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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 종교개혁기념주일

관리자 2018-10-24 (수) 23:38 5년전 1355  

본문) 신 7: 6-11, 마 5:43-48, 롬 1: 1-7 

 

오늘은 창조절 아홉째 주일이면서, 루터의 종교개혁 제 501회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오늘은 더욱 뜻 깊다. 특히 우리는 지난 해 종교개혁 제 500주년을 보내면서, 교회 개혁에 대한 의지를 다지며 건강한 교회의 회복을 위해 다양한 방향모색을 했는데, 그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얼마나 갱신을 해왔고 또 세상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했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난감한 점은 이것이라고 본다. 곧 교회의 자체 갱신 능력이 아주 허약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현저히 낮다는 점이다. 즉 제대로 회개를 할 줄 모르고 자기 성찰에 매우 둔감한 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치 저 바리새인들처럼 되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에는 민감하게 잘 지적하는 공격적 집단으로 변신하였지만, 정작 자기 속에 들어있는 들보에는 둔감하고 그것을 빼내려는 반성의 의지도 아주 밑바닥 수준이 되었다. 

 

제대로 된 교회라면, 정반대 상황이어야 할 터인데-,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교회들이 어긋났을까? 혹 설교자가 무슨 강요를 해도 ‘아멘, 할렐루야,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맹신자(盲信者)들을 한국교회들이 대거 생산해 낸 연유 때문이 아닐까? 그 바람에,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그런 양무리들이 많이 있기에 목회에 성공했다고 스스로 안위하면서 든든함을 느꼈을지 모르나, 그 설교를 먹고 자라온 양(신도)들은 가짜 뉴스에 영혼을 파는 낭인(浪人) 수준이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를 총체적으로 부끄럽게 하는 사례들은 많다. 지금도 길거리에 나와 반정부 데모를 하며 ‘박근혜를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는 저 가짜 뉴스 맹신자들의 주도층과 배후가 소위 기독교의 극우(極右)세력들이다. 저들이 믿고 있다는 뉴스를 조금만 들어보면, 그들은 지금 완전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는 무리들이다. 정규 뉴스들을 모두 어용으로 몰고, 유투브에 제작된 뉴스만 진짜 뉴스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사명감을 갖고 길거리에 나온다. 가짜를 물리치고 진짜 진리의 힘을 세워야할 기독교인들이 지금 ‘가짜 제작자’들이 되었으며, 나라의 평화와 화합을 앞장서 깨뜨리는 파괴집단이 된 것이다. 그 바람에 그들은 고립된 섬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한국교회와 신도들의 이런 어긋난 행태를 보고 승리의 쾌재를 부르겠는가! 

 

게다가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교회라는 별칭까지 들었던 강동의 어느 교회는 교단의 헌법까지도 완전 무시하고 세상의 지탄까지도 무시하면서, 자식에게 담임목사 직의 세습을 강행하였다. 그 세습이 더욱 심각한 이유는 목사와 교회가 소유하고 축적한 엄청난 자산들과 그에 얽힌 메커니즘을 지켜내려는 세속적 몸부림으로 보여 진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그 헛된 물질과 숫자의 힘으로, 교회가 지닌 정의와 화합이란 더 높은 가치를 짓누르는 악행을 범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공(公)교회 됨을 포기한 일이며, 수많은 교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일이다. 

 

한국교회가 또 다른 어둠의 늪에 빠진 것이 있다. 자신들이 설정한 공적(公敵)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 낸 일이다. 한동안은 이념(理念)과 이단(異端)들 사냥에 집중했다. 정치적으로는 반공(反共)운동에 앞장섰던 일이었다. 한국교회의 반공사상은 복음의 원수 사랑보다도 더 강렬했다. 그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이웃 사랑의 핵심인 원수 사랑의 설교가 힘들었고, 친미파들과 친일파들로 형성된 극우 인사들이 큰 소리를 치는 교회가 되었다. 태극기 부대의 손에는 지금도 미국 성조기를 흔들고 있잖은가! 그 바람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화해를 주장하던 우리 기독교장로회 교단 같은 곳은 항상 소수의 소리로 치부당해 왔었다. 

 

그리고 구원파나 신천지 등의 각종 이단들 정죄에 열심을 했다. 이런 점은 그래도 온 교회가 함께 공분(公憤)하는 영역이어서, 비교적 교회에 거부감이 없이 수용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교회가 공적들의 대상을 이슬람과 성소수자들 배제와 거부 운동으로 확대하고 있다. 요즈음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아랍계 난민들에 대한 거부에도 깊숙이 참여한 듯하다. 그 바람에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입지는 현저히 좁아졌다. 교회가 세상과 차별화되고 대안이 될 지혜와 사랑을 전혀 보여주는 데에 완전 실패하면서, 무조건 반대와 배척의 세력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왜 한국교회가 이웃 사랑의 법을 외면한 각박한 기독교가 되었을까? 왜 그렇게 유대교의 바리새파와 흡사해졌나? 없어도 될 정죄와 심판의 영성은 강화되고, 없으면 절대 안 될 긍휼과 자비의 영성은 찾아보기 어려워진 까닭이 무엇인가? 교회가 도대체 얼마나 더 망가져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길 잃은 양들에 대한 대처 능력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러다보니 세상을 위한 교회가 아니다. 이래도 되는가? 정말 ‘아직도 멀었다’는 자괴(自愧)감을 씻어낼 수 없다. 

 

자신이 없음이다! 우리 기독교가 세상을 구원할 종교로서 지닌 풍부한 우월함과 탁월함과 확실함을 넉넉히 보여주고 증거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 자신이 가진 영적 빈곤과 무기력을 감추고자 하는 간교한 마음 때문이다. 왜 그런 말이 있잖은가? ‘진정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사랑하고 살아갈 시간에 쫓기기에, 남을 미워하고 배척의 담을 쌓고 살 시간이 없다고-!’ 그렇다. 왜 우리 한국교회와 신도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탁월한 사랑과 은사를 극대화시키는 데, 이토록 실패하고 있는가? 진정 방향의 대전환이 없으면, 참극을 맞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을 다시 본다.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 부여하신 소명이 무엇이고 정체성(Identity)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시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본문 내용들을 보면, ‘택하셨다’, ‘부르심 받았다’, ‘세우심 받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거룩한 백성’, ‘성도’ 등의 유달리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 받은 이들에 관한 표현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말씀의 그 대상들이다!  

 

하지만 우리들 착각하지는 말자. 주님의 구별하심은 우리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세움 받은 우리를 통하여,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심에 있음을 각성하여야 한다. 그래서 먼저 세움 받은 우리를 중요시 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계속 사랑을 훈련시키시며, 무장시키고 계신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말씀들은 그 분의 기대 속에서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적합한 말씀이 된다-! 

 

구약, 신명기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구별과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이, 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理由)를 강력히 설명한 말씀이다. 설교자 모세를 통한 그 이유들을 들어보자. 

 

1)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요, 보배(寶盃)로 삼으신 백성’으로 삼으신 그 선택의 밑바닥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요 동기(動機)들이 있다(6절). 

- 그들이 모든 민족 중에 수(數)가 가장 많은 민족(Majority)가 아니라, 도리어 가장 수가 적은 민족(Minority)이었기 때문이다.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만이라도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시면, 그들은 이 땅에서도 그 어떤 돌봄도 받을 수 없었던 무리들이었기 때문이다(7, 8절,상). 

- 게다가 그들은 이집트에서 바로의 압제 하에 있는 ‘노예(奴隸)-하비루’들로서, 절대 돌봄과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이었다(8절,하). 

- 특히, 예전에 그들의 조상들인 족장(族長-아브라함,이삭,야곱)들과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돌봄을 맹세 하신 그 숱한 약속들을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 때문이었다(8절,중). 

- 그래서, 당신이 가지신 강한 손으로 불쌍한 그들을 억압자의 손에서 건져 내 주셨다(8절,중)

 

2) 사정이 그러한데, 이제 그런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 먼저, 진짜 신(하나님)이시며, 당신의 약속과 말씀에 신실하심에 그지없으신 분이심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섬겨야 한다. 그 분은 그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을 사랑하시되 자손 천대(千代)에 이르는 사랑을 중단 없이 베푸시는 분이시다(9절).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그 무엇으로도 그 분의 이러한 신실하심과 참되심을 허망하게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래도 끝내 배신을 하는 자들은 주의 미움과 징벌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10절). 

 

3) 그러기에 하나님을 향한 선택 받은 자들의 사랑과 충성의 응답(應答)은 바로 이것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과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11절). 이것이 십계명의 제 1의 축(軸)인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핵심이며 본질이다! 

 

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어떻게 보아야할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계명의 제 2의 축인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대응 차원에서 나왔다. 당시의 유대교도들은 정죄와 심판을 앞세우는 바람에, 이웃 사랑을 아예 말살하고 있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킨다는 자신들은 의인(義人)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으로 정죄하는 바람에, 세상에는 교만한 의인들과 정죄 당한 죄인들로 양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장을 아예 사라지게 하면서, 유대교를 ‘자기들만을 위한 폐쇄된 종교’로 한정시킨 과오에 빠지게 하였다. 

 

따라서 이웃 사랑의 실재를 이 세상에 다시 회복 내지 활성화시키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실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예수의 성육신은 바로 그 문제 해결을 위함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택한 제자들에게 바로 그 미션을 가지고 제대로 된 이웃 사랑의 주역이 되도록 택하셨고 교육하셨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미래(未來)를 열어갈 참된 주역으로 보셨기에 더욱 절실하셨다. 특히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허상과 실상을 동시에 지적하셨다. 

 

1) 그들의 이웃 사랑의 허상(虛像)은 이러했다(46-47절). 차별적 사랑이었고, 선택적 사랑이었다. 즉 자기들에게 잘해 준 사람들에게 보답적(報答的)인 사랑과 본능적(本能的) 사랑만을 한 것이다. 그들의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저급(低級)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들의 이웃 사랑의 입장에 영향을 주었던 근거들이 두어 가지 있었다(43절). 첫째는 시139:21-22의 말씀이었다. 거기에서 시인은 ‘주를 미워하는 자를 자기가 어찌 미워하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는 식의 옹호적인 발언이 있었고, 둘째는 쿰란 문서에서 발견된 글 때문이었다. 그곳에 보면, 유대교 당파 싸움에서 나온 글로써, ‘모든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모든 어둠의 자식들을 미워하라’는 선동적 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이 컸다. 

 

2) 하지만 성자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 된 자들’은 그런 조건적 차원을 넘어선 포용적 사랑을 실천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44-45절).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로 선택된 자들에게 이웃 사랑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주셨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이웃 사랑의 수준은 자기의 원수(怨讐)까지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44절)는 말씀이었다. 실로 이웃 사랑의 새 방향제시었다! 

 

주님은 그 제시 근거로, 하늘 아버지께서 해와 비라는 절대적 은총의 선물을 이 땅에 베푸실 때에, 의인과 죄인이란 차별 없이 모든 만민에게 골고루 베푸시고 계신 것을 실례로 들었다. 그런 모습을 닮은 무리들이 되어야, 비로소 그 사람이 하늘 아버지의 참 자녀임을 입증하게 된다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에 이르게 된다 하셨다(48절). 

 

이런 말씀에서 보면, 신도들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다! 그 중에서 성별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오직 사랑 하나로, 모든 차별과 배제의 높은 담(擔)을 해체시킬 능력을 보여 주도록 선택 받은 이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란 고귀한 이름을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거부해야 하고, 본능을 거슬려야만 하며, 세상적 치킨 게임의 생존법칙도 부정해야하는 단호함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성민(聖民)과 제자 선택은 당신의 그런 높은 뜻과 의지를 이 어두운 세상에 담대히 펼쳐 줄 것을 기대하신 결과이다. 그러니, 한국교회 신도들의 이웃 사랑 수준은 너무 심각한 위험 수준이 아닌가? 그래도 희망은 이 말씀을 받는 우리이다! 

 

서신서, 로마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고 원수된 이웃까지도 사랑하며 살라는 주님의 높고 위대한 복음을 온 세상에 보여 주고 전하도록 따로 세움 받은 거룩한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들이며 로마 교회임을 일깨웠다(1,5-7절). 

 

바울은 자신이 전한 말씀이야말로 바로 이 사랑의 계명 실천, 특히 원수와 죄인까지도 사랑하고 구원하시려고 저 흉악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와, 그런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실천하다 죽은 아들 예수를 부활시키셔서, 당신의 영원한 아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의 근거해서 나온 증언임을 역설하였다(2-4절). 즉 사랑실천의 무대로의 초대장이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가보지 못한 새 삶의 질서를 밟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온 맘을 다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원수는 없고 친구만 있는 존재로 살도록 선택받은 자들이다. 종교개혁(宗敎改革)운동은 이 일의 성취를 저해하는 모든 거짓과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저항 행동이다. 그래서 내 삶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전적으로 개방(開放)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를 거룩하신 당신과의 교제 안으로 초대하신 그 분의 삶에 동참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 모두는, 이 거룩한 영적 싸움판에서 결코 밀리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는 영적 전사가 되게 하자. 성령께서 그 길을 가는 우리들을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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