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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0-17 (수) 20:23 5년전 1309  

본문) 출 20: 1-21, 막 12:28-34, 빌 4: 8-9 

 

모든 생명체와 질서에는 그 자체를 건강하게 떠받치는 기본(基本)이란 뼈대(Frame)이 있다. 인간도 척추를 비롯하여 몸의 균형을 잡아 줄 각종 뼈대들이 갖추어져 있기에, 생존할 수 있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것이 인간의 몸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에도 헌법이란 기본 뼈대가 있고, 어떤 공동체에도 그 몸체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기본 법규와 규칙들이 있다. 종교에도 물론이다. 심지어 가정 같은 소규모 단위에도 그 몸체를 지켜내기 위한 기본 골격이 있다. 

 

그 기본인 뼈대가 든든히 잘 형성된 곳은 언제나 건강하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뼈대가 허약하면 그곳은 무엇을 하든 위험하기 그지없다. 조금만 다른 것들의 공격을 받으면, 중심을 잃고 헤매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전 정권이 국정농단을 하면서 헌법의 가치를 무너뜨리자 급격히 몰락했던 모습도 바로 그 연유에서 였다. 그런 점에서 기본 뼈대 구축과 보호는 우리가 끊임없이 확인하고 점검하며 보호하며 지켜내야 할 불멸의 가치이다. 이런 원리는 하늘 백성인 우리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 창조절 여덟째 주일에는 창조주께서 당신이 택한 모든 백성들에게 생명의 보전과 그 구원을 위하여 그런 기본 뼈대를 세우셨음을 일깨우시면서, 그것을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그렇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러하며, 교회에게도 그러셨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앙의 뼈대가 온전한 지에 대한 점검을 요구하셨다. 요즈음 이웃 교단의 어느 덩치 큰 교회가 교단의 헌법까지도 거역하면서, 자식에게 세습을 강행하면서 세상과 교회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준 일도, 바로 이런 기본질서에 대한 반역이어서, 염려스럽기 그지없다. 

 

마침, 오늘은 내주(10.28)에 맞이할 종교개혁(宗敎改革)기념주일의 예비(豫備) 주일이다. 이 날을 맞이한 우리들은 다시금 우리가 선 지금의 자리가 과연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제대로 서 있는 자리인지를 살피도록,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준엄한 명령을 듣는다. 그런 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막12:34절)라는 율법학자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본다. 

 

요즈음은 정말 흔들리는 교회, 중심을 못 잡고 있는 설교자들, 방황하는 신도들이 범람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의 뿌리가 들썩거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교회의 거듭남이 절실한 때이며, 그를 위해 강단 설교의 거듭남이 더욱 절실하다. 기업형이나 관리형 목회가 아니라, ‘말씀이 그러하시니 우리도 그렇게 간다’는 말씀이 주도하는 목회가 시행되어야만 할 때이다. 교회들과 신도들도 자신은 과연, ‘내가(우리가, 교회가) 진정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가, 멀리 있는 건가’-, 다시 묻고 재 정비해야할 절박한 시점이다.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구원의 영원한 기본 뼈대로 삼아야할 내용을 무엇으로 제시하는가? 바로 십계명(十誡命)이다! 그렇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당신이 주셨던 생명의 법(法)인 십계명과 그 실천을 그 중심 뼈대로 제시하여 주신다.  

 

구약 출애굽기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오랜 종살이 하던 야곱의 후손인 히브리인들을 당신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내시면서, 그들을 당신의 택한 백성이자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만드셨다. 그들은 더 이상 400여년 전(前)에 이집트에 식량 이민으로 왔던 족장 야곱의 70명의 가족들 수준이 아니었다. 이제는 엄연히 덩치가 큰 민족을 이룬 집단체(集團體)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비록 그들의 현재는 출애굽으로 인하여 광야 유랑민으로 지내는 처지였지만, 그러나 커진 민족과 백성으로서의 덩치를 유지하고 보전해낼 기본 질서로서의 법규나 내규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즉 백성들의 생활과 문화를 통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묶어낼 삶과 행동 지침이 필요하였다. 게다가 머잖아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국가도 이룰 무리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십계명은 그런 필요를 너무도 잘 아신 여호와께서 당시에 지도자였던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온 백성 모두가 지켜 행하여야할 율법(律法)으로 내려주신 열 가지 핵심 계명(誡命)들이었다. 그 때부터 이 십계명은 저 작은 나라 작은 백성인 이스라엘을 질적(質的)으로 변화시키면서, 나중에는 세계 역사에 미친 영향력(影響力)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족속으로 올려 세운 동력(動力)이 되었다(신4:5-8참조). 

 

십계명이 작은 이스라엘을 위대한 큰 민족으로 돋보이게 한 까닭은 그 법이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친히 만들어 주셨다는 점에서 그렇다(1절). 무엇보다도 이 법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고 고귀하며 거룩한 까닭은, 그 법이 지닌 영적 및 실천적 범위가 창조주를 향한 사랑의 법과(3-11절), 더불어 사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법(12-17절)이라는 양 날개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십계명을 준수(遵守)하는 자들의 가슴에는 항상 하늘과 땅을 품고 살아가며, 또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며 사는 거룩한 백성, 즉 ‘죄(罪)를 짓지 않고 사는’ 의(義)로운 사람들이 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20절 참조). 결국 최고의 법으로 최고의 인간들을 생산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솜씨(능력)가 한껏 들어난 곳이 바로 이 십계명에서 였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예수께서 한 유대인 율법학자(서기관)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으셨다. ‘(이스라엘에는 613가지 이상의 많은 계명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으뜸 계명이 무엇인가’(28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요지(要旨)를 담고 있는 (모세의) 십계명을 가장 으뜸 되는 계명으로 답하셨다(29-30절). 그만큼 예수께서도 십계명의 진리성과 생명력과 가치를 절대적으로 높게 평가하시고, 또 구원의 절대조건임도 확인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학자의 반응이 놀라웠다. 예수님의 답변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가 십계명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副應)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33절). 이게 무슨 말인가? 

내용인즉, 자기들 유대교는 제사 종교로서 하나님께 사랑을 표하는 제사적 행위는 열심이지만, 그러나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매우 절망적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까닭은 유대교는 오랫동안 철저한 율법주의를 강화시키면서, 자기들과 같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또 상대할 필요도 없는 심판 받을 자들로 간주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에서 밀어냈다. 그 바람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최고의 본성인 자비와 긍휼의 영성은 고갈되었고, 오로지 정죄와 심판의 칼질로 죄인만 양산하게 되는 바람에, 십계명의 한 축인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현할 장(場)으로서의 이웃이 원천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교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는 철저한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다. 예수께서 성육하여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다름 아니었다. 그런 유대교의 어깃장을 되돌려 놓아서, 하늘 아버지께서 세워주신 십계명의 잃어버리고 빼앗긴 무대인 이웃 사랑을 이 땅 위에 다시 회복시키고자 함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의 지상에서의 인간적 삶을 주목해야할 영역이다. 

 

이 서기관은 바로 그런 이웃 사랑 부분에서 자기 종교의 한계와 과오를 매우 가슴 아파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예수의 죄인들과의 어울림을 보며 그런 느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예수의 지적에 시인(是認)하면서 동시에 자성(自省)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자기 고백은 당시 교만과 위선의 집단으로 자리 잡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아주 낯설고 반발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혹 주변에 일행들이 있었다면, 그는 그 말로 인하여 크게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매우 용감했고 또 정직하였다. 자신들의 잘못을 아파하면서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나왔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예수께서 매우 높게 평가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도다’(34절). 나는 기대한다. 예수님의 그런 놀라운 긍정적 평가는 그의 앞길에 유대교의 개혁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위한 소명(召命)과 동력을 부여했으리라고 본다. 매우 궁금하다. 그 후 그는 과연 유대교 안에서 이웃 사랑에 대한 어떤 개혁자의 행보를 보였을까? 

 

서신서인 빌립보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옥중 서신의 일부이다. 그는 마치 복음서의 서기관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즉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는 모든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뜨겁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과 그 사랑 실천의 무대인 이웃 사랑을 요구한 십계명을 항상 생각하여 한다(8절 참조), 그것은 십계명만큼,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며 사랑 받을 만하고 덕과 기림이 있는 계명이 이 지구상에는 또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가치 인정만으로는 안 된다. 그 계명을 몸으로 직접 행(行)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9절 참조). 

 

결론은 이렇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세우려는 선한 노력을 해야 할 때이다. 무엇을 근거로 나를 그곳에 세울 수 있을까?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최고와 최선과 최상의 말씀의 법 위에 나를 세우면 된다. 그 법은 바로 십계명이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을 꾸준히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 실천을 위해 계속 힘쓰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그 놀라운 계명이 나를 높고 크게, 의롭고 지혜롭게, 공의롭고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리라! 

 

십계명은 예수의 길을 좇는 모든 이들이 당연히 기본으로 삼아야할 반석이며 헌법(憲法)이다. 교회 공동체나 신도에게도 최고의 진리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우리를 영원한 의롭게 살게 할 뿐더러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으뜸 계명이며 기본인 십계명 위에 우리를 굳게 세워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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