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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성서주일-인권주일

관리자 2018-12-05 (수) 23:34 5년전 1391  

본문) 합 2: 1-4, 마 25: 1-13, 롬 13: 8-14  

 

오늘 주일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의 둘째 주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지키는 성서(聖書)주일이며 동시에 인권(人權)주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참 묘(妙)한 느낌이 든다. ‘기다림’을 말하는 ‘대림’이나 ‘성서’나 ‘인권’이란 주제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들이 주는 무게감도 큰 데-, 오늘은 이 셋을 하나로 묶어서 받도록 우리가 요구 받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받아야 할까? 

 

언뜻 보아서는, 성서와 인권은 왠지, 코드가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성서와 인권은 말씀과 세상, 하나님과 인간, 하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등으로 대비(對比)하여 보게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둘을 하나의 통전(通典)적으로 보아야한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그렇다. 우리는 이 세상 죄를 지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낮은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둘이 더불어 있음(공존. 공생함)을 보면 된다. 즉 대림절에 오신 그리스도의 양(兩)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 지를 보면 된다. 주님이 양 손에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서(聖書)와 인간(人間)이다-! 바로 그 대상을 본다면, 여러분은 오늘을 반드시 은혜로 맞이하리라-! 

 

그런데, 사람이 무엇을 간절히 기다리며 준비하게 되면 그 자체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것은 내가 곧 맞이할 그 상대에다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데에서 나온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으나, 기다리고 맞이하려는 내가 큰 변화를 겪는다. 신비스럽다. 그러기에, 잘 준비된 기다림을 뜻밖의 큰 선물들을 안겨 주기도 한다. 받는 자와 영접하는 자 모두에게 좋은 관계를 다지게 하면서,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씨너지 효과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해가게도 한다. 

 

마치 금년 초에 개최되었던 평창 동계올림픽이 그런 현장이었다. 정부가 지극 정성을 다하여 올림픽을 평화의 잔치 무대로 마련하고자 준비하면서, 북한 당국자들을 초청하고 영접하였다. 그 바람에 북한의 김여정을 비롯한 최고위 인사들의 방남이 이루어졌고, 그 바람에 남북 정상회담들이 연이어 개최되었으며, 그 바람에 전쟁 일보직전까지 나아간 북한과 미국의 최고 지도자들의 회담까지 이어지면서, 한반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어졌고, 이제는 공존.공생.공영의 한반도 시대를 열기 위하여 남북이 끊어진 철도를 잇기에 이르렀다. 그 바람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부끄러운 나라에서 존경과 기대를 받는 나라와 민족으로 변신해가게 되었다! 깊이 기다리고 잘 맞이하는 힘은 이렇게 새로운 세계와 인간 세상을 창조하게도 한다. 

 

대림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진정 오시는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하며 영접하고자 하면, 우리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뭔가 자신의 변화도 기꺼이 감수하면서 노력을 하게 되고, 상대가 기뻐할 것을 찾아서 거기에 나 자신을 맞추려고 힘쓰게 된다. 기다림에서 품어 나오는 힘이 크면 큰 만큼, 나 자신의 변화와 변신도 크게 된다. 주변의 변화도 거기에 따라 발생한다. 그러면 진정 어떤 기다림이어야할까? 오늘의 세 본문들이 주는 지침을 주목해 보자. 

 

구약 하박국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선지자 하박국는 여러 면에서 남다른 면모(面貌)를 보여 준 예언자였다. 일반적으로는 그를 대(大)선지자가 아니라 소(小)선지자로 구분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면모와 역할의 내용과 영향을 보면, 예언사(預言史)에서 대단한 발자취를 남긴 큰 선지자가 분명하다. 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하나님의 전격적인 부름을 받고 오직 지시만을 따랐던 대부분의 선지자와는 확연히 달랐다. 소위 준비 없었던 예언자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그러했다. 

 

1) 그는 하나님의 세상 통치의 방식에 대하여 궁금증도 갖고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며 물었던 선지자였다. 특히 주변 제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대응 방식에 관심이 컸다. 예컨대, 악인이 겁탈과 강포로 의인 위에 득세(得勢)하는 사회적 부조리 현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심판이 내려지지 아니하시는 모습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부르짖는 기도에도 쉬이 응답을 하시지 않는 여호와에 대하여, 그는 항의하듯 질문을 하기도 했다(1:2-4참조). 

 

2) 그는 또한 질문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올린 질문에 대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겠다는 믿음과 의지로 응답을 기다릴 줄 아는 선지자였다(2:1). 마치 자신이 초소의 망대 위에 올라서 있는 파수꾼인양, 자신이 매달려 드린 기도(물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응답을 주실 런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선언한 사람이었다. 

 

3)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묵시(黙示)를 받은 선지자였다. 그것도 음성이나 소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판(板)에 새겨, 언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는 기록(記錄)에 남길 말씀으로 응답을 받았다(2-3절). 기록의 힘은 듣는 것보다도 크다. 그의 이런 모습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의 게시판에, ‘함께 토론해보자’며 써 부쳤던 95개조 논제에 버금하는 영향력을 역사에 던진 것이 되었다. 두 가지 구체적인 응답을 받은 것이다. 

 

① 그 때(정한 때)를 기다려라. 끝은 곧 온다. 비록 더디더라도 반드시 심판 때는 오고야 만다(3절, 사8:1,30:8,렘30:2-7,시75:2참조)

② 그러나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산다(4절). 정직하지 못한 교만한 자의 허세(부픈 삶)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4절). 

 

이 말씀은 어떤 뜻인가? ‘잘되고 못되고’에 대한 판단이나 승패에 대한 세속적 판단을 중지하라는 말씀이다. 교만하고 포악한 자의 형통은 그 자체가 곧 심판 앞에서 다 빼앗기고 날아갈 허세(虛勢)에 불과하지만, 정직하고 올바른 의인의 삶은 비록 연약해 보이고 손해 보는 듯해도 그 기반은 하나님과 그 믿음 위에 있기 때문에, 그는 반석위에 선 존재요 실패 없는 승리자가 될 터임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의인은 근본에서부터 악인과 비교할 수 없는 우위(優位)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임을 분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이 말씀은 하박국의 신앙의 방향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했다! 참 신앙 자체의 탁월성에 눈이 뜬 것이다. 저 유명한 하박국의 승리의 노래를 참조하라(3:16-19참조). 그리고 이 하박국이 기록으로 남긴 말씀의 지침은 나중에 사해의 은둔(隱遁)공동체인 쿰란의 행동신앙 지침이 되었고, 사도 바울의 의인(義認)론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 성구가 되었고, 우리 세계 개신교도의 구원론의 지침이 되기에 이르렀다(롬1:17,갈3:11,히10:38 참조). 

 

결국 하박국의 말씀의 교훈을 이렇게 보아야 하겠다. 세상의 질서가 포악하고 교만한 자들 손에서 놀아난다고 보지 말라. 그것은 착각이지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뜨내기들과 같아서, 역사의 무대에서는 하루살이 신세일 뿐이다. 이 역사는 결국 주인이신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손에 의해서 판가름된다. 따라서 기도하는 우리는 천박하지 말고 긴 호흡의 믿음으로 대처하자, 다만 진실함으로써 생명을 보존하는 의인의 자리를 더욱 다져가며 살아가자.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로 알려진 천국 특성의 내용이다. 이 내용의 핵심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도 두 종류가 있음을 알리는 데에 있다. 즉 도중(途中)의 탈락자들과 끝내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자들이다. 매우 긴장이 되는 말씀이다. 그것은 이 말씀이 아예 불신자용(用)이 아니라 신자(信者)용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함께 믿어왔는데, 최후에는 ‘어떤 이들은 멸망으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 보좌 앞으로’ 가게 되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관심할 중요한 것은, 어떤 부분에서 그 운명의 갈림길이 있는 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1) 비유의 무대(舞臺)는 신부 댁에서 맞이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장이다. 성경에서의 신부는 교회를 말하고, 신랑은 당연히 오실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처녀 열 명’에 ‘신랑 한 명’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1절 참조). 

 

2) 여기에 두 종류의 처녀들이 등장한다.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들이다. 안타까운 차이이지만-, 그게 현실이다(2절). 그러면 대체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저주와 구원으로 갈랐는가? 바로 등불을 밝힐 기름통에 여분(餘分)의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다(3-4절 참조). 그것은 신랑이 예상 밖에 지체되어 늦게 올 때에도, 여전히 등을 밝히며 맞이할 준비를 했는지 못했는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증거와 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3) 운명(運命)의 그 순간이 왔다. ‘신랑 온다. 나와서 맞으라’라는 들러리들의 외침에, 그곳은 잠시 소란했다. 비록 늦게 오는 신랑 때문에, 그들 모두가 졸기도 하고 자기도 했지만(5절), 그러나 금세 그곳은 두 편으로 갈라졌다. 한편은 여분의 기름이 있었기에, 계속 등을 밝히며 신랑을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된 무리들이 나왔고, 또 한편은 그 때서야 바닥 난 기름 문제 해결을 위하여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뛰어다니다가 뒤늦게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다가 문전박대를 당하는 참사를 당하는 무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8-12절 참조). 

 

4) 이 비유에 대한 주님의 교훈(敎訓)은 이러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3절). 

 

그러면 궁금하다. 깨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여분의 기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체 어떤 이들이 슬기롭고 준비가 된 자들일까? 그렇다. 깨어 있는 자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형편이나 세상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예수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자신을 맞추어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현재의 삶을 주님의 오심과 궁극적인 그 날에 맞추어 중단이 없이 살아간다. 즉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삶을 부단히 지속하며 살고 있는 이들을 말한다. 

 

이런 슬기로운 처녀들의 모델이 오늘 본문 자체에 담아 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 표본이고, 서신서에 나오는 ‘주 예수로 옷 입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표본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교회의 사도인 바울은 종말론적 삶을 살고 있는 로마교회 신도들에게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심정으로 권고한다. 주님의 오심이 지체(遲滯)되더라도, 변함없이 그리고 흔들림 없이 잘 기다렸다가, 마지막에 탈락하지 않고 주의 영광의 보좌 앞에 이르도록, 복음서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도들이 될 지침들을 제시했다. 바울의 다음의 권고들은 종말론적 상황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분명한 영적 지침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더욱 주목(注目)된다. 

 

1)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이다. 남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율법의 요약이고 완성이며 성취이기 때문이다(8-10절). 십계명에 오른 다양한 요구들은 다 부분적인 것이지만,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그 속에 모든 계명들을 다 포괄하고 해결할 마스터 키(Master Key)와 같기 때문이다. 사랑하되 주도적(主導的)인 사랑이 바람직하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피동적 사랑은 금방 바닥이 드러나게 되지만, 주도적 사랑은 여분(餘分)을 가진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때를 잘 분별하는 일이다. 지금은 나태와 안일의 잠을 잘 때가 아니다. 어떤 이들을 시간이 갈수록 그 믿음에서 더 후퇴한다. 주님의 오심이 머지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때인데, 계속 뒷걸음질하고 있음은 불행의 전조(前兆)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주어진 매 시간을 그의 오심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 각성 속에서 살아야 한다. 밤이 깊고 구원의 그 날, 즉 낮의 그 날이 가까이 왔음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11-12절 참조) 

 

3) 버릴 것과 입을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13-14절). 버릴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진탕 먹고 마시는 일(orgy), 술에 빠지는 일, 성적 타락에 빠진 일, 방탕(放蕩)한 일(debauchery), 그리고 다투거나 시기하는 일 등이다. 이런 행동에 빠지면 누구든 신랑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삶을 취해야 되는가? 역시 슬기로운 처녀의 삶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옷 입고, 정욕의 노예(奴隸)로 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사는 일이다(14절).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믿고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강한 믿음과 의지가 필수이다. 그러나 막연한 기다림일 수는 없다. 기다림이 지루한 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니, 주님이 벌써 오셨습니까’라고 물을 정도로 내 삶을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붙 태우면서 사는 삶이 되게 하자. 어둠의 유혹에 단호해야 한다. 특히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순간이나 임시나 정욕이 아니라, 영원과 생명이며 예수이어야 한다. 

 

깊이 인내하고 긴 호흡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이웃 사랑에도 힘쓰는 생활을 강화시켜가자. 그것이 성서의 백성이며, 천부의 인권도 돌보는 깨어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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