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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관리자 2018-11-01 (목) 09:07 5년전 1305  

본문) 삼하 23: 13-17, 마 10:34-39, 약 4: 1-10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종교개혁(宗敎改革)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신앙의 두 뼈대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인간)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듣고 많은 깨달음과 도전(挑戰)을 받았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사랑이란 동력(動力) 위에서만 관계를 논(論)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사랑을 상실하면, 하나님과도 인간과도 그 관계나 교제가 무너진다는 점이었다. 바울이 선언한대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도 없다’(고전13:2-3참조)라는 말씀을 새삼 확인할 수 있음이다. 

 

그러면, 창조절 열 번 째 주일인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는가? 그렇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둘 중에서 우리를 먼저, ‘하나님 사랑’의 측면으로 이끄신다. 물론, 이웃 사랑의 영역을 완전 외면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웃 사랑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모든 사랑의 기본이 될 하나님 사랑을 보다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정도를 해야 가능하고,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준과 양태가 궁금하다 

 

하나님 사랑이라면, 먼저 생각하게 하는 좋은 사례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당신을 배신했던 제자들을 갈릴리로 친히 찾아가셔서, 그들과 해변에서의 조찬을 하시던 중에,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겨냥하여 질문 하나를 던지신 일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주님의 이 질문은 제자들의 배신과 어리석음을 추궁하고 비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베드로가 당신 이후의 교회 시대를 이끌 지도자로서, 이전의 부끄러움을 씻어내고 당당한 지도자로 온전히 일어나도록 하시려는 따뜻한 마음에서 던지셨던 질문이었다. 베드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응답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이 그 응답에 이렇게 답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주님의 이 질문은 그 때부터 수많은 예수의 사람들을 목양하는데, 그 사역의 책임을 지게 될 목회자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책임 있는 답변을 해야만 할 매우 무게 있는 질문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확인한다. 오직 사랑의 관계에 의한 행동만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모든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사랑 없는 관계란 껍데기뿐이며, 씨나 알맹이 없는 요식 행위에 그칠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과 헌신이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참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모든 언행에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하고,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어서 속히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고 강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 믿음 생활에서의 열매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표들이 내 삶에서 줄줄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내 머리나 생각으로 공감하고 동의만 한다고 해서, 주님을 체험하거나 그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는 점을 숙고(熟考)하여야 한다. 

 

또 있다. 누구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가 임한다. 곧 창조주이신 예수께서 친히 주시는 평화를 받는다! 이 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충분히 밝히신 바 있었다. ‘평화를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my peace)를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요14:27). 

 

평화도 두 종류가 있음이 확인된다. 하나는 세상이 주는 것인데, 그것은 군대 서열로 말하면, 졸병이나 하급자가 잠시 보장해주는 평안이다. 그런 평화는 환경이 바뀌면 금방 재난이 되고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최상급자가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거나 빼앗기지 않고 보장이 확실한 것이다. 예수는 영원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에게서 얻어낸 평화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확실하고 높은 가치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취할 수 있게 된다!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은 우리 모두를 바로 그 놀라운 주님의 평화와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신다. 그 길은 뜻 밖에 험난하고 협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우리를 당당한 평화와 능력의 그리스도인으로 올려 세워 주신다. 또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에 대한 답(答)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 모두 마음을 활짝 열고 담대히 그 세계에 들어가 보자.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왕이 되고, 나중엔 메시아 예수의 조상의 반열에 서게 되는 데에는 그만의 노력이나 공로만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도 분명히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충성으로 함께 한 30명의 장군(두목)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그들이 대장 다윗에게 보여 준 충성심과 그들의 헌신을 믿음의 눈으로 평가하며, 그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렸던 다윗의 차원 높은 신앙을 함께 전해 준다. 

 

1) 다윗의 삼십 두목(용사)들은 12지파 출신만은 아니었다. 가나안 현지인과 이웃 나라 출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다윗의 뜻과 안위를 위하여, 마음과 뜻을 다하여 다윗을 도왔다. 그들의 목숨을 건 눈부신 충성스런 활동은 기울어진 다윗의 전세(戰勢)를 뒤집어 놓기도 했다. 

 

2) 오늘 본문에 소개된 그 중의 세 사람은 요셉밧세벳(아디노)와 엘르아살과 삼마란 장수였다.(23:1-8참조) 이들은 추수기에 아둘람 굴에 있던 대장 다윗을 찾았는데, 그 때의 다윗은 주변의 블레셋 사람들의 포위망으로 매우 고단한 처지였다. 게다가 블레셋 사람들은 당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장악하고 거기에 요새(要塞)를 설치한 상태였다. 

 

3) 다윗은 사실 몸과 마음이 목이 말랐다. 왠지 고향의 성문 곁에 있는 시원한 우물물이 그리워졌다. 그 바람에, 한마디 던졌다.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15절)

 

4) 그 말을 들은 세 명 용사들은 두말 할 것 없이, 다윗을 위하여 움직였다. 블레셋 진영을 싸우며 돌파했고 끝내 베들레헴 성문 곁의 그 우물을 길어 가지고 돌아와 다윗에게 바쳤다. 정말 놀라운 충성심이었고 완벽한 다윗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이미 다윗에게 바친 이들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었다(16절,상). 

 

5) 문제는 그런 부하 장수들의 물을 받은 다윗의 반응이었다. 그토록 마시고 싶어 하던 물을 정작 손에 받아 든 다윗은 그 길어 온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 바로 야훼 하나님의 제단에 부어드렸기 때문이다(16절,하). 그 이유인즉 그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다녀 온 세 용사들의 피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17절). 물을 피라고 보게 되면,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윗의 고도로 절제된 행동에 담긴 영성(靈性)이다! 그는 왜 그 물의 주인이 자기가 아닌 여호와로 보았을까? 왜 물이 아닌 피로 보았을까? 

 

6) 그는 부하들의 충성심의 배경에는 인간 주인인 다윗을 넘어 영원한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음으로 보았다. 그만한 충성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가능했지, 부족한 인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나온 것일 수 없음으로 다윗이 본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그토록 위험천만한 전쟁터에 다녀올 때에도 이토록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장수들의 마음을 헤아리신 여호와의 돌보심 때문이었다고 본 것이다. 결국 야훼의 구원 행동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지켜주신 여호와께서 그 물을 받으셔야 마땅하다고 판단해 바친 것이다.(국제성서주석/Friz Stolz. 주석 참조).  

 

7) 결국 이 본문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어느 정도의 차원을 담고 있는 지를 생생히 엿보게 해주고 있다. 즉, ‘네 마음, 네 뜻, 네 힘, 네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이어야 함’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들의 ‘미친 짓’(?)도 바로 그 사랑에서라야 가능했다-! 

 

복음서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도 가족 사랑의 차원을 넘어야 비로소 가능해 짐을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메시지는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라함을 부르신 처음 내용을 연상(聯想)시키기도 한다. ‘네 고향(본토)과 친척 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우리는 잘 안다. 하나님의 그 지시는 가족의 해체가 목표가 아니라, 더 높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의 거듭남’을 목표한 일이었음을 말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기존의 혈육(血肉)에 얽매인 가족 차원을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모든 가족들이 가족의 원 창조주이신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구조를 이루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가족은 함께 구원을 받은 공동체로서의 높은 차원의 하늘 가족을 이루게 된다. 

 

1)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격렬한 울림은 ‘사람의 원수가 네 집안 식구이다’는 지적이다(36절). 

주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셨다. 당신을 가족 원수 만들기의 주역임을 당당히 선언하신 것이다. 당신이 자식과 아버지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평화가 아닌 불화(不和)하게 하려 한다고 하셨다(35절). 가(可)히 충격적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가정과 가족을 안겨 주신 분이 어떻게 서로를 원수 되게 하신단 말인가?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라, 수용하기도 쉽지 않다. 

 

2)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것은 혈육 중심의 가족관으로는 가족 모두가 구원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은 ‘가족 종교인’들이다. 가족이 자신들을 살리고 보호하며 삶을 보장해주리라고 간주한다. 바로 이 생각 때문에, 우리는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숱한 모순과 잘못에도 관대하고 무관심하다. 같이 몰락해가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인생을 망치고 원수가 되는 가족만 남는다. 

 

가족이 정말 최상의 양질의 가족이기 위해서는, 가족 내부의 특정 인물에 의한 메시아주의를 탈피하고 가족 모두를 구원할 외부의 메시아가 필요하며, 그에게 가족 모두가 복종할 영적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즉 가족을 건강히 쇄신해 줄 새 바람을 맞이하고자 그 동안 차단해 온 패쇄적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혀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의 중앙에는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계명과 말씀들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만 가족이 내 원수 됨을 예방할 수 있다.

 

3) 예수께서 가족의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당신에게는 합당하지 않다고 강조하신 까닭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분명해야 한다. 가족은 내 구원자가 아니다. 협력자일 뿐이다. 실질적인 내 구원자요 협력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가족 모두가 그를 사랑하여야, 나도 살고 또 우리 가족들도 살게 된다. 십자가는 이런 정상적인 틀을 잡아가는 데에서 걸머지게 된 멍에일 뿐이다(38절). 이제 가족사랑 위에 하나님 사랑을 두자!  

 

서신서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할까

 

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한 분이자, 예수님의 아우이셨던 야고보는 교회 생활을 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여는 말씀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 사랑과 섬김에서 발생하는 모든 착오와 잘못된 현상들을 거론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나도록 촉구하며, 새로운 행동 방안들을 일곱 가지로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촉진(促進)하기 위한 방안들은 이렇다 : 

 

1) 교회에서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추구하게 되면, 반드시 다툼과 싸움이 난다. 피하라(1절). 

2) 기도는 우리의 필요한 모든 귀한 것을 얻게 될 통로이다. 하지만 좋은 동기(動機)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면, 구하여도 얻지 못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2-3절). 

3) 세상과 벗되는 행위들을 중단하라. 하나님과 원수(怨讐)가 될 뿐이다(4절). 

4) 우리를 도우시고자 오신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애닮게 지켜보신다(5절). 

5) 교만을 무리치고 겸손(謙遜)해라! 그러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6,10절). 

6) 하나님께는 복종(服從)하고 마귀에게는 대적(對敵)하라(7절). 

7)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손을 깨끗이 하며,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을 성결히 하라(8절).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 사랑은 최상의 사랑이어야 한다. 다윗의 부하들의 자기 목숨을 바친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 드려져야 한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드려야 한다. 물론 세상 사랑보다도 우선해야 한다.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생활이 그 사랑을 입증해 줄 매체이다. 두 마음은 안된다. 교만은 더더욱 안 된다. 겸손과 깨끗한 자세로 하나님의 가족이요 자녀임을 확인시켜 드리도록 하자. 그런 사람에게는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더 큰 은혜가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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