들이었고 가장이었고 대들보였다. 네가 엄마 꿈에 나타나 나비가 되어 펄럭거리며 날아갔다.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부모 만나 다시 꽃피거라. ---.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왜 이렇게 짧은 생을 살고 가는지, 내 아들아,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해라. 모든 짐 다 벗어버리고 나비처럼 날아서 좋은 세상으로 날아가라. 잘 가라 내 아들아, 잘 가라 내 아들---.’(한겨레신문.11.20자 인용)

 

사실 성탄절은 하늘의 하나님이 이전보다 아주 새롭게 보이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이 세상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투명(透明)하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신건가?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 주신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악의 구덩이에 깊이 빠져 든 인간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어둠의 세상을 버리시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구원해 보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신 것이다(요일4:10참조). 

 

그 바람에, 성탄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에게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이지만, 그 아들을 받게 된 인간들에게는 가장 기쁘고 축복된 날이 되었다. 그게 곧 성탄의 참 모습이다! 그런 연고로 요한 사도는, 바로 그 놀라우신 하나님을 인류 전체에게 전하며 외치고 싶었다. -‘하나님, 그는 곧 사랑이시다’(요일4:8). 그러면서, 그의 아들을 내어주신 그 사랑이 이 땅에서 헛되지 아니하기를 바라면서, 우리에게 역설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을 믿고 영접할 것과,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자들답게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고 강조하였다(요3:16, 요일4:7).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의 방문을 받았던 예수께서 그를 향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조건에 대하여 주셨던 가르침을 전제로 하면서, 사도 요한이 인간 구원의 큰 그림을 제시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아들 예수를 보내신 성탄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자체로 증언한다. 그가 성탄을 하나님의 사랑 자체로 본 이유는, 그 성탄의 목적이 지극히 선(善)하였기 때문이다. 곧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모두의 구원(救援)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이나 정죄를 아예 삭제하신 것은 아니다.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별개로, 당사자 스스로의 행위와 선택의 열매로 주어질 뿐이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심판의 기준이 뭔가? 바로, 성탄하여 오신 예수를, ‘믿느냐 거부하느냐’가 그 기준이다. 즉 ‘예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것은 또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지금의 구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자신이 지금, ‘악을 행하며 어둠에서 사느냐, 아니면 진리를 따르며 빛에서 사느냐’라는 삶의 내용을 중심으로, 자신의 구원 상황을 내보이는, 일종의 ‘자체 생중계’를 하며 살기 때문이다. 말씀을 더 확인해보자

 

1)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 주심은, 전적으로 그의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목적도 멸망이 아니라 영생(永生)과 구원에 두셨다(16-17절). 정말 역설적(逆說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토록 폐역(肺疫)한 짓을 하고 있는 그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셨으니 말이다. 바로 이 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세상을 포기할 수 없는 지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는 대목이다. 

 

2) 하지만, 그 구원에는 단 하나의 엄중한 조건이 있다. 당신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일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심판이나 정죄가 면제(免除)된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참 빛과 생명을 거부하는 일이어서 그 자체가 악(惡)하기에, 이미 정죄 가운데 떨어진 것이다(18-19절). 

 

3) 정죄를 당한 자들은 자신이 정죄 받고 있음을 스스로 노출한다. 그는 이미 악에 사로잡혀 살기에 어둠을 더 사랑한다. 빛을 미워하며 자기의 불의가 드러날까 늘 염려하며 살아간다. 

-구원을 받고 사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밝히 자신을 드러난다. 언제나 진리를 따르며, 자기 삶을 하나님 안에서 행하고 있기에, 매사에 떳떳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산다.(19-21절) 

 

이제 성탄을 맞이한 교우들은 이 말씀 앞에서 다시금 자신의 구원 상태를 확인하라! 나는 진정 구원을 받은 자로 살고 있는가, 아직 정죄를 당한 자로서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주님 영접 여부가 결정적인 열쇠이며 갈림길이다. 부디 이 성탄을 새 인생의 전기가 되게 하라!

 

구약 예언서인 미가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하나님이 보내실 아들이 과연 누구시기에, 그토록 그가 자신을 믿는 자의 운명까지 결정짓게 하시는지를 밝혀 준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의 원(原)족보와 뿌리를 입체적으로 소개한다. 그는 본래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존재의 기원을 두신 분이다. 그의 이런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인간이신지를 입증하는 신학적 전거(典據)가 되었다. 

 

동시에 예언서는 오실 메시아의 신적 목양사역의 성격과 기반에 대하여서도 증언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도 전한다. 그 내용들을 더욱 깊이 살펴보자. 

 

1) 오실 분 메시아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심도 융합(融合)적으로 전한다(2절). 

 

① 메시아의 인간(人間)적 뿌리는 유다 지파의 거점인 베들레헴의 가장 적고 보잘 것 없는 에브랏 부족이었다. 나오미-룻-이새-다윗-예수로 이어진 가계에 속한다. 다윗 왕을 배출한 지파이다(삼상17:12,룻1:2,4:11-22참조). 그것은 오시는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 후손이어야만 한다는 성서적 근거로서 제시한 내용이다(2절,상). 구세주로 오신 예수가 줄곧 ‘다윗의 자손’으로 불린 이유이기도 하다(눅2:11,18:35 이하).

② 메시아의 하늘 세계의 뿌리도 소개되었다. 그의 근본(根本)은 상고(上古)에도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永遠)에도 존재한다. 이는 곧 그가 처음이요 마지막, 태고와 종말에도 존재하신 하나님에 잇대어 계신 완전한 신적(神的) 존재였음을 말한다(2절,하, 사7:3,14참조). 

 

2) 그가 오심의 때는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에 의한다. 민족적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낸 이스라엘의 남은 자(Remnant)들이 돌아오는 때여야 한다(3절). 

3) 오실 메시아의 신적 사역의 양대(兩大) 기반은 여호와의 능력과 그 이름의 위엄이다. 거룩한 왕(王)의 사역(목양)을 펼칠 것인데, 그는 창대하고 땅 끝까지 번성하실 것이다(4절). 

4) 그의 길에는 많은 시련과 도전이 있겠지만, 결국은 평화(平和)의 주(主)답게, 이 고통의 세상에 평화의 세상을 안겨 주시리라고 예고했다(5절).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교회의 지도자로 사역하게 된 사도 요한은 이 땅에 오신 사랑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보여주고 알리기를 원하였다. 오신 메시아를 교회 공동체 안에만 머물게 해드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주의 성탄(오신 메시아)을 하나님의 화목제물(和睦祭物)로 받은 자들이기에 더욱 영적 응답을 해야만 할 존재들이 아닌가! 그래서 요한은 그 기초적(基礎的)인 응답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한이 이렇게 외치는 근거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요한은 화목제물론을 근거로 다음의 두 가지 차원의 당위적 행위를 요구한다. 

 

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고백과 선포가 마땅하다.(8절) 죄인으로 형벌 받아 마땅한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저 흉악한 십자가(十字架)에 올리셔서, 우리 죄 값을 치르게 하신 그 하나님의 자기 부정의 행위는 한마디로, ‘사랑이었다’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9절). 그것을 우리는 시인하고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강조했다(7,11절). 그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으로 구원의 자리에 들어선 은혜를 입은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싸움이나 미움이나 배척과 증오일 리 없다. 오직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일뿐이다. 분열과 다툼은 성탄에 대한 큰 모욕이다! 그렇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모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서로 사랑하므로서, 우리 하나님이 사랑이심과 그 아들의 화목제물로 오신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게 우리의 소명이고 성탄에 대한 응답이다.

 

결론은 이렇다

 

진정한 성탄 맞이는 우리가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모습과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화목을 위한 희생으로 구원의 새 생명을 얻은 우리임을 기억하며, 우리 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아니한 모든 불화와 대결과 시기와 다툼의 어두운 장벽들을 허물어내고, 우리 자신부터가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 내는 일에 헌신하도록 다짐하는 일이다. 

 

이것 또한 잊지 말자. 우리가 받은 성탄의 주는 하나님과 인간의 융합적 영을 가진 분이셨다. 이는 우리 역시 하늘과 땅을 동시에 끌어안고, 그 분과 함께 화해와 평화의 세상을 열어가도록 소명을 받은 자들임을 말하고 있음이다. 응답하는 삶으로, 우리가 진리의 사람임을 보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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